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7화
목소리의 근원지는 시후가 검을 뺏어온 그자였다.
그자는 자기가 만든 검이 볼품없이 부러졌음에도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리고 자기네 방주를 아이라 칭해?’
수장을 가볍게 부르는 존재라니.
무엇보다 그는 전자상가 옥상에서 본 얼굴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다른 연구원들도 유리관에서 나와 따랐다.
십여 명의 이들 모두가 옥상에는 없었던 이들이었다.
시후는 이들이 무슨 행동을 할지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지척까지 다가온 그는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대력공방 제2 장로 황보태정입니다.”
“황보…태정?”
이름을 들은 시후는 옥총을 쳐다봤다.
그의 눈빛이 무슨 뜻인지 눈치챈 옥총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들 모두가 황보세가 사람들이라는 거였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황보태정이 기운을 일으켰다.
“저희 아이와 담소를 나누셨을 터이니 긴 이야기는 필요치 않겠군요.”
황보태정이 말한 ‘저희 아이’는 옥총을 말함이었다.
시후는 황보태정에게서 황보세가 특유의 기운을 느꼈다.
거칠면서도 태산이라도 무너트릴 것 같은 무거운 기운을 말이다.
거기에 한술 더 떠.
“하? 이 자식들 봐라.”
뒤따르던 이들 모두가 황보태정과 마찬가지로 기운을 일으켰다.
느껴지는 기운만으로는 평치혁과 동수였다.
문제는 그 기운에 명백히 적대감이 든다는 거였다.
시후는 고개를 돌려 박초연을 봤다.
그녀는 그들을 태연하게 마주하고 있었다.
마치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뒷짐을 진 손은 태연하지 못했다.
시후가 건네준 검 자루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두려움에 떠는 게 아니었다.
“아주 쉽게 마음을 정하게 해주는군.”
시후는 살짝 고개를 치켜들어 그들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기운을 일으켰다.
그것도 황보세가 특유의 기운처럼 거칠면서도 태산을 무너트릴 것 같은 무거운 기운으로 그들을 짓누르며 말이다.
“크흑! 이, 무슨….”
쿵-
황보태정을 비롯한 이들 모두가 무너지듯 바닥에 엎드렸다.
전자상가 옥상에서와는 다르게 일말의 배려도 없는 천마압정이었다.
버티지 못하면 땅속을 파고 들어갈 정도로 그들을 짓눌렀다.
“커헉!”
이미 몇몇은 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피까지 토했다.
그나마 황보태정이 내공을 극한까지 일으키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무, 무슨 짓이오!!”
악에 받친 듯한 그의 목소리에 시후는 덤덤하게 걸어갔다.
그의 앞에 다다라 허리를 숙여 눈을 마주한 시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쟤가 선택했거든.”
“…….”
“황보세가가 아닌 천업단에 남기로 말이야.”
“옥…총. 네년이!”
따악-
시후는 옥총에게 막말하려는 황보태정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내력을 전혀 담지 않은 손으로 말이다.
이미 내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고 있던 황보태정이었기에 꿀밤에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이. 내게 이런 치욕을!!”
따악-
시후는 또다시 꿀밤을 먹였다.
“말이 참 많아.”
“네…노…. 크윽!”
악에 바친 듯 소리치는 황보태정을 향해 시후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대들어봐야 돌아오는 것은 딱밤뿐이라는 것을 눈치챈 거였다.
살아생전에 이런 치욕스러운 짓을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분노가 치밀어서일까.
황보태정이 두 팔로 지탱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흥. 꼴에. 그거 줘봐.”
시후는 박초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에게 건네받은 것은 검신이 없는 검 자루였다.
시후는 그것을 황보태정의 눈앞에 흔들었다.
“너희들 실력이 고작 이런 것 정도만 만들 실력이라면 더더욱 살려둘 의미가 없거든.”
“헉! 사, 살려….”
황보태정은 시후의 말에서 살기를 느꼈다.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동상이몽도 이런 동상이몽이 없었다.
자신들은 시후에게 황보세가의 힘을 보여주려 했었다.
옥총의 의안에 담긴 영상으로 시후의 성정을 봤을 때, 그는 힘이 없는 자를 싫어했다.
그래서 힘을 보여줬다.
방주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30년 내공밖에 가지지 못한 박초연과 비교를 할 수 있게 말이다.
그래야 시후가 황보세가를 택할 테니까 말이다.
시후가 손을 내밀면 못 이기는 척 그와 손을 잡고 대력공방을 황보세가의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살기라니.
