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시후에게 목이 졸린 양파.
아니, 황보옥총(玉蔥)은 속으로 욕을 수천 번은 했다.
‘빌어먹을 영감탱이들!’
어떻게 된 꼰대들이 자기 말은 지나가는 개가 짖는 것보다 못하게 들었다.
자신이 느낀 시후의 무위는 절대로 비고에서 본 것이 다가 아니었다.
그곳에서 그가 평치혁에게 보인 것은 고작 본신 무위의 티끌 만큼이었을 거였다.
직접 마주했던 옥총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황보세가의 영감탱이들은 자신들이 본 것만 믿었다.
그것도 의안을 통해 전송된 고작 360만 화소의 영상으로 말이다.
‘돈을 더 쓰든가, 아니면 내 말을 믿든가. 그것도 아니면 직접 나서든가.’
어떻게 된 꼰대들이 단 한 번도 앞에 나선 적이 없었다.
이쯤 되니 옥총은 자기 인생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되짚어 보았다.
좀 더 강하게 시후의 무위를 어필하지 못한 때?
아니면, 천업단원인 것을 들킨 때?
그것도 아니면 황보세가에서 태어난 때?
무엇이 되었든 옥총은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온 날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음을 눈앞에 두니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 꼭두각시였는지 알았다.
그래서일까.
후회로 가득한 눈물이 오른쪽 눈에서만 흘러내렸다.
“빌어먹을. 눈물도 두 눈으로 흘길 수 없는 꼬라지 하고는.”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 고작 꼰대들에 의해 애꾸가 된 자신에 대한 신세 한탄이라니.
흐르는 눈물 너머로 싸늘한 시후의 표정과 함께 검은 화염이 자기 몸을 뒤덮는 것을 봤다.
그 후 꿈을 꾸었다.
비루먹은 몸을 가진 소심한 시종으로 살아가던 때였다.
평치혁의 시종으로 살아가는 그때.
생각보다 즐거웠다.
평치혁은 밖에서는 개망나니 모습을 보였지만 자신과 둘만 있을 때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선비 같았다.
말투도 조심스러웠고 하는 행동에 품위가 있었다.
그를 보고 있으면 마치 연극을 보고 있는 것 같아 재미있었다.
이런 게 주마등인가.
참으로 실감 났다.
어찌나 실감 나는지, 그의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나. 야…. 어…. 일어…. 나…. 일어나!”
“네?!!”
버럭 지르는 그의 목소리에 옥총이 눈을 번쩍 떴다.
그런 그의 앞에는 시후가 녹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어? 어?”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와 폐 속에 녹아드는 것을 보니 죽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겪은 그 일들이 꿈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꿈인지 인지하지 못해 옥총은 눈만 껌뻑였다.
“오빠. 좀 너무한 거 아니에요?”
“그건 오히려 내가 할 대사야. 네가 하도 칭찬하기에 기대했건만, 이거 하나 없다고 그런 추태를 보일 줄이야.”
툭-
시후가 테이블 위에 던진 것은 어린아이 주먹만 한 구슬이었다.
옥총은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내 눈….”
“어, 맞아. 네 눈깔. 정확히는 의안이지.”
“저게 왜….”
그러고 보니 왼쪽이 허전했다.
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어보니 정말 의안이 빠져 있었다.
시후는 허공섭물을 일으켜 의안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천마지기를 일으켰다.
화르륵-
검은 불꽃이 의안을 뒤덮었다.
옥총은 그것이 자신이 겪은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조금 달랐다.
사아아-
검은 불꽃에 휩싸인 의안은 순식간에 산화해갔다.
한 줌의 재가 되더니 그조차 남기지 않겠다는 듯이 맹렬히 타오르는 검은 불꽃에 그대로 소멸했다.
“그럼, 저를… 왜…?”
옥총은 똑똑했고 시후가 자신을 불태우지 않은 것을 눈치 챘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신을 기만한 황보세가의 진인.
다른 이들이 시켰다 하지만 직접 시후를 기만한 당사자였다.
옥총이 아는 시후는 잠시 스쳤던 인연에 정을 베풀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마지막 기회를 주려고.”
“기회라 하시면….”
“선택하거라.”
“무엇을요?”
“네가 몸담을 곳을 말이다.”
옥총이 몸담을 곳이라 말하는 것이라면 단 두 곳뿐이었다.
황보세가와 천업단.
그곳을 떠올리는 순간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분명 죽음을 경험했다.
그 순간 16년 인생을 돌아봤고, 황보세가 꼰대들의 말을 들은 자신을 후회했다.
만약 지금 그 꼰대들이 곁에 있다면 침이라도 뱉어주며 말했을 터였다.
“천업단이요.”
이처럼 단호한 어조로 말이다.
그 대답에 시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좋아, 가자.”
“어디를요?”
느닷없이 가자며 시후가 일어났다.
그리고 곁에 있던 조민과 박초연과 평수혁도 당연하다는 듯이 뒤를 따랐다.
옥총은 분위기에 휩쓸려 목적지를 묻지도 못하고 뒤따랐다.
시후의 뒤를 따라 걸어간 곳은 전자상가의 가장 아래층과 위층 사이 비상계단이었다.
