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아이고~ 도련님!”
진지춘은 왕국 성에서 태연하게 걸어 나왔다.
한 손을 높이 치켜들고는 세상 해맑은 표정으로 말이다.
“너, 이 자식….”
시후는 지풍이라도 날려 진지춘의 저 웃는 낯짝을 일그러트리려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진지춘이 한발 빨리 시후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더니.
“반갑구만, 반가워요, 반갑구만, 반갑습니다~!”
이러면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하도 어이없는 행동에 시후는 어찌할지를 몰랐다.
“너… 뭐 하냐?”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으니 진지춘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거 모르세요? 이상한데, 분명 엄청나게 유행하는 거라고 했는데?”
“누가?”
“지금 중국에서 열풍인 한국 드라마에서요.”
도대체 무슨 드라마를 봤길래 이런 구시대적인 개그를 하는지.
그에 대한 대답은 조민이 말했다.
“그거 설마, ‘1988 대답해라’예요?”
“어! 맞아! 거봐요~ 조민은 알고 있잖아요!”
“…….”
‘1988 대답해라’라면 시후도 익히 아는 드라마였다.
분명 88 서울 올림픽이 있었던 시대를 배경으로 쌍문동 골목에 사는 친구들 이야기를 다룬 거였다.
‘저 자식은 무슨 생각으로 그걸 익혀 온 거야?’
너무나도 어이없는 진지춘의 개그에 시후는 잠시 잊었던 본질을 떠올렸다.
“허, 이 정도면 재주다 재주.”
순간적으로 본질을 잊게 만들다니.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들어야 하는 여느 환락진 보다 더한 재주였다.
“너, 그거 나중에 한번 제대로 써먹자.”
“네? 무엇을 말입니까?”
반면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
시후는 진지춘의 질문을 뒤로하고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하인스를 봤다.
하인스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안도감과 자신을 살린 그레이트 쉴드의 주인이 진지춘이라는 것에 놀란 표정이었다.
“다주힐 님….”
감격이라도 한 것인지 하인스는 눈가가 촉촉해졌다.
덩치는 산만 한 매부리코의 대머리 중년 아저씨의 울먹거리는 표정이라니.
꿈에서라도 보기 싫은 장면이었다.
“네가 해결해라.”
툭-
시후는 진지춘의 등을 밀었다.
진지춘 역시 하인스의 그런 표정은 보기 싫었지만 시후가 떠미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하인스에게 미소를 보였다.
“아이고~ 집정관님!”
그러고는 시후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하인스에게 ‘1988 대답해라’ 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 시후는 절로 이마에 손이 갔다.
“하아, 저 녀석 때문에 없던 두통도 생기겠어.”
“오빠, 괜찮아요?”
조민은 시후의 마음을 백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넌 저 자식 오는 줄 알고 있었어?”
“네… 제가 연락드렸어요.”
“왜?”
굳이 저 골칫덩어리에게 왜 연락했냐고 묻는 거였다.
조민은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의원님께서 오빠가 연락 한번 없으시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연락하셔서요.”
조민의 말은 이랬다.
시후가 한국으로 떠난 후 진지춘은 약선방에서의 일에 몰두했다.
송하룡을 도와 중국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거였다.
천 년의 맥을 이어온 약선방이었기에 이미 고위층과 많은 접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꽌시 문화가 주축인 중국이기에 전화 통화로만 일을 진행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직접 한 명, 한 명 찾아가 이야기를 했다고 했다.
선물이라고 들고 간 소명단 덕분인지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덕분에 진지춘은 예상보다 빨리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 시후는 진지춘에게 연락 한 번 없었다.
조민을 통해 이따금 소식을 전해 듣기는 했지만 이번에 프로게이머 계약이라는 굵직한 소식을 듣자 진지춘이 급발진을 했다는 거였다.
“어떻게든 오빠 얼굴 한번 보고 싶다고 하도 사정사정하셔서 어쩔 수 없이 Safety World 일정을 알려드렸어요.”
“후…. 좋아, 그건 그렇다고 치고. 내 일을 방해한 건데?”
하인스를 도와준 연유를 묻는 거였다.
“그건, 제가 말씀드릴게요~.”
조금 전까지 하인스의 어깨를 다독이며 멘탈을 챙겨주고 있던 진지춘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천마멸겁장으로 저 멀리 날려버리고 싶은 마음을 갈무리하는 시후였다.
“그래, 이유가 뭔데?”
“다~ 도련님을 위해서죠.”
“나?”
“네, 저기 하인스가 착용하고 있는 거. 국보인 거 아시죠?”
진지춘은 하인스가 착용한 갑옷과 부츠를 가리켰다.
시후 역시 그것들이 국보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왜?”
