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박초연은 시후를 보는 순간 흠칫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시후가 내뿜은 적의가 느껴졌다.
“왜?”
잔뜩 화가 난 시후의 모습에 ‘왜?’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 순간 저 멀리 있던 시후가 사라졌다.
“잘 지냈나?”
박초연의 귓가에 시후가 속삭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건물을 넘어 박초연 곁에 다가온 거였다.
누군가 갑자기 귓가에 속삭인다면 흠칫하며 놀랄 터인데 박초연은 그럴 수 없었다.
고양이 앞의 쥐처럼 자신의 생과 사의 결정권이 자신에게 없을 때 보이는 행동이었다.
박초연이 입도 뻥긋하지 못할 정도로 시후는 적의를 보였다.
시후는 부들부들 떠는 박초연의 어깨를 다독였다.
“여기 모인 이들이 전부인가?”
딱히 대답을 원하며 물은 것은 아니었다.
이미 기감을 펼쳐 건물 내부에 사람의 흔적이 없음을 알았으니 말이다.
대신 그 찰나의 순간에 여기 모인 이들을 살폈다.
다들 자신을 낯설게 여기지 않았다.
“50명 정도 되는가.”
정확히는 52명. 박초연과 평치혁을 포함해서 말이다.
시후는 50명의 눈에서 불안감을 보았다.
“다들 내가 누구인지 아는 눈치군.”
화가 잔뜩 오른 절대 고수만큼 대하기 어려운 이는 없었다.
그들의 눈에서 그것을 읽은 시후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꿇어.”
쿵-
의념기를 펼치자 52명 모두 일순간에 무릎을 꿇었다.
거부할 수 있는 수준의 무력이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콘크리트 바닥에 찍히는 무릎이 다치지 않게 기를 두르는 정도였다.
“크윽.”
다들 신음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놀랐다.
이곳에 모인 이들의 무공 수위는 제각기였으며 서로의 무공 수위를 잘 알았다.
방주의 직위를 갖고 있지만 박초연의 내공 수위는 고작 반 갑자 수준이었고, 이들 중 가장 강하다고 여기는 평치혁은 이 갑자의 내공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둘은 다른 이들과 똑같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겨우 드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시후가 개개인마다 가하는 힘을 달리해서 저마다 견딜 수 있는 수준만큼만 압박을 주고 있다는 거였다.
건물을 뒤흔들고 세밀한 내공 제어 능력까지.
말로만 듣던 시후의 무위는 자신들이 감히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지금은 오로지 그런 존재가 왜 자신들에게 적대감을 보이는지 의문만 들었다.
시후가 이러는 사이 조민이 양파를 이끌고 당도했다.
관악산 비고에서보다는 몸집이 커진 양파였지만 박초연은 단번에 알아봤다.
그리고 시후가 왜 저리 화가 난 것인지 이제야 깨달았다.
“시…후 님.”
박초연은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시후의 힘에 저항했다.
그래도 대력공방을 이끄는 방주라고 내공은 뒤처질지언정 정신력만큼은 월등했다.
시후는 박초연이 말을 좀 더 편히 할 수 있도록 내공을 조절했다.
“허억, 허억.”
“연유를 들어볼까?”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박초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후는 대답부터 강요했다.
너희를 위한 배려 따위는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알리는 거였다.
박초연 역시 그것을 느끼고는 대답했다.
“이곳은 눈과 귀가 많기에. 제 사무실로 가셔서….”
“쯧. 그러지.”
생각 같아서는 당장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혹시나 해 허락했다.
양파의 정체를 박초연만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라서였다.
휙-
시후가 손을 휘젓자 그들을 압박하고 있던 기운이 사라졌다.
다들 박초연이 그랬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머리를 들 수는 없었다.
여전히 시후의 적의가 느껴졌으니 말이다.
마치 고개를 드는 순간 머리가 땅에 떨어질 것만 같았다.
“굳이 너희들까지 들어올 필요는 없겠지?”
꿀꺽-
시후의 물음에 대답 대신 여기저기서 침 넘김 소리만 들렸다.
시후는 박초연과 평치혁에게 눈치를 줬다.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옥상을 내려갔다.
