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0화
비고(祕庫).
한 시대를 풍미한 무인이 자신의 모든 것들을 남겨둔 장소.
무림에서 비고의 출현은 피바람을 일으킬 정도의 큰 사건이었다.
그 무인의 절학이며 생전에 모아 놓았던 금은보화와 영약까지.
그야말로 비보(祕寶)가 가득한 보물 창고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시후 역시 천마 시절 비고에 대한 것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천마신교는 지리적인 요건상 많은 돈이 필요했다.
비옥하지 못한 땅에서 거두어들이는 작물이라고 해봐야 거기서 거기였기에 식료품 대부분을 구매했다.
신도들이 만든 물건들을 가지고 중원 및 서역과 교역하기도 했지만, 천마의 신조가 무엇인가.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천마는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무림 전역에 숨겨져 있던 비고를 찾았다.
물론, 소재를 파악하는 일은 지괴와 마천서생이 주로 했다.
대신 비고에 들어가는 일은 천마의 몫이었다.
천마동의 절진도 가볍게 파훼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으니 지괴가 시간 낭비하지 말고 들어가라며 밀어 넣곤 했던 것이다.
‘뭐, 덕분에 그 안에서 발견한 비급이나 영약은 언제나 내가 먼저였지.’
천마분심공이 있기에 발견한 절학들을 모두 익혔고 쓸 만한 영약은 주전부리처럼 먹었다.
그렇게 비고로 들어서는 문을 열었을 때 찬란하게 빛나는 금은보화의 장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간혹.
“여기처럼 아무것도 없는 곳도 있지만.”
열린 문으로 들어서자 야명주가 내부를 밝혔다.
그 안은 시후의 말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이럴 수가….”
가장 실망한 기색을 표하는 이는 박초연이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법.
망연자실한 표정의 박초연에게 시후가 다가갔다.
“간혹 이런 곳이 있어. 누군가가 먼저 다녀간 거지.”
“누가요?!”
“글쎄. 이곳을 열기 위해서는 그 브로치가 필요한 것 같으니, 어쩌면 네 선대일 수도?”
“아….”
박초연은 그제야 그럴 수도 있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후는 그렇게 박초연을 다독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확실히 싹 쓸어 갔다.
그것도 꽤 오래전에 말이다.
드문드문 바닥에 쌓여 있는 먼지의 두께가 달랐다.
그 자리에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는 뜻이었다.
“으흠….”
그런데 이렇게나 싹쓸이해 갔으면서 저 브로치를 왜 대대로 물려줬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시후는 혹시나 해 기감을 흘렸다.
마치 음파 탐지기처럼 무언가 닿으면 되돌아오도록 말이다.
그리고 잠시 후 시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를 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신경질적인 말투에 고개를 돌리니 남녀 한 쌍이 비고로 들어섰다.
“이봐, 방주. 이거 이야기가 좀 다른 것 같은데?”
싸가지 없는 말투를 장착한 남자의 부름에 박초연이 후다닥 달려갔다.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니 저자가 프로게이머 마지막 인물 같았다.
조민은 그의 태도에 시후에게 바짝 다가갔다.
“오빠, 안 돼요.”
“뭐가?”
무슨 강아지 교육하듯 조민은 시후를 말렸다.
“저 남자, 상당히 무례한 것 같지만 그래도 안 돼요.”
“뭐, 괜찮아. 아직은.”
시후의 그 말에 태산과 인호까지 바짝 다가왔다.
“너희는 또 왜. 떨어져 더워.”
“강시후, 안 돼!”
“이것들이 정말.”
또다시 강아지 교육하듯 말하는 태산에 시후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러자 인호가 나섰다.
“참아.”
“뭘 참으래?”
“그냥 좀 참아.”
그렇게 셋은 시후를 포위하듯 바짝 붙었다.
지금까지 시후의 행보로 봤을 때, 저런 부류의 사람에게 가차 없었던 그였다.
솔직히 시후가 마음먹고 나서면 셋은 그를 막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박초연이 저리 대하는 사람에게 대뜸 손을 쓰게 둘 수는 없기에 셋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시후를 막았다.
정작 시후는 아직까지 그를 어찌할 생각이 없는데 말이다.
되레 지금 한창 흥미가 돋고 있었다.
사실 시후는 조민에게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한 가지 일을 맡겼었다.
입구에 진 하나를 설치하라고 말이다.
뒤따라오는 녀석들의 발을 좀 더 묶어 두려는 심산이었다.
눈치 빠른 조민은 시후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서 진을 설치하고 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녀석의 성격상 대충 설치하지는 않았을 텐데.’
생명에 지장은 없겠지만 어느 정도 파훼하기에 난해한 진을 설치했을 거였다.
거기에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 있는 기관진식까지.
