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김희준과 김태영은 이번에 S.W SOFT와 계약하면서 같이 살기로 했다.
평소 안면이 있던 둘은 프로게이머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회사 근처 오피스텔을 계약했다.
그리고 지금 둘은 외출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희준은 드라이기로 한껏 끌어올린 닭 볏을 쓸어 넘기며 태영을 봤다.
달달달-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소파에 앉은 태영은 다리를 떨고 있었다.
“정신 사납다. 그만 좀 떨어.”
“어? 어.”
희준의 지적에 태영이 무릎을 누르며 떠는 다리를 멈췄다.
하지만 긴장감을 떨쳐내지 못하는지 자기의 트레이드 마크인 숮검댕이 눈썹을 연신 만져댔다.
그 모습에 희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긴장하기는 희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도 지금처럼 닭 볏을 매만지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 식은땀이라도 흘릴 것만 같았다.
“우리… 정말 이렇게 해도 괜찮은 걸까?”
“뭐가?”
“합숙 말이야.”
“덩치에 안 맞게 걱정은. 박혜령이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혜령이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 그런데.”
그런데 이 찝찝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계약 해지서와 시후가 계속 떠올랐다.
박초연 이사를 부하처럼 부리고 Safety World 플레이 또한 어마무시했다.
솔직히 그에게 플레이를 배운다면 득이 되면 득이었지 실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박혜령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야, 제 아빠가 S.W SOFT 박진수 이사라서 무슨 수가 있으니 우리보고 합숙에 가지 말라고 했겠지.”
“그치? 걔도 무슨 생각이 있어서 이만한 일을 벌이는 걸 거야?!”
둘은 찝찝했지만, 박진수 이사의 딸인 박혜령을 믿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벌였던 일들은 자신들의 상식 범위 밖이었으니 말이다.
둘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박혜령에게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박혜령이란 말이지?”
“으악!!”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둘은 화들짝 놀라며 앞으로 튕겨 나갔다.
둘만 있는 집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고개를 홱 돌렸지만,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둘은 어찌 된 영문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봤다.
“나, 나만 들은 거야?”
“부, 분명 들었는데?”
“분명… 그놈 목소리였는데?”
둘은 동시에 시후를 떠올렸다.
하지만 여기는 집주인의 지문을 인식하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는 최신식 오피스텔이었다.
그리고 둘은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도 밖을 나가지 않았다.
이런 곳에 누군가가 몰래 들어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에 둘은 서로 환청을 들었나 싶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가 너무 걱정이 많아서… 으흠.”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갑자기 밀려오는 졸음에 픽 쓰러졌다.
그런 둘의 곁에 그림자가 쑤욱 하고 일어섰다.
시후였다.
시후는 수혈이 짚여 잠든 둘을 한 차례 훑고는 귀에 손을 가져갔다.
“박혜령 어디 있냐?”
그리고 잠시 후 들려오는 대답에 시후는 다시 땅속으로 훅 꺼졌다.
* * *
박혜령의 집은 S.W SOFT 본사에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아버지인 박진수가 언제든 회사에 빠르게 출근할 수 있도록 이리 한 거였다.
300평에 달하는 대형 저택인 그녀의 집은 평소보다 많은 이들이 거실에 자리했다.
“혜령아, 이거 마셔도 되는 거냐?”
“어, 마음껏 마셔.”
“혜령아, 이거 입어봐도 돼?”
“당연하지. 마음에 들면 몇 개 가져가든지.”
“혜령아.”
“혜령아?”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이번에 S.W SOFT와 계약한 프로게이머들이었다.
혜령은 오늘 아침 이들에게 모두 연락을 돌렸다.
합숙 따위에 갈 거냐며. 어디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녀석의 말에 고분고분 따를 것이냐며 그들을 꾀었다.
웬 이상한 NPC에게 테스트라며 뻘짓을 시켜 놓은 그 녀석 말을 들을 거냐고.
자신이 책임질 테니 모두 자기 집으로 모이라고 했다.
이번에 가입한 녀석은 이미 박철 쪽 사람이었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개망나니와 소심한 성격의 둘을 뺀 나머지 모두가 이곳에 모였다.
혜령은 그것만으로도 되었다 싶었다.
여기서 이 멍청한 녀석들의 비위 좀 맞춰주며 잡고 있으면 합숙이라는 헛소리를 하는 녀석의 계획에 차질을 줄 수 있었다.
이 뒤는 아버지가 알아서 처리할 터였다.