시후는 천천히 걸어 옥상 문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남은 이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밖의 일이나 처리해.”
에엥-에엥-
시후의 말이 끝나자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지상으로 도망친 손님들이 신고한 것 같았다.
건물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소동이었으니 소방차와 경찰차가 대거 출동했다.
저들은 이곳을 조사한다며 한동안 통제를 할 터였다.
시후의 말은 그들이 괜히 자신을 귀찮게 하는 일이 없도록 알아서 처리하라는 의미였다.
다들 그의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자.”
그렇게 시후와 조민과 양파는 옥상을 내려갔다.
그제야 50명은 털썩 주저앉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후우… 저분이 그분이라는 거지?”
“그렇게 보이지?”
“와….”
다들 시후의 존재를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목도한 것은 처음이었다.
대력공방에 엄청난 물건을 주며 제작 의뢰를 한 사람.
아니, 앞으로 대력공방이 모셔야 할 주인을 말이다.
이들은 잠시였지만 폭풍같이 휘몰아친 시후와의 만남을 되새겼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우리, 아무래도 주인을 제대로 만난 거 같지?”
“저런 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신다는 거잖아!”
50인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여기 모인 50인은 모두가 대장장이였다.
박초연과 마찬가지로 대력공방을 이끌어온 이들이었다.
눈치를 한껏 보던 이들 중 한 명이 슬쩍 손을 들었다.
“난 따를 것이네.”
정체를 숨겨야 하기에 자신의 재량을 마음껏 뽐내보지 못한 장인들.
이들은 시후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손을 쓰는 것에 전혀 거침이 없고,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것이라면 산이라도 부술 능력이 있는 존재였다.
시후라면 자신들을 더는 숨겨두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희망이 이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럼, 그분이 주신 첫 번째 명령을 수행하러 가볼까?”
“그럽시다!”
“오오!!”
50명의 대력공방 장인들이 손을 번쩍 치켜들며 환호를 질렀다.
시후는 의도치 않게 이들의 마음에 불을 지핀 거였다.
한편 시후는 이미 계단을 내려가 평치혁이 쓰는 전당포 사무실에 들어간 후였다.
시후는 푹신한 소파에 털썩 주저앉더니 귀를 후볐다.
“쟤들은 원래 이렇게 뒷말이 많나?”
이미 상당히 멀어졌건만 옥상에서 50인이 떠든 소리를 모두 들은 시후였다.
“누구요?”
“아니다.”
되묻는 박초연에 시후는 손사래를 쳤다.
저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지금 중요한 것은 눈앞에 있으니 말이다.
시후는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그러고는 한 차례 심호흡했다.
그렇게 힘을 썼음에도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다.
‘언제 느껴도 뒤통수 맞는 느낌은 참으로 더럽군.’
양파가 황보세가였다는 사실과 박초연이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토록 짜증나는 일일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비고에서 그냥 물어볼 걸 그랬다.
그런 후회를 담아 시후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너희에 대해 더 알아야 할 비밀이 있다면 오늘 다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네.”
“좋아. 일단 너희들의 진짜 소속에 대해서 들어볼까?”
시후가 박초연을 쳐다봤다.
박초연과 평치혁과 양파는 시후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조민은 어느새 탕비실을 찾아 녹차 한 잔을 내왔다.
시후가 찻잔을 들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말하라는 신호였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박초연이었다.
“저는 대력공방의 방주이자 S.W SOFT의 시스템 엔지니어를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박초연은 주먹을 움켜쥐고는 다짐한 듯 입을 열었다.
“천업단(天業團)의 단주입니다.”
“천업단?”
생소한 이름이었다.
천마 시절에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조민을 슬쩍 쳐다보았지만 조민 역시 모르는 것 같았다.
시후는 다시 박초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박초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말을 이었다.
“천업단은 천 년의 업을 이어온 단체로….”
“또 천 년의 업이야?”
요즘 들어 참으로 자주 듣는 단어였다.
법정과 마천서생이 천년 후에 있을 혈겁을 막기 위해 천마인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은 이해했다.
또 그것을 위해 안배를 해놓은 것도 보았다.