“저거 어차피 도련님께서 쓰실 건데, 망가지면 안 되잖아요.”
“고작 저 정도 공격에 국보가 망가질 리가….”
“있습니다. 그것도 완전 파괴될 정도로요.”
시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민아?”
자연스럽게 조민을 찾았다.
“의원님 말씀이 맞아요.”
국보라고 만능 아이템은 아니었다.
세트 효과, 아이템 등급 상향, 유저 스텟 30%의 업그레이드의 엄청난 옵션이 붙지만, 정작 내구력은 꽝이었다.
어찌나 내구력이 약한지 정말 왕국의 위기 상황이 아니면 보물 창고에서 꺼내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게 귀한 거라서가 아니라, 내구력이 개똥이라서 그런 거라고?”
“네. 좀 아이러니하죠?”
“아이러니?! 허? 이건 똥망이지.”
저번부터 느끼던 것인데, 시후는 Safety World에서 극적인 아이템 효과를 본 적이 없었다.
남들은 아이템 덕분에 퀘스트도 클리어했다고 했는데 시후는 전적으로 자기 능력으로만 퀘스트를 클리어했다.
그나마 쓸 만한 거라고는 투산이 만들어준 월영검이 전부였다.
레벨 제한도 없고 유저 레벨이 오를수록 파괴력도 오르는 월영검.
지금이야 유니크 등급이지만 언젠가 시후가 Lv. 300대에 들어서는 순간 월영검 역시 레전드리 아이템 등급이 될 터였다.
시후는 허리띠처럼 차고 있는 월영검과 하인스가 몸에 두른 국보 아이템들 번갈아 봤다.
“하? 지금 나에게 준다던 게 고작 저런 빛 좋은 개살구였다는 거지?”
시후가 받을 야누스의 방패는 저 둘과는 다르게 쉽게 부서지지는 않을 거였다.
기본적인 방패의 효과를 극대화했으니 내구력은 상당했다.
하지만 야누스의 방패도 커다란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크기.
야누스의 방패는 거인족이 들어야 할 정도로 컸다.
지름만 3m에 달하고 그 무게만 해도 200kg이 넘었다.
떨어지는 유성을 막았다는 썰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라는 거였다.
하지만 진지춘과 조민은 차마 그 말을 시후에게 해주지 않았다.
여기서 그 사실까지 들먹이는 순간 시후는 왕국 성에 천마멸겁장이라도 날릴 기세였다.
“아, 열받네. 오늘 아주 재미있는 대화의 장이 열리겠어.”
“하아….”
시후의 말에 가장 큰 걱정을 하는 것은 역시나 조민이었다.
시후가 판을 벌이면 수습을 하는 조민.
그녀는 오늘 헤라 여왕과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보아라.
시후는 이미 헤라 여왕과 하하 호호 하며 만날 생각이 전혀 없는 눈을 보이고 있었다.
“가자. 너도.”
“커헉!”
시후는 하인스에게 천마기사를 펼쳤다.
일전에 연병장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 되었다.
거기에 시후는 허공섭물을 일으켜 하인스를 허공에 떠올렸다.
마치 놀이공원에 어린아이가 풍선을 들고 가듯 하인스를 들고 가는 시후였다.
그 뒤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조민이 터덜터덜 따랐다.
시후가 성 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종이 달려왔다.
“여왕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시겠지.”
한껏 토라진 시후의 목소리에 시종은 침을 꼴깍 삼키며 앞장서 걸었다.
등 뒤에서 시베리아 폭풍이 쫓아오는 듯한 한기를 느끼면서 말이다.
그렇게 시종이 안내한 곳은 시후도 익히 아는 곳이었다.
“여긴 식당이잖아.”
“정확히는 연회장이라고 해요.”
“그거나, 이거나.”
평소라면 조민의 정정해주는 말을 그대로 따랐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뭐 해, 안에 고하지 않고?”
“네, 네! 크, 크흠. 여왕님. 천마 님께서 당도하셨습니다.”
“들이세요.”
헤라 여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시종이 덜덜 떠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시후는 문이 열리자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연회장은 저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때는 시후 일행들과 식사를 위해 거대한 테이블과 음식들이 즐비했지만, 지금은 거대한 원탁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마치 회의를 위해 모인 듯한 모습들이었다.
헤라 여왕은 거침없이 들어오는 시후와 그 위에 둥둥 떠서 따라오는 하인스를 보며 살짝 놀랐다.
왜 시후는 단 한 번도 일반적인 모습으로 헤라 왕국을 찾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
“아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어허! 이런 무뢰한이 다 있나?!”
“집정관님! 네 이놈!!”
“당장 그분을 내려놓지 못할까!!”
