제183화
시후가 천마화등공을 펼치자 크리스털 잔을 중심으로 불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푸학-
순식간에 솟구친 불기둥은 점점 열기를 더해가며 커졌다.
주변의 공기를 끌어당기며 그 덩치 또한 점점 거대해졌다.
퀘스트 여관 중앙에서 솟구친 불기둥 덕분에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꺄악! 미쳤어!”
“도망쳐!”
“으악! 문이 안 열려!”
유저와 NPC는 서로 도망치겠다며 내달렸다.
일부는 창문으로, 일부는 중앙 문으로.
하지만 모두 열리지 않았다.
“그러길래. 도망치라고 했을 때 도망치지 그랬어.”
시후가 이미 내공으로 막을 쳐 입구를 막은 거였다.
테이블에 놓인 다른 크리스털 잔을 들어 올린 시후는 바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크리스털 잔을 바 테이블에 올려놨다.
이미 이곳에 있던 바텐더 역시 다른 이들처럼 문 앞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시후는 아무도 없는 곳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 죽길 바라나?”
아무도 없는 곳에 말했으니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시후는 개의치 않았다.
스윽-
손을 휘저어 선반에 있는 레인보우 워터를 꺼내 들고 있던 크리스털 잔을 채웠다.
“다 죽길 바라면 좀 더 빨리 죽이는 방법도 있는데 말이지.”
시후가 뒤를 돌아봤다.
천마화등공으로 일으킨 불기둥은 이미 사람 몸통만 한 두께가 되어 사방에 불을 뿜고 있었다.
천정부터 바닥까지 연결된 불기둥은 그 위세를 점점 더해갔다.
다행이라면 아직은 사상자가 한 명도 없다는 거였다.
다들 창문이나 벽, 문에 바짝 붙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불길을 피하고 있었다.
몇몇은 스킬을 써서 벽을 부수려고 노력했지만, 그것 역시 헛수고였다.
그들의 능력으로는 시후가 쳐 놓은 내공 막을 뚫을 수 없었다.
시후는 열기가 더해지는 불기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쿠하아아-
불기둥은 순식간에 두 배로 커졌다.
거기에 점점 회전하기 시작하자 주변을 단숨에 불태워 버릴 거대한 화염 회오리가 되었다.
시후는 화염 회오리에서 시선을 떼 다시 바 안쪽을 봤다.
하지만 이번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화염 회오리로 뻗은 손을 움직였다.
“으어어!! 온다, 온다!”
“으악! 어, 어떻게 좀 해봐!”
“스, 스킬!”
다들 다급하게 자신들이 펼칠 수 있는 방어 스킬을 써봤지만 헛수고였다.
화염 회오리에 닿은 스킬은 순식간에 부서졌다.
이쯤 되자 다들 눈에 포기가 보였다.
눈을 질끈 감으며 로그아웃을 준비하는 유저와 서로의 손을 꼬옥 마주 잡은 웨이터 NPC까지.
아마도 저 두 NPC는 서로의 사랑을 마지막까지 다짐하는 것 같았다.
리셋되면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말이다.
시후는 그러거나 말거나 화염 회오리를 그 둘에게로 밀었다.
마치 첫 번째 희생은 그 둘로 정했다는 듯이 말이다.
“으악!!”
둘이 입을 모아 비명을 질렀다.
화염 회오리가 둘의 지척까지 다다랐다.
그때였다.
“아이스 윌.”
두 웨이터 NPC 앞에 거대한 얼음벽이 치솟았다.
퍼버벅-
화염 회오리와 얼음벽이 맞닿으며 굉음을 울렸다.
그리고 시후는 저 얼음벽을 일으킨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눈을 돌렸다.
“계속 그렇게 숨어 있을 거면 불기둥 하나 더 만들어주고.”
일말의 거짓도 가미되지 않은 시후의 목소리였다.
“그만하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없던, 바 안쪽의 공간이 흔들거리더니 바텐더 차림의 남성이 나타났다.
남성은 눈에 힘을 잔뜩 주고는 시후를 노려봤다.
반면 시후는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크리스털 잔에 딸린 레인보우 워터를 홀짝일 뿐이었다.
“저러다가 정말 다 죽습니다.”
“알아.”
“…저들이 죽으면 제게 퀘스트를 받으실 수 없습니다.”