60년 인생에 이런 공포를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생각 정리는 끝난 것 같군.”
“자, 잠깐.”
스윽-
황보태정의 말을 깔끔히 무시한 시후는 검 자루에 기운을 흘려 넣었다.
그러자 기운이 일렁이며 검신이 나타났다.
“헉!”
그것도 곁에 있던 일행들이 뒤로 물러나게 할 정도로 흉흉한 기운으로 이루어진 검기를 말이다.
그것을 눈앞에 마주한 황보태정은 극도의 공포감이 엄습했다.
“사, 살려주시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살려달라며 애걸하는 게 전부였다.
“걱정 마, 목숨은 살려드릴게.”
어느 영화의 대사를 슬쩍 인용한 시후는 검 자루를 휘둘렀다.
샤아악-
모래가 가득한 땅을 검으로 그으면 이런 소리가 났을까.
소리에 의문을 품는 그 순간 시후가 검을 휘둘렀다.
“어? 어?!!”
쿵-
시후가 휘두른 흉흉한 검기의 목표는 상체를 지탱하고 있는 황보태정의 두 팔.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그의 팔은 멀쩡했다.
분명 검기에 베였을 텐데 조금의 피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황보태정은 두 팔을 잃은 것처럼 무너졌다.
시후의 일행들조차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어 눈만 굴렸다.
분명 베었음에도 황보태정의 두 팔은 몸에 제대로 붙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 팔은 본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후는 부들부들 떨며 얼굴을 땅에 처박은 황보태정을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올렸다.
뿌득-뿌득-
“크아악!!”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땅에 처박혀 있던 다른 이들의 두 팔이 번쩍 들어 올려졌다.
다들 앞으로 꼬꾸라져 있었기에 팔이 뒤로 꺾이며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고통에 더욱 일그러진 그들의 표정과 신음 소리가 대력공방에 울려 퍼져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시후는 그러거나 말거나 무심하게 검을 휘둘렀다.
촤락-
예의 그 흉흉한 검기가 길게 늘어지며 치켜져 올라온 그들의 팔을 베어버렸다.
투두둑-
실이 끊어진 연처럼 일제히 그들의 팔이 내려갔다.
하지만 그들 역시 검기에 베어졌다고는 말하지 못할 정도로 조금의 피도 보이지 않았다.
시후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을 때 황보태정이 소리를 질렀다.
“크아악!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왜 두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냐!”
그 목소리를 들은 시후는 검기를 거두고는 검 자루를 박초연에게 휙 던졌다.
“귀령공(鬼靈功)이라는 것이다. 쓸데없는 것을 베어버리기에는 제격인 무공이지. 그리고….”
시후는 고개를 돌려 박초연을 봤다.
“네가 배워야 할 것이다.”
“네?!”
사실 귀령공은 시후의 무공이 아니었다.
적을 죽이기 위한 무공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귀령공은 무공이라기보다는 제련 기술이라고 불러야 옳았다.
대력공방의 선대라고 불리는 대력거인 황철력, 황 노인의 기술이었다.
“본디 대장장이의 담금질이란 어떠한 물건을 만들기 위해 물질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행위이다.”
“…….”
“그 물건에 깃든 혼이라도 말이야.”
시후의 말에 박초연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력공방의 방주에게 내려오는 수많은 문헌에서 읽은 적이 있는 말이었다.
“물건에 깃든 혼을 빼고 장인의 혼을 넣어야 진정한 대장장이라 할 수 있다.”
“그래. 황 노인의 입버릇이었지.”
“그럼, 저들의….”
“손에 깃든 혼을 베어버린 것이지.”
시후의 말을 들은 모든 이들이 깜짝 놀랐다.
혼을 베어버리는 검이라니.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무슨 사령술도 아니고, 어떻게 검으로 혼을 벤단 말인가.
하지만 그 말을 부정하기에는 바닥에 짓눌린 저들 모두의 두 팔은 꼼짝을 하지 않았다.
“굳이 저들에게까지는 필요치 않은 순간이겠구나.”
푹푹-
시후는 지풍을 날려 황보세가 사람들의 수혈을 눌렀다.
그들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천마압정을 거두었다.
대신 다른 곳으로 기운을 휘둘렀다.
콰광-
황보태정이 작업하던 곳의 유리관이 뜯겨 나왔다.
시후는 일행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그곳으로 다가갔다.
