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시후는 지금의 판을 깔기 위해 어머니와 아버지께 손을 뻗었다.
다른 이의 손을 빌려도 되었지만, 어차피 프로게이머에 관해 알려야 했기에 두 분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프로게이머 계약을 하기 위해 딱히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시후는 부모님께 진지하게 설명했다.
처음 시후의 말을 들은 두 분은 잠시 놀라는 것 같았지만 그동안 시후가 Safety World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알기에 당연한 결과라며 수긍했다.
그리고 시후가 내민 계약서의 내용을 검토한 어머니는 이만큼 파격적인 계약서는 처음 본다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시후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그 계약금으로 주식을 사고 싶다고 말했다.
프로게이머 계약과는 다르게 주식계좌 개설은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했다.
계약금을 허투루 쓰지 않고 그것도 S.W SOFT의 주식을 산다는 시후의 말에 두 분은 흔쾌히 동의서에 사인해 주었다.
하지만 시후가 사용한 돈은 계약금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전에 중국에서 벌어들인 돈 일부를 더하여 S.W SOFT의 주식을 사들였다.
그것도 박진수 이사가 놀랄 만큼의 수량을 말이다.
덕분에 박진수 이사는 상당히 난처한 상황에 부닥쳤다.
박철파가 가진 주식과 박진수 이사 파가 가진 주식의 수는 비슷했다.
그런데 이번에 시후가 사들인 S.W SOFT 주식은 자그마치 5%에 달했다.
어느 쪽에 힘을 실어주기에는 충분한 숫자였다.
시후는 이 사실을 박진수에게 바로 전달했다.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가 알고 있어야 비로소 이런 귀찮은 짓을 벌인 효과가 있으니 말이다.
예상대로 박진수의 반응은 바로 나왔다.
시후와 박철을 연관 지은 박진수는 얼마 후에 있을 주주총회를 걱정했다.
만약 시후가 박철파에게 힘을 실어준다면?
그것으로 시작한 걱정은 끝이 없었다.
그런 걱정에 머리를 쥐어뜯고 있던 와중에 집에서 연락이 왔다.
경호원이 누군가와 다툰다는 거였다.
신경질적으로 CCTV를 확인하는데 시후의 모습이 보이자 박진수는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박혜령에게 빠르게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더는 시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한발 물러나야 할 때다.
“…알겠어요.”
박혜령은 아버지의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
지금 당장 아버지의 힘으로도 주식에 관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박혜령은 스마트폰을 경호원에게 돌려주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다들 그녀의 그런 모습에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그, 우리는 그저 혜령이가 시키는 대로 한 거야.”
“맞아요. 혜령이가 모이라고 해서 모인 거예요.”
다들 박혜령이 시킨 일이라며 자기 잘못은 없다며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곁에 있던 경호원들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되레 시후는 덤덤했다.
‘저런 녀석들은 저렇게 살아가는 법이니까.’
저런 간신배 같은 녀석들을 수도 없이 봐왔었다.
천마 시절, 자기의 안위를 위해 다른 이를 파는 녀석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런 녀석들이 눈에 띌 때마다 목을 쳐냈다면 천마는 희대의 살인마로 기록되었을 거였다.
그래서 기준점을 정해놨었다.
“일선념자(一善念者) 역득선과보(亦得善果報), 일악념자(一惡念者) 역득선과보(亦得惡果報)라 했다.”
“뭐?”
느닷없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한자를 읊는 시후의 모습에 다들 어안이 벙벙했다.
이곳에서 시후가 내뱉은 말을 이해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시후는 말 대신에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자 언제 들어왔는지 사람들이 계단으로 올라왔다.
경호원들은 기척도 없이 들어오는 사람들에 놀라면서도 경호원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박혜령의 앞을 막아섰다.
그사이 시후 곁으로 다가온 이들 중 무테안경을 쓴 남자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시후는 한번 스윽 읽고는 박혜령에게 휙 던졌다.
“사람이란 자고로 자기가 한 일에는 자기가 책임을 져야지.”
기를 살짝 흘려 넣었기에 서류가 박혜령을 향해 펄럭펄럭 날아갔다.
종이가 살아 있는 나비처럼 날아가는 신기한 장면이었지만 다들 그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들은 내 법무팀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선택하길 바란다.”
어느새 J.K 제약회사 법무팀이 빠르게 움직여 그들에게 서류를 나누어 주었다.
얼굴 흉터남은 펄럭펄럭 날아오는 서류를 낚아채고는 박혜령에게 건네어 주었다.
그렇게 다들 시후가 준비해온 서류를 받아 읽었다.
“뭐야! 진짜 우리를 노예처럼 다룰 생각인 거야?!”
서류의 내용은 간단했다.
[상기 본인은 월드 오브 리그전이 끝나기 전까지 강시후의 명령에 절대복종한다.]
[이를 거부할 시 즉각 S.W SOFT와 체결한 프로게이머 계약을 해지하며 그에 따른 부득이한 모든 결과를 받아들인다.]