박초연이 가진 안경이 없음에도 저들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그것에 시후가 흥미를 느꼈다.
과연 둘 중에 누가 재주가 있는 것인지.
조민에 견줄 만한 진법에 대한 지식과 공로가 남겨둔 기관진식까지 피해 올 수 있는 재주가 있는 녀석이 누구인지 말이다.
때마침 저쪽에서 먼저 반응이 왔다.
“너야?!”
“…….”
대뜸 반말을 내뱉은 남자가 시후에게 다가왔다.
박초연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그의 곁을 따랐다.
“너냐고.”
“…….”
주어가 빠진 질문에 시후는 대답을 아꼈다.
그러자 남자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벙어리야?!”
“아니.”
“그런데 왜 대답을 안 해!”
“무엇을 묻는지 알아야 대답해주지?”
“너냐고! 나를 헛걸음하게 만든 게.”
“아! 그거. 음… 지금 네 태도를 보니 헛걸음으로 만들어주고 싶어지네?”
“뭐야?!”
시후의 말에 발끈하는 녀석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녀석의 앞을 박초연이 가로막았다.
박초연은 시후를 향해 제발 부탁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분은 대력공방 제1 장로 평치혁 님이십니다. 그리고 저쪽은 그분의 시종이고요.”
대력공방의 장로가 방주보다 높은 지위인지 심히 궁금해지는 소개였지만, 박초연의 소개에 녀석의 발끈하던 모습이 수그러들었다.
“평 장로님, 이쪽은….”
“알아, 감히 누구보고 오라 가라 한 천둥벌거숭이잖아.”
누가 천둥벌거숭이인지.
시후는 오랜만에 앞뒤 구분 못 하고 나대는 녀석을 보니 절로 눈썹이 꿈틀댔다.
“뭐야? 내 말에 기분이라도 상했냐?!”
거기에 평치혁은 쓸데없이 눈썰미가 좋았다.
그리고 힘을 쓰는 데 거침이 없었다.
후웅-
평치혁은 박초연을 지나쳐 시후에게로 쏘아져 갔다.
그의 곁에 세 명이 포위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실력이라면 시후의 뺨을 후려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손을 휘둘렀다.
시후는 그런 평치혁의 오른손을 바라봤다.
담긴 힘이 제법이었다.
어디서 무공을 익힌 것인지는 모르지만 저 손에 담긴 힘은 일 갑자는 넘어 보였다.
거침없이 힘을 쓰는 그 모습에 동요해서일까.
‘어쩔까. 자를까?’
시후는 한순간 살기를 드러냈다.
“헉!”
그러자 달려들던 평치혁이 그보다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너, 너 뭐야?!”
“오, 이것 봐라? 제법 눈치도 있네.”
찰나의 순간에 피어오른 살기를 감지하고 달려들던 힘을 거두어들여 그새 문 앞까지 도망치다니.
시후는 평치혁을 다시 봤다.
“네 그 낯짝. 제대로 보여주면 이번은 봐주마.”
“……!”
시후의 말에 평치혁과 박초연과 시종이 동시에 놀랐다.
“쯧쯧쯧. 인피면구 하나 발각된 거로 그렇게나 얼굴에 티를 내다니. 아직 경험이 부족하구나.”
시후는 자신을 포위하고 있던 태산과 인호와 조민을 슬쩍 밀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셋 역시 이미 평치혁이 먼저 손을 날렸기에 더는 말릴 필요를 못 느껴 순순히 물러났다.
시후가 걸어 나오자 가장 당황하는 것은 박초연이었다.
“자, 잠깐만요! 일단 진정하시고….”
“너와 대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웁!”
시후는 박초연에게 의념기를 펼쳤다.
그저 입을 다물었으면 하는 의지를 담았기에 별다른 일은 없이 박초연의 입만 실로 꿰맨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의, 의념기?!”
역시나 평치혁은 하는 꼬라지에 비해 무공을 제대로 배운 놈이었다.
단번에 의념기를 파악하지 않나, 제 시종이라는 녀석에게 전음을 보내지를 않나.
평치혁의 전음을 들은 시종은 우물쭈물하더니 품속을 뒤졌다.
‘저 조그마한 몸에 무엇을 감추었다고 저리 뒤지나.’
150cm는 될까 말까 한 키에 몸은 또 어찌나 왜소한지.
분명 하루 삼시 세끼를 다 먹는 녀석이 아닐 터였다.
그런 잡생각을 하는 사이 시종이 품속에서 검 자루 하나를 꺼내 평치혁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 든 평치혁의 표정은 한껏 자신감이 충만해 보였다.
“그거 좋은 건가 보다?”
“흥!”