그런데 또다시 천 년의 업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천업단이라니.
점차 신경이 거슬렸는지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시후의 미간이 좁혀지는 것을 본 박초연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대력공방, 황보세가, 마천. 이렇게 세 무리의 핵심 인물들이 별도로 만든 단체입니다.”
“별도라? 점점 이야기가 돌아가는 것 같은데 핵심만 말하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간략하게 말하라는 시후의 엄포였다.
그 말에 박초연은 손에 땀을 쥐며 당황했다.
천 년을 이어온 이야기를 줄여서 핵심만 말하라니.
어디를 어떻게 줄여서 말해야 하는지 난감한 거였다.
“물이 고이면 썩기에 그것을 막고자 만들어진 것이 천업단입니다.”
보다 못한 평치혁이 나섰다.
그의 말은 이러했다.
대력공방, 마천, 황보세가는 천 년 전의 유지를 이어온 단체들이었다.
하지만 어느 곳이나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바뀌면 대의가 아닌 이익을 추구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세 곳에서 그런 이들이 나온 것은 불과 200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래서 세 곳의 핵심 인물들이 모여 세 곳을 감시하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천업단이라는 거였다.
그리고 여기 모인 세 명이 천업단의 일원이었다.
“그랬군. 그런데 박초연과 양파는 서로를 아는 것 같은데 너는 몰랐나 보다?”
시후의 말에 평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천업단은 아무리 단주라 해도 정확히 누가 천업단원인지 알 수 없으니까요.”
“그럼, 서로 어떻게 알아보는 것이지?”
“이것이요.”
평치혁은 긴팔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곳에는 엄지손톱만 한 크기로 ‘천(天)’ 자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고작 이것으로?”
누구라도 흉내 낼 수 있는 것으로 서로를 확인하느냐는 시후의 질문에 평치혁은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천 자가 흐릿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내공을 운기하면 사라지는 글자?”
“네. 쉽게 따라 할 수 있다는 것에서 역발상을 한 것입니다.”
표식을 쉽게 새길 수 있기에 내공을 운기할 수 있는 무림인이라는 조건을 추가 조건을 넣은 거였다.
“역발상이 좋네. 좋아, 그건 그렇다고 치고.”
시후는 양파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 2세를 논한 것은 황보세가의 독단인가?”
“……”
그 말에 박초연과 평치혁이 화들짝 놀라며 양파를 쳐다보았다.
둘의 반응으로 보아 시후의 짐작이 맞는 것 같았다.
천업단과 같은 감시 단체에서 시후의 2세를 원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다른 뜻을 품었다는 의미였다.
시후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대력공방, 마천, 황보세가.
이 세 개의 단체를 감시하는 것이 천업단의 존재 이유인데, 그 이상을 원한다는 것은 천업단도 고인 물이 되었다는 거였다.
“저희 황보세가의 독단입니다.”
양파의 대답에 시후는 턱을 쓰다듬었다.
이미 결론은 나와 있었다.
대력공방과 마천은 자신들을 위해 살아온 이들이었다.
조금 전 옥상에서 자신이 떠난 이후에 그들이 보인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황보세가 사람은 없었다.
각 문파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는 시후였기에 자신이 이곳에 당도하기 전에 양파가 무슨 수를 쓴 거라 생각했다.
“생긴 것답지 않게 참으로 깜찍한 짓을 할 줄 아는구나.”
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양파에게로 다가갔다.
조민과 비슷한 키인 양파였기에 시후는 그녀를 살짝 내려다볼 수 있었다.
“황보세가까지는 내게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데.”
“……!”
“재주는 좋으나 하는 짓이 뱀 같으니 곁에 둘 수가 없다는 말이다.”
“시, 시후 님… 컥!”
꽉-
시후는 변명을 하려는 양파의 목을 움켜쥐고는 그대로 들어 올렸다.
양파가 자신과 눈높이가 맞을 때까지 말이다.
그러고는 천천히 의안이 끼워진 왼쪽 눈을 코앞까지 오도록 끌어당겼다.
“잘들 숨어보거라. 모두 이 아이처럼 될 터이니.”
화르륵-
순식간에 검은 화염이 양파를 뒤덮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