“여긴….”
옥총은 이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의안이 없기에 그러는 것 같았다.
“쟤는 조만간 그거 다시 만들어줘라.”
“네.”
이전과 달라진 옥총의 모습에 시후가 박초연에게 주문을 했다.
앞으로 제 사람으로 쓸 생각을 하니 의안이 없는 옥총은 그다지 달가운 모습이 아니었다.
사실 시후는 옥총을 정말 소멸시켜버릴 생각이었다.
의안처럼 말이다.
그런데 흑화(黑火)를 일으킨 순간 그녀가 보인 눈물과 내뱉은 말에 시후는 그녀를 살려주었다.
대신 의안을 빼내고 독안공을 펼쳐 그녀의 생각을 읽었다.
후회로 물든 16년 인생.
자의가 아닌 타의로 살아온 그녀의 인생.
그리고 최근 그녀가 찾은 인생의 즐거움.
시후는 고개를 돌려 평치혁을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시후의 시선에 평치혁이 움찔했다.
오늘 시후가 보여준 모습에 평치혁은 시후를 가볍게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는 굳이 연극을 하지 않아도 되기에 본 모습을 보였다.
걸음걸이서부터 선비 정신이 묻어나는 자기 모습을 말이다.
그런 평치혁에게서 마천서생을 떠올린 시후는 미소를 지었다.
“제,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그 미소에 평치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건 말건 말이다.
“그냥, 네놈도 과연 그놈 같은 삶을 살지 어떨지 궁금해서 말이다.”
“그놈이요? 누구….”
“있어.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굴더니 곁에 있던 여심 하나 알아보지 못한 녀석.”
그렇게 말한 시후가 옥총을 힐끗거렸다.
옥총은 시후의 말과 눈짓에 화들짝 놀랐다.
대충 봐도 시후는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 하하. 여기에 뭐가 있는데 그, 그러시나요?”
옥총은 벽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여기서 이야기가 길어져 봐야 평치혁이 자신의 마음만 눈치챌 것 같아서였다.
그러고는 대충 벽을 이리저리 눌렀다.
무슨 장치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하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달칵-
구석 모퉁이를 누르자 무언가가 눌렸다.
그러자 양쪽 벽이 순식간에 튀어나와 옥총을 덮쳐갔다.
마치 벽이 집어삼키는 듯한 모습에 옥총은 당황했다.
“꺄…악?”
탁-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이미 옥총은 그 자리에 없었다.
평치혁이 어느새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긴 거였다.
덕분에 벽은 허공을 덮칠 뿐이었다.
만약 그 자리에 그녀가 그대로 있었다면 쥐포가 되었을 거였다.
그러고는 벽은 다시 본래 모습으로 들어갔다.
“이건… 기관진식이라기 보다는 기계공학 쪽이라고 보는 게 합당하겠네요.”
“맞습니다. 허락되지 않은 이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력공방에서 설치해 놓은 함정이죠.”
조민이 오랜만에 학구열이 솟아 물어보니 박초연이 답했다.
이 입구에 대한 장비는 박초연이 개발해 장착한 거였다.
본래는 그저 안구와 음성만 인식하면 출입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그것들은 언제든 복제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내세워 이런 함정도 설치한 거였다.
“그래서 여기, 여기, 여기를 순서대로 누른 후.”
[안면 인식을 시작합니다.]
그러자 벽 가운데가 밀려 나오며 인식 장치가 나타났다.
박초연은 그곳에 얼굴을 가져갔다.
[출입자 ‘박초연’ 님의 안구 및 안면 인식에 성공하였습니다.]
[음성 인식을 시작합니다.]
삑-
짧은 부저음이 울리자 박초연이 모을 가다듬었다.
“크흠, 쇠를 녹이는 것은 불이다.”
[출입자 ‘박초연’ 님의 음성인식에 성공하였습니다.]
[출입을 허락합니다.]
철컹-
인식 장치가 벽으로 돌아가더니 벽이 반으로 갈라지며 양쪽으로 벌어졌다.
안쪽은 기다란 통로로 되어 있었다.
“이 길을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대력공방이 나옵니다.”
“드디어 대력공방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거군요.”
조민이 감탄하며 박초연의 뒤를 따랐다.
박초연은 흥미를 드러내는 조민을 보며 살짝 설렜다.
그동안 대력공방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왔었다.
자신이 방주가 되기 전이나 된 이후나 언제나 말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이렇게 누군가를 안내하는 처지가 되니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대력공방 안으로 들어가면 자신이 봐도 신기한 것들이 한가득하니 다른 사람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박초연 옆에 조민이 달라붙자 그 뒤로 시후가 다가갔다.
“어디 구경 좀 해보자. 그런데… 너희는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네?! 아!”
“어머?!”
시후의 말에 평치혁과 옥총이 서둘러 떨어졌다.
조금 전 옥총을 구한 이후로 평치혁과 옥총은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박초연이 여러 가지 인식 장치를 통해 입구를 여는 긴 시간 동안 말이다.
둘은 서로의 붉어진 얼굴을 보며 수줍게 웃었다.
