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자기를 취하라니.
16세 소녀가 할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시후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천마 시절에야 16세는 아이가 있을 나이였지만 현대 시대의 16세는 아직 주민등록증도 나오지 않은 핏덩어리였다.
“난 경찰서 가기 싫다.”
“……”
넌지시 농담을 던졌건만 양파는 반응이 없었다.
시후는 그런 양파에게 다시 물었다.
“마지막으로 물으마. 네가 어찌 저 그림을 아냐고 물었다.”
시후는 마당을 가리켰다.
그곳에 양파가 그린 그림.
시후가 숭산 소실산에서 본 벽화와 완전히 일치하는 그림이었다.
법정이 남겼다고 생각한 그 그림을 똑같이 그린 양파의 의중이, 정체가 궁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의안. 그 안경처럼 독안공이 통하지 않아.’
조금 전부터 독안공을 펼쳤지만, 양파의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박초연이 사용한 안경과 같은 효과를 지녔다고 하더니 이런 빌어먹을 효과도 같은 것 같았다.
양파는 시후가 마지막이라는 말에 진심을 느꼈는지 처음으로 표정에 변화를 보였다.
“저는… 황보세가 사람입니다.”
“하?!”
시후가 최근에 들은 말 중에 가장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 말이 진짜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시후는 천마지기를 더욱 끌어올렸다.
그러자 양파의 미간 앞에 있던 바늘이 주르륵 녹아내렸다.
“증명이 필요할 것 같구나?”
“제가 증거입니다.”
꾸득-꾸득-
증거를 보여 주겠다며 양파는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뼈가 어긋나고 뒤틀리더니 다시 자리를 찾아갔다.
그러자 16세치고는 왜소해 보이던 모습이 점차 사라졌다.
되려 16세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장골의 모습으로 변했다.
시후를 마주한 양파는 190cm를 내다보는 그와 비슷한 키를 보였다.
거기에 온몸은 탄탄한 근육질로 이루어져 상당히 발육된 가슴의 크기가 아니라면 여성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 설마, 공로와….”
“네. 공로의 진인이 저입니다.”
그랬다.
무림 오절로 불리던 공로는 황보세가의 사람으로 대력공방의 주인인 황 노인에 뒤지지 않는 덩치를 가진 이였다.
그리고 지금 양파의 모습은 공로가 반로환동했다고 믿을 만큼 똑 닮은 모습이었다.
천마 시절, 공로를 직접 봤던 시후였기에 양파가 내민 증거를 믿었다.
“네 정체를 아는 것은 박 방주뿐이더냐?”
“아셨습니까?”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관악산 비고에서 그렇게 눈치를 주고받았는데 말이다.
시후 뿐만 아니라 조민도 둘이 무언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그저 시후의 명이 없으니 캐묻지 않았을 뿐이지.
“모르는 게 바보지. 그래서?”
시후는 양파의 정체를 아는 이가 박초연뿐이냐며 재차 물었다.
양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양파의 비밀이 황보세가의 진인이었을 줄이야.”
딱히 황보세가와는 연결고리가 없던 시후였다.
그들은 오대세가라는 허울과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다른 세가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위해 무던히도 애쓰던 반면.
황보세가는 그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
오직, 딱 하나.
협(俠)에 위반되는 것에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었다.
그래서 천마 시절 그들과는 척을 지진 않았다.
도리어 공로를 마주했을 때 그의 지랄맞은 성격에 박수를 보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제 정체를 알았으니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그래서?”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충분했다.
양파 역시 제갈세가 녀석들처럼 머리를 쓰기 좋아하는 부류.
“그래서 저를 취하시라고….”
“그건 필요 없다고.”
“‘그건’이라뇨?!”
자신을 ‘그건’이라며 물건처럼 말하니 살짝 기분이 상한 것인지 양파가 인상을 구겼다.
시후는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이었다.
“점점 이야기가 길어지는구나.”
“……!”
양파는 시후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천 년의 업이라는 말까지 했건만 저런 반응이라니.
이 일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인지 다시 묻고 싶었다.
“오빠를 우리의 상식선에서 생각하면 안 돼요.”