아직 불길이 살아 있는 화로를 보며 시후는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기계들이 둥둥 떠올라 구석으로 옮겨졌다.
시후는 화로 곁으로 다가가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망치.”
“여기요!”
박초연은 시후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챘다.
시후는 지금 직접 대장장이질을 보여주려는 거였다.
눈치 빠른 박초연이 건넨 망치는 구석에 녹이 잔뜩 슨 거였다.
하지만 시후의 손에 닿는 순간 녹슨 망치는 없었다.
샤아악-
시후는 좀 전에 검 자루에 불어 넣었던 기운을 녹슨 망치에 둘렀다.
그러고는 한쪽에 마련되어 있던 철괴를 집었다.
‘하, 오랜만에 하려니 긴장되네.’
실제로 대장장이질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천마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했었으니 말이다.
천마동을 살아서 나온 이들은 천마신교에서 운영하는 대장간에서 무기를 의뢰할 수 있었다.
그곳에 이미 만들어져 있는 무기를 고를 수도 있었고 아니면 직접 만들 수도 있었다.
시후는 후자를 택했고 그때 황 노인과 처음 만났다.
그리고 그에게서 배운 대장장이질에 황 노인은 이런 말도 했었다.
‘칼 밥으로 먹고 살기 싫으면 망치 밥 먹게 해줄 테니 찾아오라고 했었지.’
마치 어린아이가 가장 아끼는 장난감을 내어주는 듯한 눈빛으로 천마가 대장간을 떠나는 날 울면서 말했던 황 노인이었다.
그때를 회상하던 시후는 박초연을 다시 쳐다봤다.
대력공방의 방주라고 했을 때부터 생각했던 거였다.
황보세가 녀석들 덕분에 시기가 좀 빨라지기는 했지만 이미 계획했던 일이니 제대로 가르쳐줄 생각이었다.
“보아라. 이것이 제련이고 단조다.”
그렇게 시후의 대장장이질이 시작되었다.
내력을 이용해 풀무질을 대신해 화로에 불을 일으켰고, 허공섭물을 이용해 철괴를 불에 넣어 달궜다.
그리고 꺼낸 철괴를 귀령공을 두른 녹슨 망치로 두들겼다.
땅-땅-땅-
적당히 두드려 모양이 변하면 다시 허공섭물을 일으켜 물에 담가 식혔다.
이와 같은 일을 시후는 묵묵히 반복하기 시작했다
점점 화로의 열기는 더해졌고 내열 유리관이 사라진 덕분에 주변은 후끈했다.
하지만 아무도 시후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되레 시후가 보이는 대장장이질을 숨죽여 보았다.
한 식경 정도가 흘렀을까.
치이익-
시후는 녹슨 망치를 내려놓으며 두들기던 그것을 물에 담갔다가 꺼냈다.
아직 물기를 머금은 그것의 형태를 일행들에게 보이는 순간.
“검….”
조민이 말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검이었다.
정확히는 검 자루를 입히지 않은 검신이었다.
“줘봐.”
박초연은 들고 있던 검 자루를 시후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시후는 한 손에는 검 자루를, 다른 한 손에는 검신을 들고는 기운을 일으켰다.
화르륵-
검신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궈질 정도로 삼매 진화가 일어났다.
반면.
사아악-
검자루에는 서리가 일 정도로 냉기가 일어났다.
시후가 천마분심공을 통해 한쪽에는 극양의 기운을, 다른 한쪽에는 극음의 기운을 일으킨 거였다.
그리고 천천히 검신과 검 자루를 맞물렸다.
치이익-
뜨거운 물건이 식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시 후 두 개의 물건이 완전히 합쳐지자 시후는 박초연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이건….”
시후가 건넨 검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든 박초현은 이내 그 검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남궁세가에서 주문한 X선에도 감지되지 않는 검.
그것도 검 끝을 손가락으로 누르자 엿가락처럼 부드럽게 형태가 변하는 연검이었다.
아직 숫돌을 이용해 날을 세우는 작업을 하지 않았음에도 예기가 느껴졌다.
“아….”
박초연이 검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감탄을 자아낼 때 시후가 다가왔다.
“네게 나와 같은 수준을 요구하진 않으마. 하지만 귀령검은 꼭 배워야 할게야.”
“하지만, 저는 내공이 반 갑자뿐인데요.”
“내공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이건… 음….”
시후는 황 노인이 했던 말을 되새겨보았다.
“아! 이건 대장경과 관련이 있으니까.”
“대장경이요?”
난생처음 듣는 단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