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박초연은 시후를 따르며 뒤를 힐끗거렸다.
“저들도 같이 가는 건가요?”
“당연하지.”
그들의 뒤에는 태산과 인호와 조민이 뒤따르고 있었다.
박초연은 대놓고 불편한 티를 냈다.
“지금 가시는 곳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계시는 거 아닙니까?”
시후는 박초연의 말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럼, 가지 말까?”
“네?”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하니 가기가 싫어지잖아.”
“약속했잖습니까?”
“그 약속에 네 기분까지 맞춰주는 건 없었던 것 같은데?”
박초연은 그제야 시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태도를 분명히 밝히라는 거였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명백히 시후는 박초연의 부하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동맹 관계도 아니다.
엄연히 말하자면.
“인솔자.”
“네?”
“네 머릿속에 새겨 넣으라고. 내가 누구인지 말이야.”
그랬다.
시후는 박초연에게 인솔자와 다름없었다.
그녀가 꼭 찾아야 하는 곳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
그리고 감히 그녀가 범접할 수 없는 무림인.
박초연은 그것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 새겨 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보다 그놈은?”
“그분은 저희가 해당 장소에 도착하면 나타나실 겁니다.”
저 말은 지금 녀석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거였다.
언제 어디서든 바로 튀어나올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음흉한 놈인가?”
“음흉하기보다는 좀 자유분방한 성격이라 그렇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박초연은 시후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곧장 양해를 구했다.
이쯤 되니 더욱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놈이기에 저 녀석이 저러지?’
궁금증이 커지니 시간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연락해라.”
“네?”
“목적지는 한국대 뒷산인 관악산, 봉천동에 있는 미륵불좌상 앞이다.”
지금까지 인솔자느니 뭐니 하면서 알려주지 않던 목적지를 느닷없이 말해주자 박초연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시후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느긋해 보였다.
되레 뒤따르던 세 사람의 표정이 긴박해졌다.
“아! 강시후!”
“오빠!”
셋은 시후를 타박하듯 부르고는 다급히 신형을 날렸다.
지금까지 뒤따르던 수준이 아닌,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경공술을 펼쳐 빌딩 위를 날았다.
“지금… 꺄악!”
쏜살같이 날아가는 셋을 바라보던 박초연은 순간 허리를 감싸오는 손에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시후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은 거였다.
“이미 전해졌겠지?”
“네? 아, 네….”
시후가 박초연의 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는 줄곧 인이어를 착용하고 있었기에 실시간으로 대화가 다른 곳으로 전달되었을 터였다.
그리고 시후의 기감에도 빠르게 사라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몇몇 무리로 나뉘어 있었지만 그들의 목적지는 같을 터였다.
“네 발걸음에 맞추다가는 내일 아침 해가 떠야 당도할 것 같아서 말이지.”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다 치고, 꽉 잡아라.”
박초연은 자신의 무공이 시후에 비해 비루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을 지적하자 발뺌을 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시후가 무슨 말을 해도 따르지 않아야 정상이건만 어째서인지 꽉 잡으라는 시후의 말을 본능적으로 따랐다.
시후는 박초연이 자신의 옷깃을 움켜쥐자 가볍게 빌딩 옥상을 박찼다.
가볍게 박찼지만, 그 움직임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꺄아악!!”
어느새 시후의 품속에 파고든 박초연의 비명이 길게 울려 퍼질 정도로 시후가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먼저 앞서가던 세 명을 순식간에 따라잡은 시후가 입을 열었다.
“5분 늦을 때마다 개인 특별 훈련 1시간.”
그 말을 끝으로 시후는 다시 쏘아져 나갔다.
“으악! 미친 강시후!!”
원망 섞인 셋의 고함을 뒤로한 채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시후가 말한 개인 특별 훈련은 그야말로 지옥의 시간이었다.
약선방에서 몸을 보훈하는 동안 시후는 셋을 쉬게 두지 않았다.
약선방의 탁월한 의술 덕분인지 당소영을 치료하는 동안 이미 셋은 회복을 끝낸 상태였다.
그래서 시후가 직접 셋을 훈련했다.
이유야 뻔했다.
혈교와 싸우기 위해서는 셋이 더 빠르게 강해져야 했기에.
셋도 그 말에 통감했기에 호기롭게 따랐다.