그랬다.
지금 나타난 바텐더 남성이 헤라 왕국 퀘스트 여관 마스터였다.
퀘스트를 주지 않겠다는 그의 엄포에도 시후는 레인보우 워터에 신경을 쏟았다.
“그럼, 뭐. 됐어.”
“됐다니요?”
“네가 주는 퀘스트 필요 없다고.”
“……? 그럼 왜 이런 짓을.”
마스터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직접 퀘스트를 받기 위해서 이런 짓을 벌인 게 아니었단 말인가.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시후의 행동에 의구심을 갖기에는 상황이 좋지 못했다.
“크아악! 살려줘!”
아이스 윌로 막고 있던 화염 회오리의 위세가 전혀 줄지 않아 밀리고 있었다.
“그럼, 무엇이 필요하신 겁니까?!”
마스터는 다급하게 말했다.
퀘스트를 받기 위함이 아니어도 시후가 이런 짓을 벌인 것에 이유가 있을 거라는 추측이었다.
시후는 크리스털 잔을 내려놓으며 검지와 중지 두 개를 폈다.
“두 가지?”
“그래. 첫 번째, 빌어.”
“네?”
“네가 뻔히 이 자리에 있으면서도 없다고 말했잖아. 나를 기만했으니 빌라고.”
이런 상황에서 사과를 요구하다니.
마스터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시후가 어떤 유저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무례하게 군 점. 사과드립니다.”
마스터는 허리까지 숙여 사과했다.
아직 첫 번째였고 자신의 사과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이곳은 피바다가 될 테니 말이다.
“그래. 다음부터 그러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라.”
“네. 그럼, 두 번째는….”
마스터는 서둘러 두 번째 조건을 물었다.
사실 이것이 시후가 이곳을 찾은 진짜 목적이었다.
“정보.”
“정…보요? 무슨?”
“어둠의 숲에 대한 정보 말이야.”
“바니힐 마을 인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마스터의 말에 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터는 그런 시후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유저 네임이….”
“천마.”
시후의 닉네임을 들은 마스터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반응을 확인한 시후는 천마화등공에 쏟아부었던 내공을 거두었다.
이곳에 들어온 애초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어서였다.
사실 시후는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퀘스트 여관 마스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한스텔 마을 퀘스트 여관 마스터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바 안쪽에 있었다.
다만, 인식 장애를 걸어 둔 것처럼 다른 이들이 인지하지 못할 뿐.
무슨 연유가 있나 싶어 웨이터에게 물었건만 돌아오는 것은 레벨에 대한 비웃음뿐이었다.
덩치 유저와의 실랑이가 이어짐에도 마스터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시후는 이런 일을 벌인 거였다.
‘이래야 다음부터 이야기가 수월해지니까.’
간 보는 짓을 했으니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준 거였다.
마스터는 점점 사그라드는 불길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천마님이셨다면 처음부터 그리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럼 처음부터 숨어 있지 말든가.”
“그건…. 제 형편이 좋지 못해 그런 거였습니다.”
퀘스트 여관 마스터에게 개인적인 형편이라니.
한스텔 마을 퀘스트 여관 마스터를 떠올려봤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나를 기만한 것은 맞잖아.”
“그 부분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이곳을 이렇게 불태우시면….”
“불태우기는 누가 불태웠다고 그래.”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화염 회오리는 불기둥이 되었고 이내 점점 사그라지더니 완전히 꺼졌다.
천마화등공의 매개체였던 크리스털 잔이 떨어져 내리자 시후가 허공섭물을 일으켜 바 테이블로 가져왔다.
“나는 이곳에 그 어떤 피해도 입히지 않았어.”
시후의 그 말에 마스터는 주변을 확인했다.
사실이었다.
그만한 화염 기둥이 솟구쳐 실내를 휘몰아쳤는데 퀘스트 여관에는 불에 그슬린 흔적 하나 없었다.
물론, 퀘스트 여관에만 말이다.
그 안에 있던 NPC와 유저들의 옷이나 머리카락 등은 상당히 손상된 상태였다.
“어떻게….”
믿기지 않는 일에 마스터는 시후를 다시 봤다.
레인보우 워터를 홀짝이는 그의 모습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마스터는 설마 싶어 눈을 비벼 시후를 다시 봤다.