그때 별채로 들어오는 조민이 말했다.
조민은 성큼성큼 걸어와 바닥에 그려진 그림을 봤다.
사삭-
그 순간 양파가 발을 휘저어 그림을 지웠다.
하지만 조민은 이미 그림을 머릿속에 저장한 후였다.
시후나 양파처럼 그 그림의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당신이 황보세가 사람이라고요?”
“네.”
“그래서 오빠에게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데요?”
“그건….”
조민의 등장에 양파는 말을 아끼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조민은 만만치 않은 존재였다.
“여기서 더 주저하시면 오빠는 당신 다시는 안 보실걸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여기서 양파가 좀 더 주저한다면 시후가 자리를 떠날 것은 사실이었다.
이미 시후는 다음 일정을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양파는 시후의 눈치를 살피고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후…. 저희 세가에서는 천 년의 업을 ‘후손’으로 남기시길 바라고 있어요.”
“후손으로 남겨?”
“혹여나…. 이번 대에 실패를 하실 것을 우려한….”
“하?!”
그 말에 시후는 콧방귀를 뀌었다.
지금 양파가 하는 말은 자신의 실패가 전제로 깔려 있었다.
그래서 2세를 준비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는 양파의 헛소리는 그냥 단순한 헛소리가 아니었다.
시후는 하도 어이가 없어 양파에 대한 적대심까지 일었다.
“너희 황보세가. 어디 있냐?”
시후의 낮은 어조에 양파와 조민은 긴장감이 일었다.
말 한마디에 장내 분위기를 바꿀만한 기세가 느껴져서였다.
조민은 이미 자신이 나설 분위기가 아님을 알아채고는 한발 물러났고, 양파는 여기서 헛소리를 했다가는 좋은 꼴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저희는 용산에 있습니다.”
“거기 박 방주도 있는 거지?”
“…네.”
그것까지는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말투에 순순히 대답했다.
시후는 잠시 고민했다.
박초연에게는 자신이 비고에서 나온 것들을 맡겨두었다.
비고에서 나온 물건들을 통해 쓸 만한 것들을 만들라며 말이다.
지금까지 이렇다 할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상당히 열중하고 있다는 뜻인데.
지금 기분으로는 가서 깽판 치기에 딱이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물건이야 차차 만들면 되는 거니까.”
시후가 어떻게 한들 그들이 물건을 대충 만들 리가 없었다.
황 노인의 후인이라면 그만한 장인 정신이 있을 거였고, 무엇보다.
‘대충 만들었다가는 나와 관계가 틀어질 거라 생각할 테니까.’
일단 이 더러운 기분부터 털어버릴 생각이었다.
“가자.”
“네. 그럼 저희 쪽 차를….”
“아니.”
차를 준비하겠다는 조민을 시후가 만류했다.
강남에서 용산까지 차를 타고 가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그만큼 시간이 지체될 터였다.
시후는 양파를 힐끗 쳐다봤다.
“좀 전에 보니 축출공이 제법이더구나. 딱 쟤만 하게 변해 보거라.”
양파는 시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변형했다.
골격이 뒤틀리며 곧 조민과 비슷한 체형이 되었다.
“그런데 왜….”
체형을 바꾼 양파가 그 연유를 물어오자 조민이 한숨을 내쉬며 시후 곁으로 다가갔다.
“왜긴. 들고 가기 편하기 위해서죠.”
“들고 가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양파에게 시후가 손을 뻗었다.
“어? 어? 어?!”
그러자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시후의 왼쪽 옆구리에 쏘옥 들어갔다.
지금까지 자신을 취하느니 마느니 헛소리를 내뱉은 것치고는 순식간에 얼굴이 뻘게졌다.
그사이 조민은 알아서 시후의 오른쪽 옆구리에 자리했다.
상당히 익숙한 모습이었다.
“꽉 잡아라.”
시후는 둘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땅을 박찼다.
훌쩍 J.K 제약회사 건물만큼 솟구친 시후는 용천혈에 내공을 가득 담고는 허공을 박찼다.
펑-
마치 폭탄이 터지는 굉음이 울리는 순간 시후가 쏘아져 나갔다.
