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뭐야, 쟤 방금 접속한 거 아니었어?”
“그러게요?”
시후는 헤라 왕국 성에 들어서는 순간 로그인한 아킬라이를 발견했다.
빛이 갈무리되며 나타난 그가 하도 반가워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아킬라이는 갑자기 이상한 표정을 잔뜩 짓고는 로그아웃을 해버렸다.
“일전에 지인의 죽음으로 인해 접속하지 못한다고 했었나?”
“네. 맞아요. 그때 엄청나게 아쉬워했었죠.”
“으흠….”
아킬라이와는 그렇게 깊은 관계가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눈에 밟혔다.
뒤통수가 찌릿찌릿한 게 상당히 찝찝했다.
‘독안공이라도 펼쳐볼 걸 그랬나.’
너무 순식간에 로그아웃해 버려서 독안공을 사용해볼 새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찝찝함이 발목을 잡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아킬라이에 대해 좀 알아봐.”
“네? 굳이요?”
아킬라이야 헤라 왕국의 수호기사단장으로 이미 유명했기에 뭘 더 알아보라는 건지 조민이 되물었다.
“여기서가 아니라, 밖에서 말이야.”
시후는 자신의 직감을 절대 무시하지 않았다.
천마동에서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이 직감을 무시하지 않아서였다.
조민은 시후가 진지하게 말하자 무슨 연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자자~. 형님.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어서 들어가시죠~!”
마르스가 왕국 성 입구 앞에서 이러고 있으니 조바심에 시후의 등을 밀었다.
어차피 이제 움직이려 했으니 시후는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참에 ‘마르스 갱생시키기’를 해볼 생각이었다.
직-지직-지이익-
“어? 어어? 어어어?!”
마르스는 시후의 등을 미는 손에 점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처음에 살짝 미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사람 크기의 바위를 미는 정도의 힘을 들였다.
“혀, 형님?!”
“성 안까지 밀어라.”
“점점 무거워지는 건 제 착각인가요?!”
“시간이 늦어지면 더 무거워진다.”
시후는 정확히 1분마다 일정하게 무게를 늘렸다.
그저 본인의 몸을 무겁게 하는 일반적인 천근추와는 달랐다.
이렇게 미세한 내공 조절은 시후이기에 가능한 거였다.
그리고 당연하게 조민은 그 사실을 눈치챘다.
“오빠? 그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뭐를?”
“지금 펼치시는 천근추 말이에요.”
“천근추는 너도 할 줄 알잖아.”
“제가 묻는 게 그게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조민은 능글맞게 웃는 시후에 살짝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쉽게 가르쳐줄 생각이 없었다.
‘그동안 너무 넙죽넙죽 받아먹기만 했지?’
아기 새도 아니고.
그동안 조민에게 너무 쉽게 가르쳐준 것은 아닌가 싶었다.
조민이 들었으면 기겁을 했을 말이었지만 말이다.
시후는 자신을 기준으로 조민의 능력을 평가했다.
“이번에는 맨입으로는 안 된다.”
“헐! 누가 들으면 언제나 맨입으로 가르쳐준 줄 알겠어요?!”
“무슨 소리야? 나만 한 자선 사업가가 어디 있다고.”
“와….”
조민은 할 말을 잃었다.
지금까지 시후에게 받은 것들이 엄청난 것은 사실이었다.
최근에 받은 판관필 옥룡부터 희노애락환진을 펼칠 수 있을 정도의 진법에 관한 지식까지.
시후가 아니었다면 꿈도 못 꿔봤을 것들이었다.
하지만 시후는 그것들을 그냥 주지 않았다.
진법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줄 때는 오크 부족 퀘스트를 함께 했었고 중국에서 옥룡을 받았을 때는 염라대왕 앞에까지 다녀왔었다.
도대체 어느 부분이 자선 사업가의 마음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만큼 지금 시후가 보여준 것은 엄청난 거였고, 그의 반응으로 미루어보아 자신도 배울 수 있는 거였다.
“그럼 어떻게 하면 가르쳐 주실 건데요?”
“음…. 너 하는 거 봐서?”
“오빠!”
휙휙-
시후는 그만 됐다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고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놀리는 맛이 있어.’
가끔 조민을 놀릴 때면 이런 맛이 있어서 좋았다.
다른 이들 앞에서는 언제나 도도한 모습을 보이는 조민이었지만 자신 앞에서 보이는 저 모습이야말로 진짜 모습일 터였다.
한편 둘이 시시덕거리는 사이 가장 죽을 맛은 마르스였다.
밀고 있는 시후는 점점 무거워지지, 왕국 성으로 들어오니 자신을 알아보는 이들은 늘어나지.
거기에 그들은 대놓고 뒷담화를 시작했다.
“어머어머? 왕자님 아니셔?”
“맞네, 맞아. 어디 촌구석에서 서민 체험을 하신다고 들었는데.”