원탁에 자리했던 이들이 벌떡 일어나 한마디씩 했다.
시후도 익히 아는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시후를 처음 본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어떤 이는 기운을 일으키는 게, 헤라 여왕의 명령만 떨어진다면 당장 달려들듯 한 기세였다.
헤라 여왕이 멍청하게 그런 명령을 내릴 리가 없겠지만, 시후는 그런 그들의 반응이 탐탁지 않았다.
“닥쳐.”
시후는 천마압정을 펼쳤다.
그것도 정확한 힘의 배분으로 자기에게 한마디씩 한 이들에게만 말이다.
누군가가 양손으로 어깨를 찍어 누르듯 그들은 동시에 두 무릎을 꿇었다.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게 힘을 써보기는 하지만 본인들의 힘으로는 일어설 수 없는 듯했다.
꿀꺽-
그 모습에 옆에 있던 이들의 침 넘김 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기껏 부탁한 일까지 처리하고 왔건만 대우가 형편없는데?!”
쩡-
시후는 단어 하나하나에 내공을 담아 말했다.
마치 사자후 같은 물음에 연회장에 있는 이들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크… 어….”
이미 천마압정에 짓눌린 이들은 저항 좀 해보겠다고 힘을 소모해서인지 사자후에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나마 다른 이들은 서둘러 방어 스킬을 펼쳐 버텨봤지만 그게 전부였다.
헤라 여왕은 옆에 자리했던 사제와 기사단이 막아섰기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적잖이 놀랐다.
시후를 마지막에 봤을 때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건만 그는 엄청나게 강해져 있었다.
일전에 시후가 날린 검격을 헤라의 가호로 막았었지만, 지금은 전혀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헤라 왕녀는 시후가 반가웠다.
스윽-
헤라 왕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제와 기사단을 옆으로 물린 헤라 왕녀는 원탁을 벗어나 한쪽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스윽-
“여왕님!!”
배꼽 위에 두 손을 올리고는 그 어느 때보다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에 시후 일행을 뺀 모두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헤라 여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세 그대로 입을 열었다.
“그대를 맞이하는 데 소홀함에 대한 미안함을 이렇게 표하네.”
“…….”
“내 신하들의 실수는 곧 나의 실수이니. 부디 용서해줄 수 있겠나?”
“…….”
시후는 용서를 구하는 헤라 여왕의 모습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시후가 원하던 반응은 이게 아니었다.
마르스 저리 가라 한 개망나니 모습에 발끈한 헤라 여왕의 반응을 기대했다.
그러면 적반하장이라며 적당히 힘을 써서 시후가 원하는 대화의 분위기를 만들 생각이었다.
적어도 원탁에 귀족들에게 천마압정을 펼칠 때까지만 해도 그 계획대로 되고 있었다.
그런데 여왕의 신분으로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쳇.”
시후는 하인스를 구속하고 있던 찬마기사와 귀족들을 짓누르고 있던 천마압정을 거두었다.
구속에서 풀려난 이들은 자기 몸을 챙기기보다는 여전히 허리를 숙이고 있는 헤라 여왕에게 달려갔다.
어서 허리를 펴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들이었다.
“너희는 진짜 우두머리 하난 잘 만난 줄 알아.”
다소 거친 말투였지만 시후의 말은 직설적이었다.
방금 헤라 여왕이 저러지 않았다면 시후는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을 터였다.
시후는 손을 휘저어 의자 네 개를 끌어와 일행들과 함께 앉았다.
헤라 여왕은 그제야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보이며 말이다.
“배려해줘서 고맙네.”
“배려라기보다는 너를 인정해서라고 해두지.”
“그건 그것대로 고맙군.”
헤라 여왕은 시후의 말에 입을 가리고 웃으며 본래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그러자 다른 귀족들도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시후가 가져온 의자의 주인공들은 빼고 말이다.
그들이 시후를 보며 우물쭈물하자 시후는 인상을 확 구겼다.
“너희는 투명 의자에라도 앉든가.”
그 넷은 조금 전 시후에게 소리쳤던 이들이었다.
넷은 시후의 눈빛에 움찔하더니 조용히 자세를 낮추었다.
그렇게 장내의 소란이 일단락되자 시후가 헤라 여왕을 빤히 바라봤다.
헤라 여왕은 여전히 시후에게 그 환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허, 그럼 그렇지.”
시후는 그 미소에 헛웃음을 짓고는 한쪽 다리를 들어 다른 쪽 다리에 얹었다.
여왕 앞에서 이런 삐딱한 자세를 보였지만 이 안의 그 누구도 시후를 나무라지 못했다.
다만 조금 전보다 더욱 무거운 정적이 흐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깬 것은 시후였다.
“그래서, 내게 부탁할 게 뭔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