조금 전 제갈신길에게 알려준 현천미리보나 천마지기를 이용한 순시보를 펼치지 않았다.
약간의 분풀이랄까.
펑-펑-펑-
시후는 속도가 떨어진다 싶으면 또다시 허공을 박찼다.
그때마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하늘을 울렸고 시후의 신형은 쏘아져 나갔다.
이 정도 속도만으로도 일반인들의 시력으로는 쫓지 못할 터였다.
문제는 양쪽 옆구리에 끼워져 있는 조민과 양파였다.
둘은 볼때기가 부들부들 떨리고 침이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훔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마치 전투기에 맨몸으로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으, 으으으. 오… 빠아아아!”
참다 참다 못한 조민이 내공을 한 것 끌어올려 고함을 질렀다.
그 순간 시후가 우뚝 멈췄다.
툭-
시후는 양파를 짐짝처럼 놓아주었다.
반면 조민에게는 살짝 기를 흘려 넣어 울렁거림이 가실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게 시후가 생각하는 자기 사람 챙기기였다.
“우웨엑!”
덕분에 양파는 속이 뒤집혀 곧장 배 속에 있는 것을 게워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래서 어디냐?”
시후는 목적지를 물었다.
정신을 차리는 것이야 제 몫이니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양파는 그런 시후를 올려다보며 그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철저한 자기 사람을 챙기는 강자.
그 말은 자기 사람이 아니라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을 거라는 거였다.
지금 자신이 시후를 이끌고 황보세가로 가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꽉-
“악!”
“허튼 생각하지 말고.”
순간 시후가 손을 뻗어 양파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양파에 대한 호감도가 떨어지는 듯한 행동이었다.
“어서 안내해요.”
끄덕끄덕-
조민의 다그침에 양파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시후의 눈에서 점점 살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아서였다.
양파는 오른손을 들어 한 건물을 가리켰다.
“전자상가?”
“네.”
“저기 어디… 아니다. 됐다.”
시후는 정확히 어디인지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저 건물 안에 있다면 알아서 튀어나올 거였다.
스읍-
시후는 숨을 한 차례 들이마시고는 입을 가늘게 열었다.
-나와.
가늘게 뱉은 그 말에는 엄청난 내공이 담겨 있었다.
그러고는 그 소리를 잡았다.
공기의 진동으로 전달되는 소리를 내공으로 잡은 시후는 그것을 한 곳으로 보냈다.
양파가 가리킨 전자상가 건물로 말이다.
그리고 천마분심공으로 전자상가 건물을 감싸는 막을 쳤다.
본래 방 하나 정도 크기의 내공 막을 치는 데도 이갑자의 내공이 필요하다.
그런데 16동으로 이루어진 저만한 건물에 내공 막을 치다니.
현재 시후의 내공으로도 솔직히 불가능한 거였다.
하지만 시후는 마르스에게 천근추로 훈련시킨 것처럼 내공을 조절했다.
얇게, 얇게, 아주아주 얇게 말이다.
만약 시후가 내뿜은 내공이 눈으로 보인다면 현미경으로 봐야만 보일 수 있는 수준의 두께일 터였다.
그런 조절 능력으로 시후는 전자상가 건물 전체에 내공 막을 둘렀다.
그리고 그 안에 내공을 담은 소리를 밀어 넣었다.
그 결과.
“아….”
양파의 긴 탄식이 말해주듯 전자상가 건물 전체가 흔들렸다.
마치 그곳에만 지진이 일어난 것 같았다.
건물이 흔들린 것은 3초 정도 되었을까.
시후는 내공 막을 거두었고 건물 1층에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저곳을 방문한 일반인들일 거였다.
시후는 당황하며 뛰쳐나오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옮겨 전자상가 건물 옥상을 봤다.
그곳에도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지상으로 뛰쳐나온 일반인들과는 달랐다.
옥상에 오른 그들은 눈을 부릅뜨고 시후가 있는 곳을 노려봤다.
그리고 그중에는 시후의 눈에 익은 이의 모습도 보였다.
“박 방주. 하이.”
시후가 반갑다며 싸늘한 미소와 함께 손을 들어 올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