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시후가 말한 섭혼술의 대가는 요화선녀였다.
천마신교 사대 호법 중 하나였던 요화선녀.
그녀는 저급하다며 멸시받던 섭혼술을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경지까지 올려놓은 이였다.
특히, 지금 펼친 영령역혼술은 역작이라며 그녀가 자랑스럽게 내놓은 무공이었다.
섭혼술은 상대방에게 환각을 보여주어 심기를 흔들고 그 뒤틀린 틈에 시전자의 명령을 주입하는 거였다.
그런데 영령역혼술은 그 뒤틀린 심기를 인위적으로 닫아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시전자의 명령이 더는 들리지 않게 되고, 섭혼술에 당한 이는 그저 명령을 기다리는 로봇과 마찬가지일 뿐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반응하지 못하는 그런 상태가 되는 거였다.
태령은 영령역혼술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섭혼술에 문제가 생긴 것을 느꼈다.
그리고 조금 전부터 시후의 눈에서 짙게 피워지는 살기에 등골에 땀이 흘렀다.
시후는 긴장한 표정이 역력히 드러난 태령에게 말했다.
“섭혼술은 사령술과 달라 시전자를 죽인다고 해서 풀리지는 않지.”
“잘 아는군. 그래서 나를 죽여도 소용없으니 저 아이를 죽이겠다?”
태령은 손을 들어 옥총을 가리켰다.
옥총은 바들바들 떨다 못해 이제 침까지 흘렸다.
마치 이지를 상실한 병자의 모습 같았다.
태령은 그런 옥총의 모습을 보이며 시후가 손을 거두기를 바랐다.
이대로 저 둘의 섭혼술이 파훼되어 쓸모없게 된다면 자신은 오늘 이 자리에서 살아 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쓸데없이 대가리 굴리지 말아라.”
흠칫-
태령은 시후의 말에 흠칫했다.
어떻게 된 게 조금 전부터 머릿속이 까발려진 것 같았다.
“그럴 리가!”
태령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그동안 희생해온 나날이 아까웠다.
탱-
태령은 두 손을 맞잡으며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를 거세게 부딪쳤다.
쇳소리가 울려 퍼지자 바들바들 떨던 둘이 반응을 보였다.
특히, 황보태정은 축 처져 있던 두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태령은 지금 딜라마섭혼술을 극성까지 펼쳐 영령역혼술에 대항하는 거였다.
이미 황보태정과 옥총에게 걸려 있는 섭혼술의 점유율은 시후가 월등했다.
시후는 태령이 내공을 극성까지 끌어올리는 것에 맞추어 영령역혼술을 펼쳤다.
딜라마섭혼술과는 다르게 영령역혼술은 그 목적이 섭혼술을 푸는 데 있었다.
그랬기에 태령과 보폭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많게도 적게도 아닌 딱 태령이 펼치는 딜라마섭혼술의 강도만큼 말이다.
시후는 둘의 뇌에 파장을 만들었다.
딜리마섭혼술이 만든 파장과 같은 파장을 일으켜 덮어갔다.
그러자 황보태정의 팔이 다시 축 처졌다.
태령은 이를 악물었다.
이미 십 성으로 펼치고 있음에도 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
여기서 내기를 더욱 끌어올렸다가는 내상을 입을 우려가 있었다.
결심을 굳혀야 할 때였다.
빠득-
그렇게 준비했건만 이런 결과밖에 만들어 낼 수 없다니.
절로 이가 갈렸다.
“전생에 내가 그대와 무슨 척을 지었길래.”
태령이 전생까지 논하며 분노를 토했다.
“전생? 훗.”
그 말에 시후는 콧방귀를 뀌었다.
천 년의 세월을 넘어온 자신에게 전생을 논하는 자가 있다니.
무엇보다 이런 짓을 스스럼없이 벌이는 그녀의 전생이라면 결코 좋은 처지는 아니었을 거였다.
“내가 쳐 죽인 년놈들 중의 하나였을 수도.”
천마 시절 이런 짓을 한 녀석들은 직접 죽였으니 합당한 의심이었다.
“나를 끝까지 놀리는군.”
태령은 시후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인상을 구겼다.
기껏 진심으로 대답해 줬건만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무어라 한마디 해주려는 순간 태령이 움직였다.
태령은 품속을 뒤지더니 이내 단도 두 개를 빠르게 던졌다.
휙-
목표는 당연히 황보태정과 옥총.
