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소악사(小樂士) 계이진(計耳眞).
혼마심음공(魂魔心音功)을 만든 녀석이었다.
천마 시절 마음이 울적할 때나 들뜰 때면 귀신같이 나타나 적절한 음률을 흘리던 녀석이었다.
본래 녀석은 이름이 없었다.
녀석과는 저잣거리 다리 밑에서 개방 거지들과 고기를 뜯고 있을 때 처음 만났었다.
며칠을 굶었는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삐쩍 말라 있던 녀석은 고기 냄새를 맡고 침을 질질 흘리며 다가왔었다.
녀석의 뱃속은 어서 밥을 넣어달라며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녀석은 절대 구걸을 하지 않았다.
‘자기 음악을 들어주고 마음에 들면 고기 한 점을 달라고 했었지.’
어린 녀석이 당돌하다고 생각했지만, 소악사는 자기의 능력을 잘 알았던 거였다.
그렇게 말한 녀석은 휘파람이라도 불려는지 입술을 오므렸다.
하지만 한 줌의 기력도 없는 녀석의 몸은 음을 내지 못했다.
개방 거지는 불쌍하다며 고기 한 점을 던져 주었지만, 녀석은 이를 악물며 그것을 뒤로하고 떠났다.
그 모습에 시후는 녀석을 거두었다.
그대로 보냈다면 분명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아사했을 터였다.
그 보답이었을까.
녀석은 천마신교로 들어와 자기 능력을 마음껏 펼쳤다.
흉작에 마음이 심란한 신도들의 마음을 음악으로 위로해줬고 뜨거운 열기에 힘겨워하는 대장장이들이 신명 나게 망치질을 할 수 있게 했다.
셈에 능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녀석에게 천마는 ‘소악사 계이진’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문제는 녀석이 만든 그 음공(音功)이 다른 이에게 전수하기 상당히 까다롭다는 거였다.
음악에 살고 음악에 죽으리라 떠들고 다니던 녀석은 자신의 영혼을 음공에 넣었다.
‘그래서 녀석이 만든 음공 이름에 혼(魂) 자가 들어가는 것이지.’
그랬다.
소악사 계이진의 혼마심음공은 무공이 주인을 택했다.
시후야 계이진이 그토록 따르던 사람이었으니 펼치는 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이에게 전수할 수 있을지.
적어도 계이진이 음악을 사랑했듯이 혼마심음공을 배우려는 사람 역시 음악을 사랑해야 했다.
‘좋아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재능의 발판이니.’
좋아하는 마음이 재능을 만들고, 그것에 노력을 더하면 천재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이 꽃을 피우는 거라 생각했다.
과연 당소영이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혼마심음공을 배울 수 없을 거라는 게 시후의 생각이었다.
계이진은 어째서인지 진소령을 싫어했으니 말이다.
진소령의 환생이라고 생각될 만큼 닮은 당소영이기에 추측이었다.
‘시간 나면 테스트나 한번 해보지 뭐.’
이 문제는 후에 해결하기로 하고, 시후는 눈앞의 일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그럼, 헤라 왕국으로 출발해볼까?”
“네!”
다들 활기차게 대답했다.
프랑시스는 시계탑의 운영을 해야 하기에 함께 하지 못함을 아쉬워했지만, 침울해하지는 않았다.
시후에게 있어 한스텔 마을의 시계탑은 언제나 돌아올 보금자리이니 말이다.
그렇게 시후와 조민, 타란, 마르스는 헤라 왕국으로 넘어가기 위해 루프로 향했다.
* * *
“소교주님, 분명 그자일 것입니다.”
“…….”
진류강은 린이 건네준 태블릿을 봤다.
-말 한 마디에 힘을 싣는 이를 말한다. 그게 바로 무림인. 내가 바로 천마다.
공기를 찢는 사자후에 주변인들 모두가 귀를 틀어막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자신을 천마라고 말한 그의 얼굴은 S.W SOFT에 의해 모자이크 처리가 되었다.
개인의 신상정보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며 즉시 차단한 거였다.