아마도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며 박철 쪽을 압박하지 않을까.
그러니 자신은 여기서 저 멍청이들이나 챙기면 되었다.
“혜령아, 우리 배고픈데, 먹을 거 없어?”
“그러잖아도 피자 시켰어.”
“우와! 역시 박혜령~”
이렇게 배만 채워주면 좋아하는 돼지 같은 녀석들에게 혜령은 최대한 인자한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에 달했다.
몇 시간째 웃고 있으니 얼굴에 경련이 일 것만 같았다.
잠시 피로해진 얼굴 근육을 풀어줄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때마침 기회가 왔다.
띠리링-띠리링-
“어?! 왔나 보다!”
주문한 피자가 생각보다 빨리 왔는지 인터폰이 울렸다.
혜령은 후다닥 달려가 인터폰의 마이크 버튼을 눌렀다.
“빨리 오셨네요?”
-좀 서두르기는 했지.
“감사해요!”
-감사? 글쎄….
“열어 드릴게요.”
배달부의 얼굴이 화면에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 정확히 인식은 불가능했지만 중요치 않았다.
지금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는 핑계가 생겼으니 말이다.
박혜령은 현관문의 열림 버튼을 누르고는 버선발로 뛰쳐나갔다.
그런데 잔디밭을 지나 돌계단을 내려가려던 박혜령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너, 너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어 올라오는 그는 피자 배달부가 아니었다.
어제 회사에서 본 몸매 좋은 미친놈이었다.
“조금 전 반기는 목소리로는 한걸음에 달려와 안기기라도 할 줄 알았더니. 왜 그러고 있지?”
시후는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터덜터덜 걸어 올라갔다.
그 걸음걸이만큼 박혜령은 뒷걸음질을 쳤다.
본능적으로 그와 가까워져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아, 아저씨들!!”
박혜령은 고함에 검은 정장을 입은 남성들이 걸어 나왔다.
평소 집을 지켜주는 경호팀이었다.
박혜령은 그들의 실력을 믿었다.
S.W SOFT 이사인 아버지를 노리는 인물들이 많았기에 고르고 골라 뽑은 인재들이었다.
5명뿐이었지만 그들은 어디 전쟁에도 참전했었다고도 했었다.
박혜령은 그들의 뒤로 후다닥 달려갔다.
“저 사람 좀 막아주세요!”
“알겠습니다. 뒤로 물러나세요.”
그들 중 얼굴에 사선으로 기다란 흉터가 있는 남자가 한발 걸어 나왔다.
“돌아가라.”
차분한 목소리임에도 힘이 실려 있었다.
아마도 일반인이 이런 상황을 마주했다면 오금이 저리다 못해 실수를 찔끔했을 거였다.
하지만 시후는 결코 일반인이 아니었다.
시후는 남자들을 스윽 훑었다.
‘몸 좀 쓰는 녀석들이군. 제법 무골이 있는 녀석도 있고.’
나이는 좀 먹었지만 얼굴 흉터남이 무공을 배웠다면 환갑 전에는 일류의 반열에는 오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경호원들을 평가한 시후는 주변을 좀 더 두리번거렸다.
경호원까지 두는 곳이라 그런지 사방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경호원들보다 저것들이 더욱 귀찮았다.
일전에 조민은 아미산에서의 일로 CCTV를 조심하라고 단단히 일렀었다.
‘실시간이라는 쓸데없는 게 있어서는.’
아미산은 높은 산중이었기에 장비가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았지만, 한국은 달랐다.
어디서나 실시간으로 CCTV 영상을 확인할 수 있었고 녹화도 웹하드라는 곳에 저장된다.
그 말은 시후가 지금 저 CCTV를 부순다고 해도 흔적이 남는다는 거였다.
그래서 적당한 선에서 녀석들을 해결할 생각을 했다.
본래 코끼리가 자기 발치에 있는 개미를 상대하는 게 가장 어려운 법.
다행이라면 녀석들이 먼저 다가와 줬다.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몸으로 깨우쳐야지.”
까닥-
흉터남이 손짓하자 뒤에 있던 남자 넷이 시후에게 다가갔다.
곱상한 외모에 방심할 만도 하건만 녀석들은 시후를 사방에서 포위했다.
그리고는 동시에 손을 뻗어 시후를 제압하려 했다.
시후는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녀석들의 손이 닿기를 기다렸다.
‘오랜만에 쓰는군. 건곤대나이(乾坤大挪移).’
