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 비슷하다는 생각은 들었었다.
그런데 이리도 닮았다니.
“이 녀석… 얼굴 뭐냐?”
다짜고짜 침을 질질 흘리며 기절해 있는 사람의 얼굴을 나무라다니.
박초연은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시후 역시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게 아니었다.
어차피 대답해야 하는 본인은 따로 있으니 말이다.
“야, 정신 차렸으면 눈 떠라.”
“…….”
“무른 세 대 다시 무른다?”
“히익!”
지금까지 기절해 있었다고 생각했던 평치혁이 벌떡 일어났다.
여기 있는 누구도 시후를 제외하고는 그가 깨어 있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너 연기가 아주 일품이다?”
“삶에 체화되었으니까.”
“그 말은 좀 전에도 연기였다?”
“쳇.”
무엇이 진짜 모습인지.
평치혁의 말은 조금 전 건방지다 못해 콧대가 하늘을 찌르던 모습이 연기였다는 거였다.
그 말에 가장 놀란 것은 박초연이었다.
“장로님, 그 말씀 진짜이십니까?”
“어… 뭐.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던 거 알잖아.”
“그럼… 지금은 왜?”
박초연은 평치혁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들었다.
평치혁 역시 박초연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 역시 대력공방의 일원으로서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아 해외로 입양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어려서부터 여러 개의 가면을 써야만 하는 삶을 살아왔다.
후에 대력공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쓴 가면은 개망나니였다.
힘만 믿고 객기를 부리는 통제 불능 장로.
힘이 있으니 그에 맞는 자리를 주었지만 통제할 수 없으니 큰일은 맡기지 않는다.
그것이 자유를 갈망한 평치혁이 쓴 가면이었다.
그 사실을 지금 평치혁은 처음으로 밝히는 거였다.
그것도 오늘 처음 봤을 뿐 아니라 자기 뺨을 후려갈긴 시후에게 말이다.
시후는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는 평치혁을 보며 피식 웃었다.
“오늘 아주 운이 좋군. 똑똑한 녀석을 두 녀석이나 만나다니 말이야.”
시후가 말하는 두 녀석이란 평치혁과 시종이었다.
둘에게는 아직 듣지 못한 과거와 그들의 이야기가 있겠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다른 거였다.
시후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낸 듯한 평치혁에게 물었다.
“너는 평수혁을 아느냐?”
“네. 제 시조님이십니다.”
어느새 말투도 바뀌었다.
역시. 마치 마천서생 평수혁이 환생이라도 한 듯한 저 얼굴.
그의 핏줄이 아니라면 도저히 해명할 수 없었다.
“그럼, 네가 화산의 검을 사용하는 것은?”
“제 시조님께서 화산의 맥을 이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의외의 말이었지만 덕분에 시후는 그동안 좀처럼 맞추어지지 않던 조각을 하나하나 맞출 수 있었다.
왜 화산에 황 노인과 평수혁의 흔적이 남아 있었는지.
왜 멸마절지검이 자하신공의 기운을 그리 잘 받아들였는지.
왜 그 도사 같은 놈이 이런 후인을 남겼는지.
왜 이놈이 이곳에 온 것인지 말이다.
“이곳에 남겨진 것들이 평수혁이 남긴 것이냐.”
그 말에 평치혁은 두 눈을 부릅뜨며 몸을 떨었다.
꿀꺽-
“정말 그분이십니까?”
평치혁은 긴장감에 마른침까지 삼키며 물었다.
정말 자신이 생각하는 ‘그분’이 맞는다면 드디어 천 년의 업을 내려놓을 때가 된 거였다.
시후는 평치혁의 질문에 입을 열기보다는 기를 끌어올렸다.
천마지기(天魔之氣).
이번에 Safety World에서 공주를 해주하며 얻은 마기로 1단계의 틀을 깨고 드디어 2단계에 들어설 수 있었다.
1단계가 고작 신체에 천마지기를 담을 수 있을 뿐이었다면 2단계부터는 몸 밖으로 드러내 형상화할 수 있었다.
시후의 몸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붉은색도 푸른색도 아닌 주변의 어둠까지 삼킬 것 같은 검은색의 불꽃이 말이다.