폭선공을 펼치고 있는 둘이었기에 작은 충격에도 폭발할 거였다.
태령이 던진 단도가 어느새 둘의 뒤통수에 다다랐지만.
착-
단도가 둘의 머리에 꽂히는 일은 없었다.
어느새 몸을 날린 것인지 단도는 시후의 손에 잡혀 있었다.
“흥!”
태령은 이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고는 몸을 날렸다.
시후의 반대쪽으로 말이다.
태령은 도주를 택했다.
시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리는 태령을 보며 피식 웃었다.
“내가 그냥 보내줄 거라 생각한 건가?”
딱-
시후가 손가락을 튕겼다.
영령역혼술을 마무리 지으려는 거였다.
태령이 단도를 던진 시점에 이미 둘에게는 그녀의 영향력이 없어졌다.
시후는 마지막으로 손가락을 튕김으로써 둘에게 남아 있는 딜라마섭혼술의 잔재를 소멸시켰다.
그러면서 이미 점으로 변해버린 태령의 뒷모습을 향해 검지를 치켜들었다.
“탄지신통.”
퉁-
소림의 탄지신통이 시후의 손에서 빛을 발했다.
빛보다 빠르게 날아간 탄지신통은 곧 태령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꺄악!”
이만큼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녀의 비명이 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쓰러지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며 한쪽 다리를 쩔뚝거릴지언정 내달리는 신형에 속도를 줄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퉁-
시후는 다시 한번 탄지신통을 날렸다.
당연히 이번 목표는 태령의 반대쪽 다리였다.
“꺅!”
결국 두 번의 탄지신통을 맞고 나서야 태령은 쓰러졌다.
“멀리도 갔구나.”
스윽-
시후가 손을 들어 올렸다.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 있는 태령이 두둥실 떠올랐다.
시후가 허공섭물로 태령을 끌어당기는 거였다.
둘의 거리가 백 장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시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제 그녀를 눈앞에 두고 어떤 보답을 해줄까 고민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퉁-
잘 날리고 있던 연이 끊어지는 느낌과 함께 날아오던 태령이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녀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아직 겨울이 모두 갔다고 하기에는 추운 날씨임에도 그는 윗도리를 걸치고 있지 않았다.
다른 누군가가 봤다면 노출증 환자라며 비명이라도 질렀을 법한, 탄탄한 상반신 근육을 자랑하듯 그대로 내보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가 들고 있는 금색 석장(錫杖)이 그의 정체를 말해줬다.
“라마(喇嘛)?”
시후는 그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챘다.
태령이 사용한 딜라마섭혼술을 가르쳐줄 수 있는 유일한 곳.
그는 포달랍궁의 라마였다.
그것도 이마에 붉은 점 세 개를 찍은 궁주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것 봐라?”
확실했다.
전음이 아닌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이 음성.
포달랍궁 녀석들 특유의 무공이었다.
그는 들고 있던 석장을 살짝 들었다.
그러자 바닥에 쓰러져 있던 태령이 두둥실 떠올랐다.
좀 전에 시후가 보인 것과 마찬가지로 허공섭물의 경치를 펼친 거였다.
보란 듯이 포달랍궁 궁주가 보여준 허공섭물에 시후는 입을 열었다.
“귀하신 몸께서 몸소 납신 것 같은데 그냥 가려고?”
스팟-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시후는 순시보를 펼쳤다.
찰나의 순간에 이미 포달랍궁 궁주 앞으로 이동한 시후였다.
하지만 그런 시후의 모습을 봤음에도 궁주는 전혀 동요치 않았다.
아니.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궁주는 눈과 코와 입만 살짝 보이는 나무 가면을 쓰고 있었다.
“가면? 굳이?”
기를 읽을 수 있음에 정체를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 텐데도 가면을 쓰고 있는 연유를 물은 거였다.
-이건 사정이 있어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그건 네 사정이고. 누구 마음대로 여기까지만이야.”
시후는 당장이라도 달아날 것 같은 궁주의 모습에 천마기사를 펼쳤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의 실이 사방으로 펼쳐나갔다.
마치 그물처럼 궁주를 포위해갔다.
챙-
천마기사가 궁주의 몸을 포박하려는 그 순간 궁주가 석정을 흔들었다.
고리가 흔들리며 울린 소리와 함께 기파가 퍼져나갔다.
단지 그 한 수만으로 시후의 천마기사를 뿌리쳤다.