그리고 영상은 ‘무림인’에 대한 정보를 보여주는 화면으로 바뀌었다.
Safety World 커뮤니티에 누군가가 ‘천마’에 대한 부분을 편집하여 올린 영상이었다.
“정녕 이자가 너와 겨룬 그자란 말이지?”
“네. 확실합니다.”
빠득-
린은 아미산에서의 일을 되새기며 이를 악물었다.
그날 자신은 사지가 잘려 자기 주인인 진류강 앞에 던져졌었다.
혈영수와 혈천마라강시 특유의 재생 능력으로 지금은 멀쩡했지만, 그날의 치욕은 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복수심에 이리 열을 올리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 그는 ‘천마’의 이름을 거론하며 무공을 펼쳤다.
그리고 순식간에 얼굴과 모습을 바꾸는 그에게서 남궁정도의 흔적을 찾았다.
그렇다고 그가 남궁정도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남궁세가, 화산, 천마의 무공까지 펼치는 그가 원한다면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게 린의 결론이었다.
진류강은 시시각각 표정이 변화하는 린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혈교가 원하는 혈천마라강시는 실패였다.
그렇다고 린이 혈천마라강시의 능력을 잃은 것도 아니었다.
아니. 어찌 보면 역대 혈천마라강시 중에 가장 강했다.
감정을 가진 혈천마라강시.
그것이 과연 득이 될지 실이 될지.
혈교 소교주로서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아니. 망설인다고 해야 할까.
그 망설임을 없애기 위해 저 영상에 나오는 인물이 필요했다.
“우선, 인사부터 해야겠지?”
진류강은 고개를 돌렸다.
“준비되었습니다.”
허리가 굽은 꼽추 노인 마뇌불이 준비를 마쳤다며 진류강을 불렀다.
그의 옆에는 Safety World에 접속할 수 있는 최신형 캡슐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이와 같은 캡슐 30개와 붉은색 장포를 입은 혈교인 30명이 대기했다.
진류강은 마뇌불이 준비한 캡슐로 걸어갔다.
“우린. 다시 한국으로 갈 것이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내공을 담은 진류강의 목소리는 혈교인들의 귀를 울렸다.
그들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났다.
이들 역시 린과 마찬가지로 그날의 치욕을 잊지 않은 거였다.
“그전에 우리가 찾는 그 사람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Safety World에 접속한다.”
한 사람을 찾기 위해 가상현실 게임에 접속한다니.
누군가가 들었다면 허황한 말이라며 비웃었겠지만 이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날 멸마절지검으로 혈천마라강시를 베고 하늘을 가르는 무위를 보여준 그.
린은 그가 ‘천마’라는 이름을 이었다고 말했다.
“천년 대업을 드디어 우리가 이룰 수 있게 되었다.”
후우-
천년 대업이라는 말에 투지만 일으키던 혈교인들이 처음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극한의 인내심으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있는 거였다.
진류강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 더욱 힘주어 말했다.
“찾아라. 그리고 현실에서의 접점을 찾아라. 그것을 위해 너희들의 생명을 바쳐라.”
“네!”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한 30명의 혈교인들이 일제히 캡슐로 들어갔다.
이들은 진류강이 직접 뽑은 이들로, 그를 찾기 위해 앞으로 잠도 자지 않고 Safety World에 접속할 터였다.
식음을 전폐하고 대소변까지 캡슐에서 해결할 수 있게 마뇌불이 캡슐들을 개조했다.
모두가 Safety World에 접속한 것을 확인한 진류강 역시 캡슐로 들어갔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린과 마뇌불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진류강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Safety World에 접속했다.
‘천마’라는 이름으로 무림인의 직업을 공표한 그를 찾기 위해.
그 천마가 현실에서 만났던 ‘그’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결의를 다지며 로그인했다.
눈부심이 사그라지고 마지막 접속 장소였던 헤라 왕궁이 보이자 진류강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당신을 꼭 찾겠어.”
진류강은 한시라도 빨리 그를 찾을 생각이었다.
목숨을 바치라 하였지만 30인의 목숨을 진짜로 헛되이 잃게 할 생각은 없었다.