그 불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주변인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실제로 주변의 온도가 올라간 것도 아니건만, 어째서인지 비고 안이 찜질방이라도 된 것처럼 열기가 느껴졌다.
평치혁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자신의 시조 때부터 내려오던 비밀.
평치혁은 들고 있던 검 자루를 비틀었다.
달칵-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양피지였다.
평치혁은 그것을 아주 소중하게 두 손으로 시후에게 내밀었다.
시후가 양피지를 집어 펼쳤다.
[천마님께서 걸어가시는 길에 작은 보탬이 되고자 후인을 남깁니다. 작은 조약돌 정도는 치울 수 있을 터이니 곁에 두십시오.]
평수혁의 글씨였다.
“정말 걱정이 많은 녀석이라니까.”
도대체 천 년의 안배를 어디까지 남겨 놓은 것인지.
이만한 계획을 세우기 위해 도사 같은 녀석이 결혼까지 했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아려왔다.
시후는 양피지를 반으로 접었다.
그런데 뒤편에 작은 글씨가 또 있었다.
안력을 돋우어야 할 정로 작은 글씨.
[조금이나마 여력이 되신다면 제 후인을 굽어살펴 주십시오. 형님.]
지극히 개인적인 부탁이었는지 평수혁답지 않게 ‘형님’이라고 적어 놨다.
‘녀석이 형님이라고 부른 적은 그때뿐이었는데.’
천마 시절 평수혁은 언제나 도사처럼 행동했다.
모든 생활에 절제하면서 말이다.
그랬던 녀석과 술잔을 기울인 날이 있었다.
‘그녀를 떠나보낸 49일째였지.’
그날 마천서생 평수혁은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셨다.
내공을 운용해 취기를 몰아낼 수 있음에도 녀석은 그러지 않았다.
술기운에 별의별 소리를 다 했지만, 천마는 그저 들어주었다.
그녀를 잃은 슬픔은 자신의 것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때 평수혁은 천마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형님’이라고 불렀었다.
다음 생에도 꼭 형님과 아우가 되자며 떼를 쓰면서 말이다.
그 생각이 떠오르니 문득 평수혁과 똑같은 얼굴의 평치혁의 얼굴이 눈에 확대되어 들어왔다.
“야, 가면.”
“가면… 하아…. 네.”
평치혁은 자기를 가면이라고 부르는 시후에 반박이라도 하려다가 말을 아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시후의 말에는 그럴 수 없었다.
“앞으로 날 형님이라고 불러라.”
“…네?!”
누가 봐도 평치혁의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데 시후는 자기보고 형님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실례지만 올해 나이가….”
“십팔… 세.”
어감이 이상했지만 분명 18세라고 했다.
“제가 올해 스물다섯입니다만.”
“그래서?”
“법적으로 제 나이가 더 많다고….”
“그.래.서?”
시후는 거두어들였던 천마지기를 다시 슬슬 끌어올렸다.
다시금 옥죄어오는 기에 평치혁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대신 시후가 목을 쭉 빼 평치혁 얼굴 앞에 디밀었다.
“무림에서는 무위가 곧 깡패야.”
“…….”
“대답은?”
“네… 형님.”
그렇게 시후는 법적으로 7살이나 많은 동생을 만들었다.
그 후 시후는 동생이 생겼다며 신나게 주변인들을 소개했다.
태산과 인호는 절친이고, 조민은 제갈세가 차기 가주를 논하는 자신의 꾀주머니라고 소개했다.
그 말에 조민이 얼굴을 붉히며 토라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곳에서의 볼일은 다 봤으니 말이다.
“그럼, 돌아가 볼까?”
“이대로 그냥 가시게요?”
평치혁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시후는 그런 평치혁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굳이 이곳에 대한 것을 모두 알 필요는 없었다.
특히, 박초연은 말이다.
“남자는 입이 무거운 법이지?”
“무슨….”
“너 자하신공은 익혔냐?”
“자하신공이요?!”
시후는 자하신공이라는 미끼로 평치혁의 입을 막았다.
조금 전 평치혁이 펼친 것은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으로, 화산을 대표하는 검법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시후는 그것에서 느꼈다.
‘이 녀석은 아직 매화검결도 깨우치지 못했어.’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위 단계라 할 수 있는 매화검결도 깨우치지 못했는데, 장문인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자하신공을 거론했다.