“하… 그래라. 너희만큼 잘 어울리는 한 쌍도 없는 듯하다.”
아무래도 현대의 마천서생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평생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한 평치혁이나 다른 녀석들의 꼭두각시로 살았던 옥총이나.
둘만큼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줄 수 있는 녀석은 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저런 꽁냥꽁냥거리는 모습을 보자고 옥총을 살려둔 게 아니라는 거였다.
“시간 아깝다. 평치혁 앞으로.”
“네!”
시후의 정색에 평치혁이 후다닥 앞으로 달려갔다.
평치혁 역시 대력공방을 자주 들락거렸기에 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박초연과 평치혁의 안내대로 통로를 지나자 드디어 대력공방의 진짜 모습이 나타났다.
“허? 내가 상상하던 모습과는 많이 다르네?”
“그렇죠?! 아무래도 시대가 변했으니 공방의 모습도 변했지요.”
박초연의 말대로 대력공방의 모습은 시후의 상상과 전혀 달랐다.
시후는 한여름처럼 후끈한 열기가 느껴질 정도의 화력을 보유한 대장간의 모습을 기대했다.
적어도 화로에 바람을 불어 넣는 풀무질에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 정도는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무슨 아연맨 토니 스탁의 집 같잖아.”
쇠를 녹일 수 있는 화로가 있기는 있었다.
다만, 그곳에 풀무질은 사람이 하는 게 아닌 완전한 전자 시스템으로 되어 있었다.
그것도 내열 구성으로 이루어진 유리 방 안에서 말이다.
대장장이가 있기는 있었다.
다만 직접 망치질하는 것이 아닌 유압기를 조작하여 망치질했다.
거기에 그들은 흰색 가운까지 입고 있었다.
시후가 옥총과 일을 벌이는 사이 밖에 나갔던 인원들이 돌아온 거였다.
그리고 이들이 시후가 이곳을 찾은 진짜 목적이었다.
“대장장이가 아니라 마치 연구원 같군.”
자신이 기대한 대력공방의 모습이 아닌 것 같아 살짝 실망한 시후였다.
그런 시후의 표정에 박초연이 급히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은 완벽에 가까운 물건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렇겠지. 완벽에 가까운 양산품을 만들기 위해 말이지.”
“양산품이요?”
“지금 저기 나오고 있는 것들.”
시후는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최신 시스템으로 연무질을 마친 물건 하나를 연구원이 들고 나왔다.
시후는 그것을 향해 허공섭물을 일으켰다.
휙-
상당한 거리가 있음에도 물건은 순식간에 시후의 손에 자리했다.
“이건?”
“그건 이번에 남궁세가에서 의뢰받은 검입니다.”
“남궁세가에서?”
시후는 일전에 남궁진성에게 일러둔 일이 떠올랐다.
약선방 송하룡에게 보내주기로 한 정예들을 위해 무기를 확보하라고 했었다.
되도록 세관에 걸리지 않는 것으로 말이다.
“이게 탐지기에도 걸리지 않을 거라고?”
“아시는군요.”
시후가 검의 진가를 알아보자 박초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시후의 말대로 그 검에는 특별한 성분이 함유되어 있었다.
X선으로 물건의 상태를 알아보는 검색대를 통과하기 위해 말이다.
“검색대에 넣으면 그저 가죽으로만 보일 겁니다.”
박초연은 말을 하며 자신감 있는 동작으로 시후가 들고 있는 검의 검 끝을 잡고 눌렀다.
그러자 검이 휘청하며 휘어졌다.
힘을 가하자 마치 연검처럼 휘어진 거였다.
박초연은 이것을 이용해 검을 허리띠로 위장하려는 거였다.
시후가 어떻게 남궁세가에서 의뢰한 내용을 아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물건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검색대는 통과할 수 있겠네. 하지만.”
시후는 박초연의 손을 밀어내고는 검지를 세워 검신에 가져갔다.
검 끝에서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밑에 말이다.
그러자.
뚝-
“분명. 원하는 것은 검이었을 텐데 말이야.”
뚝-
“고작 이런 것으로 다른 검에 맞설 수 있을까?”
뚝-뚝-
시후의 손가락이 닿는 즉시 검이 뚝뚝 부러졌다.
무슨 막대사탕처럼 부러지는 검의 모습에 박초연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어느덧 검신이 모두 사라지자 시후는 검 자루를 박초연에게 내밀었다.
“다시 만들어. 검이라 불릴 만한 것으로 다시.”
“…네.”
박초연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검 자루를 받았다.
“너 설마 내가 준 것들도 저렇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니지?”
시후는 자신이 넘겨준 음양옥이나 현철이나 독각룡의 뿔 같은 것을 거론했다.
현대 시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귀한 것들을 고작 이런 쓰레기로 만들지는 않았나 싶은 우려에서이었다.
“그것이….”
“이것들이.”
말끝을 흐리는 박초연의 모습에 시후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것이 어떤 것들인데 고작 이런 쓰레기를 만드나 싶었다.
그때였다.
“하, 하하. 그 아이에게 너무 무어라 하지 마십시오.”
그때 공간을 울릴 정도의 내력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