[위의 사항을 거부할 시 현재 즉각 S.W SOFT와 체결한 프로게이머 계약을 해지한다.]
또다시 거론된 계약 해지.
어제의 악몽이 떠오르는 것에 다들 치를 떨면서도 ‘명령에 복종’이라는 문장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거 S.W SOFT의 직인까지 찍혀 있어.”
이미 S.W SOFT와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는 듯이 박철 사장의 직인이 떡하니 찍혀 있었다.
다들 원망 가득한 시선으로 박혜령을 쏘아봤다.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었고, 여기까지 내몰린 이유가 박혜령의 말을 들어서라고 생각하는 거였다.
박혜령 역시 들고 있는 서류를 당장이라도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하며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런 게 용납이 된다고 생각해?!”
박혜령은 말도 안 된다며 시후에게 고함을 쳤다.
시후는 대답 대신에 무테안경남에게 턱을 까딱였다.
“법적인 절차는 모두 마친 상태이고, S.W SOFT 사장 역시 동의했습니다. 뭐, 여러분들께서 법적인 싸움을 원하신다면 고소를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에 따른 결과는 본인이 책임지셔야 하는 것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무테안경남이 안경을 쓸어 올리며 눈을 번뜩였다.
그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S.W SOFT와 개인이 법정에서 싸움을 한다?
절대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싸움은 결코 짧지 않을 터였다.
거기에 S.W SOFT와 계약을 한 시점에서 다른 게임 회사와 계약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S.W SOFT가 제시한 그 많은 혜택을 뿌리치고 나가자니 아쉬움이 컸다.
또다시 다른 프로게미어들의 시선이 박혜령에게 날아들었다.
어떻게 좀 해보라는 눈빛들이었다.
하지만 박혜령 역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단 하나뿐이었다.
“따를게요.”
슥슥-
박혜령은 제일 먼저 노예 계약서에 사인했다.
“야! 박혜령!”
“미친 거 아니야? 거기에 그냥 사인해?!”
그 모습에 다들 한 소리씩 내뱉었다.
사인을 마친 박혜령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쩌게?”
“뭐?”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라는 걸 좀 해. 그건 폼으로 달고 다니는 게 아니야.”
“너 말이 심하잖아!”
“심한 건 너희들이지. 프로게이머씩이나 되면서 제 앞가림 하나 못 해?”
지금 박혜령의 모습은 누가 봐도 저들과 손절하는 모습이었다.
시후조차 그런 박혜령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박쥐 같지만 그래도 자기 주관대로 결정을 내릴 배포 정도는 있군.’
그나마 주위에 휘둘리지 않고 상황 파악을 하며 스스로 노예 계약서에 사인한 것은 칭찬할 만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옆에 둘 정도는 아니었다.
저런 부류의 인간은 언젠가는 뒤통수를 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덕분인지 박혜령이 사인을 하자 다른 이들도 사인했다.
무테안경남이 서류를 확인하고는 시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앞으로 리그전이 끝날 때까지 내 말은 절대적이다.”
“…….”
“대답은 바로 한다.”
“…네.”
마지못해 하는 대답이었다.
그 반응에 시후는 마음을 먹었다.
“본래 회사에 도착해서 하려 했는데 그냥 지금부터 하기로 하지.”
“뭘….”
“S.W SOFT까지 뛰어.”
“…에?!”
“참고로 선착순이다.”
선착순이 뭐고 회사까지 뛰라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짓을 왜 해야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표정들이었다.
“가장 늦는 놈은… 알지?”
그 말을 끝으로 시후는 등을 돌려 저택을 나가버렸다.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때.
“야, 박혜령, 너 뭐 해?”
“보면 모르냐? 신발 끈 묶잖아.”
어느새 박혜령은 러닝화로 갈아신고 나왔다.
박혜령은 가볍게 발목을 풀더니 주변을 쓱 훑었다.
“노예 계약서에 사인까지 해놓고 그러고 있을 거야? 뭐, 그러든지.”
그 말을 끝으로 박혜령은 뒤도 안 돌아보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평소 운동을 꾸준히 한 덕분인지 박혜령은 순식간에 저택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다른 이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다투어 집으로 들어가 개인 소지품을 챙기더니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때아닌 도심 한복판에서의 달리기 경주가 시작되었다.
특히, 박혜령은 살면서 지금까지 이렇게 최선을 다해 달린 적이 없을 정도로 내달렸다.
아무리 아버지의 명령이고 시후가 단단히 준비한 노예 계약이었지만 자존심만큼은 챙기고 싶었다.
가장 먼저 저택을 뛰쳐나간 이유도 그거였다.
“내가 너보다 먼저 도착해 주겠어!”
박혜령은 시후가 집을 나선 후 S.W SOFT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봤다.
선착순이라고 했으니 단숨에 제쳐준 후 여유 있는 모습으로 본사에서 시후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헉, 헉헉! 쟤 뭐야?!”