“그게 종살이셨나 봐?”
그러고는 입을 가리는 척 시후처럼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 그 가리고 있는 손을 확 꺾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마르스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여기서 망나니짓을 했다가는 시후를 미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말이다.
결국 마르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선을 다해 시후를 미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니 어느덧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헉, 헉헉! 혀, 형님!”
땀을 비 오듯 흘리는 마르스는 간절한 목소리로 시후를 찾았다.
이미 시후의 무게는 늘고 늘어 집 한 채 정도의 무게가 되었다.
덕분에 시후가 지나온 길에는 땅거죽이 죄다 뒤집혀 있었다.
“조금만 더 힘내라! 고지가 코앞이다!”
시후의 사전에 적당히는 없었다.
목표는 자신이 왕국 성에 처음 발을 디딘 그 장소였다.
그리고 그곳까지는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100보!”
“크헉! 커허억!”
마르는 이제 침까지 질질 흘리며 시후를 밀었다.
타란이 곁에 있다는 것도 잊었다.
지금 마르스의 머릿속에는 시후의 목소리만 들렸다.
결국, 마르스의 눈이 반쯤 뒤집혔을 때 드디어 목표한 장소에 도착했다.
“수고했다.”
“커허어억!”
시후가 천근추를 풀자 마르스는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오빠, 괜찮은 거 맞아요?”
조민이 슬쩍 다가와 물었다.
솔직히 지금 마르스의 목숨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어린아이가 과도라도 들고 와 찌른다면 픽 하고 죽을 목숨이었다.
“걱정 마, 쟤 챙겨줄 녀석들이 저기 오잖아.”
조민은 시후가 가리킨 곳을 봤다.
어떻게 알았는지 왕국 성에서 미친 듯이 뛰어나오는 무리가 보였다.
“왕자님!!”
가장 우렁차게 소리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안면이 있는 이였다.
지금 봐도 매부리코가 상당히 잘 어울리는 대머리 집정관 하인스였다.
하인스는 헤라 왕국 기사단을 대동하고 달려 나왔다.
“오, 그동안 운동 좀 했나 본데?”
시후의 말대로 일전에도 다부진 체격이었지만 지금은 더욱 우람한 체격이 된 하인스였다.
무엇보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전과는 달랐다.
자신을 평가하는 시후를 대충 흘겨본 하인스는 서둘러 마르스에게 달려갔다.
“무엇하냐! 어서 왕자님께 힐을 걸어드리지 않고!”
하인스의 지시에 기사단 뒤에 있던 사제가 마르스에게 힐을 걸어주었다.
덕분에 뒤집어 까져 있던 눈이 제자리를 찾으며 마르스는 숨을 고를 수 있었다.
하인스와 함께 달려온 기사단은 마르스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후에게 가장 경계심을 높여 가졌다.
하인스는 마르스가 힐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벌떡 일어났다.
“자네! 이게 무슨 짓인가?!”
하인스는 쿵쿵 걸어와 시후 앞에 섰다.
그때보다 커진 덩치 때문인지 시후 머리 위에서 콧김을 뿜어댔다.
“이분은 헤라 왕국의 왕자님이시네! 자네가 저렇게 대하실 분이 아니란 말일세!”
연신 뿜어대는 콧김에 시후의 앞머리까지 흔들릴 정도였다.
‘뭐지? 미친 건가?’
미치지 않고서야 하인스가 이러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일전에 연병장에서 그렇게 당해놓고 이러다니.
“또라인가?”
“뭐라?!”
“아, 미안. 속말이었는데 튀어나왔네.”
“이, 이이…!”
말은 미안하다지만 시후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하인스의 얼굴 근육이 미친 듯이 꿈틀댔다.
“내 오늘은!!”
점점 언성이 높아지는 하인스의 모습에 다들 큰 사달이 날 거라 생각했다.
하인스 역시 오늘은 참을 생각이 없었다.
거기에 오히려 자신감도 넘쳤다.
지금 하인스는 헤라 왕국의 국보 아이템을 두 가지나 착용하고 있었다.
본래는 일전에 일로 집정관 사무실에 보관 중이던 아이템이었다.
<불타는 갑옷>, <얼어붙는 부츠>.
둘 다 유니크 등급으로 이름에서 느껴지듯 화염 속성과 냉기 속성을 가진 아이템이었다.
불타는 갑옷은 공격과 방어를 할 때 폭발을 일으켜 상대방에게 공격하는 갑옷이었다.
얼어붙는 부츠는 부츠가 닿는 면을 얼리는 효과가 있었다.
그것으로 때로는 냉기 공격을 하거나 지표면을 얼려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 가지 아이템은 세트 아이템으로, 같이 착용했을 때 사용자의 능력치를 30%나 올려줬다.
하인스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그때 연병장에서 시후와 아킬라이의 싸움을 그렸다.