시후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던 건곤대나이 신공을 펼쳤다.
이화접목의 수법의 극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효과를 내는 건곤대나이 신공이었지만 시후에게는 별로 사용하고 싶지 않은 무공일 뿐이었다.
‘내 몸에 다른 놈의 손이 닿는 게 너무 싫거든.’
그저 다른 이의 손길이 싫어서 펼치지 않는다는 것을 다른 이가 들었다면 미친놈이라 치부했을 거였다.
이유야 어떻든 건곤대나이 신공은 제 몸에 닿는 것들을 다른 곳으로 흘리는 묘리가 있었다.
지금과 같이 보여주기식으로 펼치기 딱 좋은 무공이라는 거였다.
아마도 일반인들이 보면 무술쯤으로 여길 테니 말이다.
건곤대나이를 펼치자 사방에서 쏟아지던 남자들의 손은 미끄러지듯 스쳐 지나갔다.
귀신에 홀린 것 같은 일이 벌어졌지만 남자들은 즉각 반응했다.
전쟁터에서 겪었던 경험을 살려 주먹을 거두고 발길질로 다음 행동을 이어갔다.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퍽퍽-
“크윽!”
되레 그들은 자기가 뻗은 발길질에 서로를 구타했다.
버들잎이 흔들거리듯 시후는 그 자리에서 몸을 흔들었을 뿐인데 말이다.
어느덧 남자들의 입과 코에서 피가 흘러나오자 얼굴 흉터남이 손을 들었다.
“그만, 돌아와.”
그 말에 남자 넷은 피를 소매로 훔치며 뒤로 물러났다.
시후는 얼굴 흉터남을 빤히 바라봤다.
흉터남은 사리 분별이 뛰어났다.
“제법 상황 판단을 할 줄 아는 놈이로고.”
“넌 누구냐?”
“나? 그냥 저기 안에 있는 녀석들에게 볼일이 좀 있어서 왔을 뿐이야.”
“그 볼일이라는 게 폭력인가.”
“이래 봬도 나는 평화주의자야.”
시후는 어깨를 으쓱였다.
시후를 아는 누군가가 이 말을 들었다면 이의 있다며 두 손을 번쩍 들었겠지만, 이곳에 그런 이는 없었다.
흉터 남은 고개를 돌려 박혜령을 봤다.
“잠깐 안으로 들여서 이야기를 나누시죠.”
“아저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 저자를 막으려면 총이라도 꺼내야 합니다.”
박혜령은 흉터 남의 말에 토끼 눈을 떴다.
자신이 아는 그는 결코 헛소리를 내뱉을 인물이 아니었다.
고등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저 곱상한 몸짱남이 그 정도인가 싶었다.
박혜령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미 시후가 여기 온 시점에서 예정되어 있던 합숙에 문제는 생겼을 터였다.
그럼,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알겠어요. 대신 안이 아니라 여기서 보죠.”
박혜령의 말에 흉터남은 시후를 돌아봤다.
“그래도 괜찮나?”
“뭐, 상관없어.”
어디서 보든 상관없었다.
앞으로 자신이 할 일에 장소 따위는 중요치 않았으니 말이다.
시후가 허락하자 박혜령은 저택 안으로 들어가 다른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나왔다.
이미 녀석들도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있었기에 우물쭈물 걸어 나왔다.
그렇게 드디어 문제점들이 모두 모이자 시후는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들었다.
“너희에게 두 가지의 선택지를 주마.”
“두 가지?”
“하나, 여기서 프로게이머 계약 해지를 하고 너희들 마음대로 살아간다.”
“또 그 이야기야?!”
어제저녁에 화두 되었던 계약 해지를 시후가 또 거론하자 다들 질린다는 표정이었다.
시후는 그런 그들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입을 열었다.
“둘, 노예 계약을 체결하고 프로게이머 일을 계속한다.”
“무슨 개소리야?!”
‘노예’라는 말에 가장 발끈한 것은 박혜령이었다.
더는 시후의 막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는 듯이 미간을 좁히며 욕을 한 사발 내뱉어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옆에 있던 흉터남이 박혜령 앞에 스마트폰을 들이밀었다.
“뭐예요?”
“이사님이십니다.”
박혜령은 지금 이 시점에 왜 아버지가 전화했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일단은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네. 아빠.”
-당장 그분 말을 따라라.
“네?!”
스마트폰 너머로 들려온 아버지의 첫마디는 너무 충격적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