진류강은 Safety World의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주변을 느꼈다.
언제나 상큼한 바람이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을 간지럽혔다.
기분 좋게 내리쬐는 햇빛은 몸에 두르고 있는 은빛 갑옷을 반짝반짝 빛나게 했다.
소교주의 위치와 책임으로부터 잠시나마 해방되기 위해 시작했던 Safety World.
진류강은 헤라 왕국의 수호기사단장이라는 직위로 찬란하게 빛나는 존재였다.
Safety World에 접속하면 언제나 주변의 이목을 끌었고 다들 자신의 이름을 외쳤다.
“여~ 아킬라이.”
오랜만에 듣는 저 목소리처럼 말이다.
“응?”
귀에 상당히 익은 목소리에 진류강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오랜만에 만난 친우를 부르듯 쌍수를 들어 흔드는 시후를 발견했다.
“See 후 님?”
“오랜만이야.”
시후가 일행들과 함께 헤라 왕국 성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접속하자마자 아는 이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해 반응이 늦었다.
어느새 다가온 시후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손을 마주 잡은 진류강은 순간 흠칫했다.
“See 후 님, 닉네임이….”
“아, 얼마 전에 바꿨어.”
진류강은 시후 머리 위에 있는 닉네임 ‘천마’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캡슐을 개조하고 30인의 생명을 담보로 해서까지 찾으려고 결심했던 당사자를 너무나도 허무하게 찾아버린 거였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얼굴색이 말이 아닌데?”
시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진류강의 표정에 물었다.
그 말에 진류강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닙니다. 하도 오랜만에 접속한 거라 잠시 적응을 못 했나 봅니다.”
일단은 대충 얼버무렸다.
그가 정말로 ‘천마’인지 확인도 하지 않은 상황에 대뜸 물어볼 수는 없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천마’의 이름을 따라 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럼, 앞으로는 천마 님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뭐, 그렇지?”
“하, 하하. 얼마 전에 무림인 직업을 만든 천마가….”
“오, 그 일을 알고 있었어? 맞아. 그거 나야.”
딸꾹-
진류강은 단번에 정체를 밝히는 시후에 너무 놀라 딸꾹질까지 했다.
“뭐야, 너 정말 오늘 왜 그래? 유라야, 네가 좀 봐줘 봐.”
“괜찮으세요?”
“아, 네. 괜찮…!”
진류강은 냉혈미녀 유라를 보는 순간 눈을 번뜩였다.
시후가 정말 자신들이 찾는 ‘천마’가 맞는다면.
지금까지 시후의 옆에 찰싹 붙어 있던 냉혈미녀 유라는 결코 그와 생면부지가 아닐 터였다.
아니. 오히려 가장 측근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아미산 아래에서 자신들과 싸운 이들 중 한 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제가 잠시 볼일이 있어서, 그럼, 다시 접속하는 날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진류강은 로그아웃을 했다.
푸슝-
“마뇌불!”
캡슐을 거칠게 열고 나온 진류강은 거칠게 마뇌불을 불렀다.
진류강이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왔기에 마뇌불은 근처에 있었다.
“소교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너튜브 개인 방송 BJ 좀 찾아봐.”
“네? 누구를요?”
“냉혈미녀 유라.”
느닷없이 BJ를 찾으라는 진류강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보이는 격양된 모습에 마뇌불은 일단은 그의 지시를 따랐다.
노트북을 가져와 너튜브에 접속한 마뇌불은 진류강에게 화면을 보여줬다.
“이자가 냉혈미녀 유라입니다.”
‘냉혈미녀 유라’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조민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시후와 만난 이후로는 개인 방송을 하지 않은 조민이었지만 계정을 정지시키지 않았기에 일전에 업로드했던 영상이 남겨져 있었다.
중국에서 본 이들 중에 있었던 여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진류강은 확신했다.
조민이 분명 그들과 관련이 있음을 말이다.
“마뇌불. 이 여자 찾아.”
그렇게 조민은 혈교의 추적 대상이 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