어찌 된 일인지 눈앞의 시후를 제칠 수가 없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사력을 다해 달리고 있지만, 50m 정도 앞에 있는 시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시후는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로 걷고 있는데 말이다.
거기에 더 열받는 것은.
“저, 저저! 그거 하지 마! 재수 없어!”
가끔 뒤를 힐끗거리며 박혜령을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마치 ‘아직도 따라오네’라는 눈빛으로 말이다.
그 눈빛을 볼 때마다 박혜령은 심장이 터지도록 내달렸다.
그 결과 평소 차로 이동해도 10분은 걸릴 거리를 오직 두 발로 달려서 20분 만에 도착해 버렸다.
“커헉! 헉, 헉헉!”
박혜령은 S.W SOFT 1층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널브러졌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얼굴색이 시퍼렇게 변하는 것을 보니 호흡 곤란까지 겪는 것 같았다.
“챙겨.”
시후의 한마디에 로비에 기다리고 있던 의료진이 박혜령에게 달려갔다.
시후는 이미 이런 상황을 예견했었다.
‘그 첫 타자가 여성일 줄 몰랐지만.’
남녀의 신체 조건으로 보건대 보통의 오래달리기는 남자가 유리했다.
그리고 저택에 있던 남녀의 성비는 남자 5명에 여자 2명.
그런데 1등으로 들어온 녀석이 박혜령일 줄이야.
생긴 것은 곱게 자란 티가 팍팍 나는데 근성까지 있어 보였다.
“마음에 드네.”
시후는 버리려던 패를 다시 줍는 느낌이었다.
그사이 다른 프로게이머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박혜령의 내달리기 덕분인지 다들 상태는 비슷했다.
시후는 로비에 쓰러지는 녀석들에게 의료진을 착착 붙였다.
의료진은 그들에게 산소 호흡기를 달아주며 구급용 들것에 실어 안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들이 옮겨진 장소는 당연하게도 3층 캡슐방이었다.
시후는 모두가 옮겨질 때까지 그곳에서 기다렸다.
일단은 정신을 차려야 앞으로 행해질 일들을 감당할 테니 말이다.
드디어 하나둘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후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아침, 점심, 저녁. 세 번에 이어 이와 같은 강도의 체력 훈련을 진행한다.”
그 말에 다들 넋을 잃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입도 뻥끗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박혜령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운동이라는 것을 언제 마지막으로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인상을 구기거나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좀 더 설명을 요구하는 그들의 눈빛에 시후가 자신을 가리켰다.
“나를 봐. 여기서 나보다 강한 녀석이 있어? 현실에서나 게임 속에서나.”
그 말에 다들 박혜령 저택에서 경호원과 싸운 장면을 떠올렸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시후는 너무나도 멀쩡했다.
거기에 이곳까지 달려오는 내내 선두를 유지하면서도 호흡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게임 속.
닭 볏과 숯검댕이 눈썹과의 대결에서 혀를 내두를 정도의 실력을 보여줬다.
“고로, 현실에서의 신체적인 조건이 게임 속 플레이에도 영향을 끼친다 이 말이다.”
시후는 태산과 인호와 평치혁을 가리켰다.
“너희는 세 무리로 나뉘어 저들의 훈련을 받는다.”
프로게이머들은 셋을 봤다.
오랜만에 보는 평치혁은 그렇다고 쳐도 태산과 인호는 어제도 봤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그들의 몸이 상상 이상이었다.
어제는 헐렁한 옷을 입고 있어서 몰랐는데 지금은 몸에 착 붙는 트레이닝복을 입어서인지 탄탄한 근육이 도드라져 보였다.
“너희들 쟤네 잘 가르쳐. 만약 하루하루 달라지는 맛이 없으면. 나와 개인 훈련할 각오 하고.”
“왜, 왜?!”
“그게 왜 그리로 튀는 건데?!”
태산과 인호는 시후의 말에 발끈하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만큼 개인 훈련을 반대하는 거였다.
반면 개인 훈련이 무엇인지 모르는 평치혁은 이들이 왜 이럴까 싶은 표정을 지었다.
시후는 그런 그들에게 설명 대신 손을 휘휘 젓고는 다시 프로게이머들에게 신경을 돌렸다.
그 후 시후는 프로게이머들에게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했다.
현실에서의 체력 훈련과 게임 속에서의 대련을 통한 실전 합숙이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사이 궁금증을 참지 못한 평치혁이 태산과 인호에게 속삭였다.
“개인 훈련이 뭔데 그래?”
“하아…. 시후랑 일대일로 대련하는 건데요, 으으으!! 너무 싫다!”
대답하던 태산과 인호는 치를 떨었다.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악몽을 떠올린 듯 거세게 머리를 젓기까지 했다.
이쯤 되자 평치혁은 쓸데없는 호기심이 일어났다.
그리고 다음 날, 평치혁은 자기 인생 25년에 호기심이라는 세 글자를 지워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