시후는 자신의 천마기사를 이토록 쉽게 뿌리친 궁주의 모습에 살짝 놀랐다.
지금까지 이만한 무위를 보여준 것은 중국에서 만난 혈천마라강시 이후 처음이었다.
반면 시후가 놀라거나 말거나 궁주는 석장을 들지 않은 손을 들어 합장했다.
-때가 되면 다시 만날 터이니. 그럼.
챙-
떠나겠다는 말과 함께 궁주가 다시 한번 석장을 흔들자 바람이 일었다.
시후는 바람이 이는 순간 다시 한번 순시보를 펼쳤다.
궁주에게 더욱 다가가기 위해서가 아닌 조금 전 있던 자리, 쓰러져 있는 황보태정과 옥총의 곁이었다.
“흥.”
팡-
시후는 날아오는 기파에 슬쩍 손을 휘둘러 쳐냈다.
궁주는 시후를 상대하기보다는 그가 보호하려는 대상을 공격한 거였다.
가면 뒤에 어떤 얼굴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얄팍한 술수를 부리다니.
만만히 볼 놈이 아니었다.
그사이 궁주는 태령을 데리고 훌쩍 날아올랐다.
그러고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시후는 포달랍궁 궁주가 보여준 무위를 되새겼다.
하는 짓은 괘씸하지만, 지금까지 만난 이들 중에 독보적인 강자였다.
만약 작정하고 겨룬다면 필승을 장담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가 원후태령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면.
자신이 황보태정과 옥총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 일대는 쑥대밭이 되었을 거였다.
시후는 새로운 강적의 등장에 입맛을 다셨다.
기감을 펼쳐봤지만 1km 안에서 궁주와 태령의 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제갈신길과 이야기를 좀 나눠 봐야겠어.”
원후태령이 나타났으니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제갈세가를 찾을 생각이었다.
그전에 우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둘을 처리하고 말이다.
스윽-
시후가 손을 들어 올리자 둘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 * *
“크윽.”
원후태령은 양쪽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신음을 토했다.
그런 그의 앞에는 나무 가면을 쓴 궁주가 있었다.
둘은 시후의 기감에서 벗어난 후 적당한 건물 옥상에 자리했다.
-많이 아픕니까.
“괜찮…습니다.”
태령은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고통에도 궁주의 말을 부정했다.
궁주는 석장을 들어 올려 그녀의 상처 앞에 가져갔다.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궁주가 입을 열어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궁주의 이마에 있던 붉은색 점 세 개가 움직였다.
점들은 서로를 쫓듯 자리에서 돌더니 이내 하나의 원으로 변했다.
그러고는.
쩌적-
궁주의 이마를 찢었다.
살짝 핏기가 보이며 찢어진 부분은 어찌 보면 하나의 눈처럼 보였다.
궁주는 덤덤하게 석정으로 태령의 상처를 눌렀다.
“크…!”
태령은 통증이 느껴지는 순간 이를 꽉 물었다.
지금 궁주가 자신에게 무엇을 하는지 알았다.
이것은 포달랍궁에서 오로지 궁주만이 할 수 있는 치료법이었다.
궁주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계속되자 석정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태령의 뻥 뚫린 구멍이 점점 메워졌다.
혈관이 연결되고 피부가 재생되며 상처가 아물었다. 마치 언제 구멍이 나 있었냐는 듯이.
궁주는 다른 쪽 허벅지도 똑같이 했다.
상처가 완전히 치료된 태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태령은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며 감사함을 전했다.
그에 궁주 역시 석정을 거두고 한 손으로 합장하며 인사를 받았다.
그렇게 태령의 치료를 마친 궁주는 태령에게 다가가 허리를 안았다.
-꽉 잡으시지요.
“…네.”
그녀의 다리가 치료는 되었다고 하지만 기력까지 회복된 것은 아니기에 궁주는 직접 그녀를 안고 움직일 심산이었다.
태령은 그런 궁주의 의도를 눈치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궁주의 배려를 받는 태령의 표정은 한없이 어두웠다.
그리고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촉촉했다.
궁주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태령의 얼굴을 잠시 마주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다음에. 다음에 그자를 만날 때는 오늘과는 다를 것입니다.
“암요. 분명 그러실 겁니다.”
궁주는 석정이 떨릴 정도로 손아귀에 힘을 주고는 날아올랐다.
다음이라고는 했지만, 그리 머지않을 때 만날 것을 다짐하며 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