이는 헤라 여관 마스터의 능력 중 하나로 유저의 레벨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 능력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딱 레벨까지만이었다.
다른 이들과 남다른 스텟을 보유한 시후였기에 레벨만으로는 그의 능력을 전부 측정할 수 없었다.
마스터는 보이는 레벨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시후의 능력을 계산하더니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천마님의 요구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시후를 따르기로 한다는 말이었다.
대신 그냥은 아니었다.
“제게도 요구 조건이 있습니다.”
“그렇겠지. 말해봐.”
시후는 마스터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다.
퀘스트를 주는 그의 처지에서 무료는 없으니 말이다.
짝짝-
마스터가 두 손을 들어 손뼉을 쳤다.
그러자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웨이터가 걸어왔다.
그는 시후가 이곳에 들어와 처음 마주쳤던 그 웨이터였다.
웨이터는 시후를 힐끗거리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마스터 곁에 자리했다.
“이 아이의 동행을 부탁드립니다.”
“응?”
“네?!”
시후보다 웨이터가 더 놀랐다.
웨이터는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이런 시련을 주느냐는 눈빛으로 마스터를 바라봤다.
그런 웨이터의 어깨를 마스터가 다독였다.
“이름은 멀란도랑 린달프일입니다. 지금은 형편에 의해 웨이터를 하고 있지만….”
“알겠어.”
“네?”
“알겠다고. 데리고 가겠다고. 그러니 저 녀석의 신상 명세를 굳이 읊을 필요는 없어.”
“……! 감사합니다.”
마스터는 그제야 이곳에 자신들 외에 듣는 귀가 많다는 것을 알아챘다.
시후가 쳐놓은 내공 막은 이미 걷혀 있었기에 많은 유저들이 도망쳤다.
하지만 여전히 자리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마스터 녀석이 나타난 게 이례적인 일인가 보군.’
주변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시후가 마스터를 배려한 거였다.
그리고 시후에게는 딱히 신상 명세를 읊어줄 필요도 없었다.
스윽-
시후는 웨이터에게 독안공을 펼쳤다.
종족 : 인간
직위 : ???
직업 : 마법사
<스텟 정보>
힘 : 50
민첩 : 50
체력 : 50
지능 : 203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진 상태.>
<거주지를 떠나야 한다는 불안감이 점점 깊어지는 상태.>
<천마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상태.>
시후는 독안공을 통해 멀란도랑 린달프일의 정보를 확인했다.
우선 생각보다 레벨이 높아 놀랐다.
‘보이는 모습은 어디 가서 딱 객사하기 좋은 녀석인데.’
그도 그럴 것이 멀란도랑 린달프일은 바람이라도 불면 훨훨 날아갈 것 같은 삐쩍 마른 몸을 갖고 있었다.
녀석을 보고 있자면 관악산 비고에서 양파를 처음 만났을 때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레벨이 Lv.349라니.
블칸 영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레벨이었다.
문제는.
‘무슨 녀석이 상태 이상을 세 개씩이나 걸려 있어?’
그에게 걸려 있는 상태 이상들이었다.
자존감이 떨어지고 불안감에 휩싸인 녀석이라니.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 대한 불신은 뭔데?”
“흐음!”
무심코 내뱉은 그 말에 멀란도랑 린달프일이 흠칫했다.
녀석은 시후와 눈이 마주치자 입까지 틀어막고 부들부들 떨었다.
한술 더 떠 슬금슬금 물러나더니 마스터 뒤에 숨기까지 했다.
“너 아까 나 비웃던 그 녀석 맞냐?”
“그때는 레벨이 204라고 하셔서….”
“내 레벨이 너보다 낮으니 우습게 봤다?”
“아, 아니요. 우습게 본 게 아니라….”
“우습게 본 게 아니면?”
“히익!”
녀석은 시후의 다그침에 몸을 움츠리며 마스터 뒤로 꼭꼭 숨어버렸다.
시후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더니 마스터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눈으로 말했다.
정말 저 녀석을 데리고 가야 하냐고 말이다.
상당히 귀찮다는 눈빛을 내포해서 말이다.
그런 시후의 눈빛에 마스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마르스 님을 교육하신 천마님과 함께라면 이 아이도 바뀔 수 있을 겁니다.”
“응? 마르스?”
시후는 왜 여기서 마르스가 튀어나오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