촤라락-
평치혁이 손에 든 검 자루를 위에서 아래로 휘두르자 안에서 검신이 튀어나왔다.
아이들 장난감 같은 장치였지만 그 안에 새겨진 문양까지는 장난이 아니었다.
“매화?”
“흥!”
콧방귀를 뀌며 달려드는 녀석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청량하면서도 향긋한 매화 향이 담긴 기.
화산의 검이었다.
핑핑-
시후는 평치혁이 휘두르는 검을 슬쩍슬쩍 움직이며 가볍게 피했다.
‘분명 화산의 검술이다. 어떻게?’
어떻게 황 노인과 관련된 곳에서 화산의 검이 나온단 말인가.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모르는 천 년의 세월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귓가에서 웽웽 시끄럽구나.”
짝-
시후는 미간을 노려오는 평치혁의 검을 슬쩍 피하고는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커헉!”
뺨 한 대에 평치혁은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났다.
그러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시후를 노려봤다.
“궁금한 거는 궁금한 거고. 일단 내게 검을 휘둘렀으니 그에 합당한 대가는 치르고 이야기하자.”
짝짝-
시후의 말이 끝나는 순간 또다시 뺨 맞는 소리가 찰지게 실내를 울렸다.
그와 동시에 평치혁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오르며 나뒹굴었다.
시후는 바닥에 널브러져 꿈틀대는 평치혁에게로 걸어갔다.
“아직 세 번 남았다.”
시후는 평치혁이 검을 휘두른 게 여섯 차례니 정확히 여섯 대를 때려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그만, 하, 하세요.”
언제 달려왔는지 시종이 평치혁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시후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시종은 시후가 점점 가까워져 오자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두 팔을 쫙 벌렸다.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심산 같았다.
우뚝-
시후는 시종의 코앞에 걸음을 멈추고는 허리를 살짝 숙여 시종을 자세히 봤다.
“너구나?”
“네에?!”
“네가 입구에 펼쳐놓은 진을 파훼하고 이곳까지 저 녀석을 안내한 거지?”
“네?! 아, 네….”
시종은 연신 말을 더듬으며 시후의 질문에 대답했다.
시후는 그 자세 그대로 몇 가지를 더 물었다.
입구에 펼쳐놓은 진이 무엇인지, 파훼 방법은 무엇이었는지, 이곳까지 오는 기관진식들은 또 어찌 해제하고 왔는지 물었다.
그 말에 시종은 줄곧 더듬더듬한 말투로 대답했다.
자신이 어째서 시후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오행진에 사문이 없는 것을 보고 그대로 들어왔다라.”
시후는 시종의 대답을 듣고는 고개를 돌려 조민을 돌아봤다.
“어때?”
“솔직히요?”
“어.”
“자존심 상하네요.”
“크큭. 그렇지? 이거 우리 지괴에게 아주 좋은 맞수가 생기셨어.”
시후는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조민에게 아주 좋은 라이벌이 생겼다 여겼다.
천마 시절에도 머리 쓰기 좋아하는 지괴에게 마천서생은 언제나 좋은 친우이자 적수였다.
시후는 다시 고개를 돌려 시종을 봤다.
아직도 감추고 있는 것이 많은 아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흥미가 일었다.
“넌 이제부터 양파다.”
“네? 야, 양파요?”
“그래. 이봐, 박 방주. 이 아이 내가 데리고 가도 되나?”
시후는 대뜸 박초연에게 물었다.
시후가 시종을 상대하는 동안 박초연은 평치혁을 돌보고 있었다.
정신을 잃은 것인지 침을 질질 흘리는 평치혁을 무릎베개까지 해주며 극진히 말이다.
그녀는 시후의 말에 시종을 지그시 바라봤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더니 입을 열었다.
“네 뜻은 어떠하니?”
“네?!”
시종은 박초연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깜짝 놀랐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을 응시하더니, 박초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시후 님의 뜻대로 하세요.”
“좋아. 조민아, 양파는 앞으로 제갈세가에서 맡는다.”
“네.”
조민의 대답에 시후는 시종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저 언니에게 가 있거라.”
“네….”
시종은 시후의 말에 우물쭈물하며 조민에게 걸어갔다.
어째서인지 더는 시후가 평치혁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시종은 걸어가는 내내 박초연을 힐끗거렸다.
둘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알 수 있었다.
시후는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마지막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었다.
“이제 그 인피면구 좀 벗겨보지?”
화산의 검을 쓰는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궁금했다.
왜 개망나니 같은 녀석에게 인피면구까지 씌워 정체를 감추는지 말이다.
박초연은 시후의 다그침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평치혁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지이익-
평치혁의 얼굴에서 얇은 박피가 벗겨지듯 인피면구가 벗겨졌다.
그리고 드러난 얼굴에 시후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