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시후 역시 대장경은 황 노인에게서 처음 들었었다.
‘대장장이가 가져야 할 최후의 능력이랬나.’
황 노인과 대장장이질을 한 날에는 언제나 강의를 들었다.
제련은 어떠하며 단조는 어떠하니 대장장이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하냐는 등의 설명이었다.
천마의 극한 인내심으로도 밀려오는 졸음을 버티지 못했던 시간이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황 노인이 말한 대장경은 무공으로 따지자면 화경의 경지라는 것.’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그 경지.
초절정을 지나 큰 깨달음이 있어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인 화경(化境).
생각만으로 뜻을 이루고 늙지도 않으며 독에도 중독되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 화경의 경지였다.
대장경에 도달했다고 해서 화경의 고수처럼 늙지도 않으며 독에도 중독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만으로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이 화경의 경지와 같았다.
그렇다면 대장경 역시 화경처럼 큰 깨달음을 얻어야 들어설 수 있는 것인가?
그건 또 아니었다.
‘몸과 마음을 다한 담금질 후에 오를 수 있다고 했지.’
그리고 황 노인은 대장경에 오르기 위해 귀령공을 만들었다고 했었다.
대장장이가 대장경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귀령공.
이름이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그저 보이는 그대로 지었다고 했었다.
실제로 음산한 기운을 풀풀 풍기는 것치고는 꽤 쓸모 있는 무공이었다.
시후는 귀령공을 무공에 접합했고, 그 결과가 조금 전 황보세가 사람들의 팔을 거둔 거였다.
그들은 팔이 잘리지 않았음에도 움직이지 못했다.
의학적으로 파악해 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움직이지 못할 뿐이지 신경은 살아 있었다.
그 말은 팔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그대로라는 거였다.
마치 사람의 영혼 중 팔만 뚝 자른 것과 같은 효과였다.
“대장경이 있다는 것은 처음 들었어요.”
“그럴 거야. 황 노인이 후계자를 찾으면 알려준다고 했었으니깐.”
결국 후계자를 찾지 못했기에 전해지지 않은 것 같지만 말이다.
‘그냥 적당한 인재 하나 찾아 대충 전해주지.’
분명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 마음에 들어야 가르쳐줄 셈이었을 터였다.
그래도 그런 고지식한 면이 마음에 들었던 황 노인이었다.
시후는 천마 시절 황 노인을 떠올리며 미소를 보였다.
그 모습에 박초연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요, 좀 전부터 황 노인 황 노인 하시는데, 그 황 노인이 설마 대력공방 시조이신 황철력 님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시죠?”
“…….”
그 물음에 시후는 대답을 망설였다.
제갈세가, 남궁세가, 약선방.
지금까지 시후를 만난 이들은 시후가 반로환동한 고인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황 노인을 알고 있다고 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천 년 전의 인물을 직접 만난 것처럼 말한다?
늙지도 죽지도 않는 뱀파이어도 아니고, 그건 더 이상 인간의 범주가 아니었다.
시후는 대답을 갈구하는 박초연의 눈빛을 결국 무시하기로 했다.
“앞으로 네가 해야 할 것은 단조 작업뿐이다.”
“네? 갑자기요?”
자신의 물음에는 대답도 해주지 않고 갑자기 단조 작업을 하라는 시후의 말에 박초연은 당황했다.
시후는 박초연이 다시 황 노인에 관해서 묻기 전에 시선을 돌려 화로 근처에 있던 나무 막대를 집어 들었다.
“이것을 두드려서 말이다.”
“나무를… 헉!”
백 번의 설명보다 한 번의 보여줌이 낫다고 했던가.
시후는 직접 쇠망치를 번쩍 치켜들어 나무 막대를 내려쳤다.
쩌적-
분명 나무가 쪼개지는 소리가 울렸는데 어째서인지 나무 막대는 멀쩡했다.
아니, 시후가 내려친 부분이 아주 미세하게 파였다.
시후는 그와 같은 동작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허, 쇠망치로 나무 막대를 내려치는데 어떻게 저렇게 되는 거지?”
“그러게요. 평 장로님도 저거 가능하세요?”