그것도 ‘나는 그거 아는데’라는 눈빛으로 말이다.
평생 가면을 쓰며 연기 인생을 살아온 녀석이라 그런지 눈치가 엄청 빨랐다.
“형님!”
평치혁은 시후에 품에 안기다시피 파고들어 허리에 팔을 둘렀다.
남자의 스킨십은 별로였지만 지금은 그냥 두었다.
“자, 그럼. 진짜 나가자고.”
평치혁에게는 따로 내일 자하신공에 대해 논하자고 전음을 전달한 후 비고를 나왔다.
외부에 나와 처음 그대로 미륵불좌상 하단에 브로치를 가져가 대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입구를 막았다.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역시 박초연이었다.
“그런 죽상은 그만하고 너희 일행들 챙겨서 돌아가. 내일 S.W SOFT에서 보자고.”
“네….”
“형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풀죽은 박초연과는 다르게 평치혁은 시후에게 90도로 허리까지 숙여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시후 역시 태산과 인호와 조민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두운 밤이 지나고 해가 뜨기 전.
시후는 다시 미륵불좌상을 찾았다.
박초연이 가지고 있던 브로치가 없어 입구를 열 수 없었지만.
“다른 놈들이라면 못 들어갔겠지. 이 또한 나만을 위한 안배. 천잠음영술.”
그림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숨어들 수 있는 천마의 은신술.
거기에 천마지기를 더하자.
스륵-
열리지도 않은 입구로 스며들어 갔다.
‘나선형인 이유가 있었군.’
시후는 5층 깊이를 스며들며 보았다.
나선형으로 이루어진 계단은 입구가 열려야 비로소 계단의 형태를 띠는 방식이었다.
만약 입구가 열리지 않는다면 그저 평범한 바위일 뿐이었다.
그 비좁은 틈으로 스며든 시후는 드디어 통로에 다다랐다.
“지체할 필요는 없지.”
이미 지체할 필요가 없기에 순시보를 펼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비고 입구에 다다른 시후는 또다시 천잠음영술을 펼쳐 안으로 들어섰다.
비고 안은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비고 중앙으로 걸어간 시후는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더니 씨익 웃었다.
“황 노인과 공로와 마천서생의 합작품이라 해야 하나?”
시후는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촤락-
그러자 지금까지 허리띠로 되어 있던 무혈검이 본래 모습을 드러냈다.
검신부터 검파까지 모두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무혈검.
시후는 이기어검을 펼쳐 무혈검을 하늘에 띄웠다.
거기에 천마지기까지 흘려 넣자.
끼이잉-
무혈검의 검신이 떨리며 기이한 소리를 냈다.
마치 천 년을 기다려온 가장 맛난 음식을 먹었을 때와 같은 환의에 찬 소리 같았다.
“녀석. 어디 실력 좀 볼까?”
시후는 그런 무혈검이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천마지기를 좀 더 흘려 넣었다.
그러자 무혈검이 날뛰기 시작했다.
카가가강-
비고 안을 누비며 사방팔방에 검흔을 새겨 넣었다.
미친 듯이 날뛰는 무혈검의 모습을 시후는 집중해서 보았다.
“찾았다.”
무혈검이 천장에 기다란 검흔을 남기는 그때 시후의 눈이 번뜩였다.
그리고 날아올라 무혈검을 낚아챘다.
착-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시후는 무혈검을 뒤집어 그대로 꽂았다.
아니, 이미 새겨져 있던 홈에 끼워 넣었다는 표현이 더욱 적절할 터였다.
무혈검은 그 홈이 마치 검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쏙 들어갔다.
시후는 무혈검이 더는 들어가지 않을 정도까지 밀어 넣고는 그대로 돌렸다.
잠겨 있던 자물쇠를 열듯 무혈검을 돌리자 지금까지 잠들어 있던 비고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그그극-
무혈검이 날아다니며 사방팔방 검흔을 새겨 넣었던 벽이 그대로 뒤집혔다.
그렇게 당대의 피바람을 불러일으킬 만한 물건들이 잠들어 있다는 비고의 진짜 모습이 시후의 눈앞에 펼쳐졌다.
“하?! 마천서생, 이 미친 자식. 황실도 털었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