자기 역시 아킬라이와 겨룬다면 절대 패는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 아킬라이를 무릎 꿇린 시후의 모습을 그리던 하인스는 씨익 웃었다.
그동안 꾸준히 사냥해 올린 스텟과 세트 아이템으로 얻은 30%의 능력치.
자신이 질 이유는 전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오늘 헤라 여왕님을 대신해 너를 단죄하리라!”
쿠웅-
하인스는 땅을 박차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러고는 플라이 마법을 펼쳐 허공에 우뚝 섰다.
“파이어 스피어, 아이스 스피어.”
두 가지 마법 영창을 동시에 해내는 하인스.
두 가지 속성의 마법을 동시에 영창한다는 것은 대마도사의 가장 기초적인 조건이었다.
그랬다.
일전에 블칸 영주가 알고 있는 대륙의 대마도사는 바로 하인스였다.
오른손에는 무엇이든 태워버릴 듯 활활 타오르는 파이어 스피어를.
왼손에서는 공기 중의 수분을 얼려 눈으로 내리게 할 정도의 냉기를 가진 아이스 스피어를 움켜쥔 하인스.
“천벌이라 생각해라!”
복수심에 불타는 눈으로 하인스는 두 개의 스피어를 교차시켜 던졌다.
쿠아앙-
두 개의 스피어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시후를 향해 쏘아져 갔다.
화염과 냉기가 서로 뒤엉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져 내리는 듯한 모습에 경비병들은 마르스를 둘러업고 성안으로 내달렸다.
반면 조민과 타란은 태연한 모습으로 시후의 곁을 지켰다.
만약 처음 헤라 왕국을 찾았을 때 집정관이 이런 모습을 보였다면 기겁을 하였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둘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 정도의 공격쯤이야, 라며 말이다.
한편 시후는 하인스의 공격을 유심히 지켜봤다.
“국보를 사용하면 저만한 위력을 낼 수 있단 말이지?”
하인스가 국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음과 양의 기운.
자신 앞에서 전혀 주눅이 들지 않는 모습을 봤을 때 이미 독안공을 펼쳐 하인스의 상태를 봤었다.
‘국보를 착용하고 있어 자신감이 하늘을 찌른다라.’
그런 것치고는 생각보다 기술의 위력이 약해 보였다.
“고작. 이런 거로. 한 방에 죽겠어?”
쿵-
시후는 한 발을 들어 땅에 찍었다.
그러고는 쏘아져 내려오는 화염 덩어리에 한 손을 뻗어 시계 방향으로 돌렸다.
“그, 그건?!”
하인스는 시후의 그 동작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헤라 왕국의 수호기사단장 아킬라이가 왕국 성 입구를 지킬 때 보였던 스킬이었다.
아킬라이는 이화접목의 묘리를 담은 이 스킬로 상대의 공격을 무효화시켰다.
하지만 시후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받은 만큼 돌려줘야지?”
쿠웅-
다시 한번 발을 구르자 시후가 돌리는 손에서 기파가 뿜어져 나갔다.
하인스가 쏘아낸 화염 덩어리를 단숨에 집어삼킨 기파는 그물처럼 늘어졌다.
마치 물풍선에 물을 집어넣는 것처럼 점점 부풀어 오르던 기파는 잡아두고 있던 화염 덩어리를 단숨에 토해냈다.
그러자 하인스가 쏘아냈을 때보다 배는 커진 화염 덩어리가 하인스에게도 쏘아져 갔다.
그것도 시후에게 쏘아져 내려오던 속도보다 배는 빠르게 말이다.
“어? 어어?!!”
하인스는 감히 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마치 태양이 쏘아져 올라오는 듯한 압박감에 몸이 굳어버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다.
저것에 닿는 순간 자신은 한 줌의 재로 화해버릴 것임을 말이다.
그제야 주마등처럼 자신이 시후에게 저지른 만행을 떠올렸다.
자신이 죽고 부활할 집정관 NPC는 부디 시후에게 개기지 말기를 바라며 두 눈을 감고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때였다.
“그레이트 쉴드!”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집정관을 둘러싼 쉴드가 만들어졌다.
퍼엉-
그레이트 쉴드에 화염 덩어리가 닿자 엄청난 굉음과 함께 후폭풍이 몰아쳤다.
그 안에서는 그 누구도 살아 있지 못할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시후는 보았다.
마치 헤라 여왕이 펼친 헤라의 가호와 같은 위력의 그레이트 쉴드 덕분에 그 폭발 속에서 집정관은 아주 멀쩡했다.
그리고 시후는 그 그레이트 쉴드를 누가 펼쳤는지 알았다.
현실에서나 게임 속에서나 일단 만나기만 하면 자신의 속을 긁고 시작하는 인물.
“돌팔이. 이게 무슨 짓이지?”
진지춘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