“무슨, 저게 가능하면 내가 대력공방 방주게?”
평치혁과 조민은 시후가 두들기는 나무 막대를 보며 어이없어했다.
처음 시후가 두들겼을 때만 해도 살짝 파인 정도였다.
그런데 같은 곳을 여러 차례 두드리자 점점 그 부분만 깊게 파였다.
그것도 정확히 망치 머리의 크기만큼만 말이다.
한 뼘 정도 두께였던 나무의 중간은 이제 손가락만큼 얇아졌다.
한편 박초연은 좀처럼 보기 드문 집중력을 보였다.
옆에서 평치혁과 조민이 그렇게 떠드는 데도 말이다.
시후가 대장경을 배우라고 했다.
거기에 귀령공을 가르쳐준다고 했다.
그럼 지금 보이는 것이 그것일 터였다.
시후는 집중력을 잃지 않는 박초연을 힐끗 쳐다보고는 망치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귀령공.”
사아아-
음침한 기운이 망치에 담겼다.
그리고 조금 전처럼 나무 막대의 같은 곳을 내려쳤다.
쩡-
“어?!”
분명 같은 곳을 내려쳤는데 지금까지와는 다른 청명한 소리가 울렸다.
다들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싶어 나무 막대를 뚫어져라 봤다.
시후는 망치를 대충 바닥에 던지고는 나무 막대를 박초연에게 건넸다.
나무 막대는 이미 본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특히 시후가 내려쳐 움푹 파인 그 부분은 상당히 얇아진 상태에다가 하얗게 변질해 있었다.
박초연은 그 부분을 만져봤다.
“딱딱한데?”
본래 나무가 딱딱한 것은 알고 있다.
다만, 지금의 딱딱함은 그 본래의 강도를 넘어섰다는 의미였다.
어찌 보면 철과 같은 강도를 보일 정도였다.
어느새 조민과 평치혁도 다가와 나무 막대를 살폈다.
반면 시후는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본래 나무가 갖고 있던 수분을 일정량 제거한 것이다.”
“수분?! 그럼, 이게 탄소 덩어리라는 말이에요?!”
가장 먼저 놀란 것은 조민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반응한 것은 박초연이었다.
빠각-
박초연은 들고 있던 나무 막대에 힘을 주어 분질렀다.
시후가 내려쳐 하얗게 변질한 그 부분만 남기고 말이다.
“정말이네?!”
박초연은 유심히 관찰하더니 진짜임을 판단했다.
이 역시 박초연이 쓰고 있는 안경 덕분이었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기능을 가졌기에 이것의 가치를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그게 귀령공이고 네가 배워야 하는 거야.”
“배울게요!”
이제는 박초연이 더욱 열정을 보였다.
박초연은 손에 쥐고 있던 탄소 덩어리를 주머니에 넣었다.
만약 자신도 시후처럼 귀령공을 쓸 수 있다면 엄청난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을 터였다.
철과 같은 강도를 가졌지만, 철보다 가벼운 물건을 말이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박초연의 모습에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 노인이 좋아하려나.’
자신의 비전을 후대에 남기지 못한 황 노인의 심정을 생각해봤다.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면 죽기 전까지 그다지 아쉬워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는 배움에 있어 자질이 없다면 아예 배우지 않는 게 낫다는 말을 달고 살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언제나 천마를 아까워했다.
천마를 볼 때마다 황 노인은 피비린내 나는 무림의 일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자기 대장간을 이으라고 말했었다.
대장간에서 망치질하는 동안에는 근심 걱정을 모두 잊기는 했었지만, 천마 홀로 편해지고자 하기에는 이끄는 신도들이 많았다.
황 노인도 그것을 알았기에 강하게 권유하지는 않았다.
그저 잔뜩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을 뿐이지.
그래도 시후는 이렇게나마 그의 비전을 전하게 되니 기분이 좋았다.
“하루도 빼놓지 말고 나무를 단조해라.”
“네.”
“그리고 마지막 망치질에는 이것을 이용해서 내려치고.”
텁-
시후는 박초연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는 일인전승을 생각했던 황 노인의 유지를 이어주기로 했다.
곁에 있는 조민과 평수혁을 못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이래야 할 것 같았다.
‘이게 더 빠르기도 하고.’
그래서 직접 머릿속에 새겨주기로 했다.
내공을 끌어 올려 박초연의 머릿속에 직접 귀령공의 요결을 흘려 넣었다.
박초연은 생전 처음 겪어보는 경험이었다.
시후가 말을 하고 있었다.
다만 입이 아니라 손에 흘려 넣는 내공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하나하나 기억되고 있었다.
박초연의 의지나 노력도 필요치 않았다.
마치 컴퓨터에 자료를 옮기듯 귀령공이 박초연의 머릿속에 새겨졌다.
잠시 후 시후가 내공을 거두고 손을 떼자 박초연은 그를 놀란 표정으로 쳐다봤다.
“해봐라.”
시후의 명령에 박초연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머릿속에 담긴 귀령공의 요결을 읊었다.
사아-
“허?!”
그러자 시후가 보여주었던 음산한 기운이 박초연의 두 손에 담겼다.
물론 시후처럼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분명 같은 기운이었다.
“무공을 머릿속에 직접 때려 넣다니… 저게 가능한 거야?”
평치혁이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조민에게 물었다.
하지만 조민 역시 저런 것은 처음 봤다.
그동안 시후가 자신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었던 것을 되새겨봤다.
비천잠행술을 가르쳐 준다며 자신들을 오감을 닫은 채 땅속에 묻은 것이 기억났다.
또 진법을 가르쳐 준다며 장황한 설명을 순식간에 내뱉었던 적도 있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몇 날 며칠 쪽잠을 자며 공부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 저렇게 간단하게 알려줄 수 있다니.
“오빠!”
“넌 안 돼.”
시후는 조민이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저런 방법이 있었으면서 왜 그런 개고생을 시키며 무공을 가르쳐 줬냐고 따지려는 거였다.
시후는 눈에 잔뜩 쌍심지를 켠 조민의 이마를 검지로 꾹 밀었다.
“괜찮겠어?”
“뭐가요?”
“뇌에 직접 새겨 넣는 거라, 잘못하면 백치가 될 수도 있는데?”
“…네?!”
“네?!”
“헉!”
시후의 말에 조민과 박초연과 평치혁이 화들짝 놀랐다.
조민은 너무 큰 리스크를 감당할 수 없어 놀랐고, 박초연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큰 리스크를 감당했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평치혁은 슬쩍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머리를 굴리다가 흠칫했다.
시후는 그런 셋을 슬쩍 훑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든 말만 해. 나는 언제든 준비되어 있으니까.”
스윽-
시후가 손을 꼼지락거리자 셋은 슬쩍 뒤로 물러났다.
사실 그럴 일은 없었다.
시후가 알고 있는 모든 무공을 저들의 뇌에 직접 넣어줄 수도 있었다.
다만 머릿속에 새겨 넣는 것은 어디까지나 편법이었다.
‘직접 몸으로 배우지 못한 무공은 극에 다다를 수 없는 법.’
천 가지의 무공을 알고 있다고 해도 한 가지의 무공을 대성한 이를 이길 수 없는 것이 무림의 변하지 않는 법칙이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부터 양파가 보이지 않는다?”
망치질할 때 곁을 슬쩍 떠나는 것을 느끼기는 했는데,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니 아예 대력공방을 나선 것 같았다.
“그것도 그 자식들을 모두 데리고 말이야.”
시후의 말에 그제야 셋은 옥총이 없어진 것과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황보세가 사람들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너희는 여기 정리하고 있어. 내가 다녀올 테니.”
훅-
순식간에 시후의 모습이 사라졌다.
“우리도 따라가야 하는 것 아닌가?!”
평치혁이 화들짝 놀라며 조민에게 물었다.
누가 봐도 옥총을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걱정 마세요. 이미 그녀는 오빠가 거두기로 마음먹었으니까요.”
“진짜?”
“네. 물론, 그녀만이지만요.”
조민은 시후의 성정을 아주 잘 알기에 평치혁을 안심시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디 시후의 손에 많은 이들의 피가 묻지 않길 바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