하지만 개인 특별 훈련이라는 말 뒤에 숨겨진 지옥을 경험하고서야 셋은 뼈저린 후회를 했다.
그때 시후의 훈련은 아침, 점심, 저녁 세 번에 이어졌다.
훈련의 내용은 간단했다.
국숫집 뒤뜰에서 태산과 신호가 했던 수련이었다.
천천히 움직이며 서로 손속을 나누며 그 안에 숨겨진 변초를 파악하는 거였다.
거기에 시후는 그저 한 가지를 덧댔다.
살기(殺氣).
허와 실이 난무하는 변초 모두에 살기를 담았다.
덕분에 셋은 시후가 무심히 뻗는 주먹에 해일이 덮치는 압박감을 느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공포에 이어진 수련은 그들의 실력을 일취월장시켰다.
혈교인들과 싸움에서 중요한 순간에 망설인 것에 대한 특별 훈련이었다.
중국 약선방을 떠나는 날.
조민은 그 훈련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환호성을 질렀었다.
그런데 지금 시후가 그 훈련을 다시 꺼내니 절로 치가 떨렸다.
“죽을힘을 다해 달려요!!”
“우리도 알아!”
태산과 인호는 조민의 신호에 맞추어 기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셋은 조금 전보다 배는 빨라진 경공술로 관악산을 올랐다.
“이제, 조, 조금만!”
“헉, 헉헉!”
사력을 다해 내달린 셋의 눈에 드디어 목적지인 미륵불좌상이 보였다.
“오, 5분 커트했네?”
시후는 슬라이딩하듯 쓰러진 셋을 내려다보며 손뼉까지 쳐주었다.
역시 사람은 극한의 경험을 한 후에야 초월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장면이었다.
시후는 손을 슬쩍 휘저어 셋을 일으켜 세웠다.
셋이 얼마나 죽을힘을 다해 달려왔는지는 저 몰골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시후는 손을 뻗어 셋에게 기를 흘려 넣었다.
흐트러진 셋의 기를 갈무리하여 요동치는 단전에 잘 넣어주었다.
이 역시 특별 훈련 이후 시후가 해주었던 치료법이었다.
셋은 익숙하게 안정되는 기를 느끼며 심호흡을 했다.
“후우, 강시후. 진짜 이러기야?”
태산이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시후는 그런 셋에게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덕분에 시간을 벌었잖아.”
“무슨 시간?”
“쟤네 팀이 오기 전에 보물찾기할 시간.”
그 말에 셋은 박초연을 봤다.
박초연은 상당히 초조한 모습이었다.
인이어에 손을 올리고는 교신을 주고받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늦어서야….”
셋은 그제야 시후가 왜 이런 똥개 훈련을 시켰는지 이해했다.
시후는 자신의 의도를 눈치챈 셋에게서 눈을 떼고는 박초연에게 다가갔다.
“이제 들어가 볼까?”
“조,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내가 참을성이 없어. 지금 들어갈 거 아니면 다음에 다시 오고.”
다음에 다시 오자며 말하는 시후의 표정은 전혀 다음에 다시 올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지금 아니면 다시는 이곳을 찾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다.
박초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인이어를 통해 현재 상황을 보고했다.
“저희 먼저 들어갈 테니 뒤따라오세요.”
그 말을 끝으로 인이어를 빼버렸다.
아마도 상대방이 긍정적으로 대답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후는 기껏 벌어 놓은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그거 내놔봐.”
박초연의 가슴에 달린 브로치를 가리켰다.
박초연도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기에 순순히 내주었다.
나팔꽃 모양의 브로치.
시후는 그것과 똑같은 모양을 이곳 미륵불좌상에서 봤다.
일전에 중국으로 떠나기 전 당성치와 이곳에서 만나면서 우연히 말이다.
‘좌불상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라 생각했더니 이거였을 줄이야.’
시후는 브로치를 미륵불좌상 하단에 가져갔다.
그곳 바닥에는 딱 브로치 크기의 홈이 있었다.
달칵-
그곳에 브로치를 얹으니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그극-
좌불상이 흔들거리더니 뒤로 밀려나며 아래에 계단이 나타났다.
“대단하군.”
이만한 장치를 이런 곳에 설치했다는 것에 시후의 감탄을 자아냈다.
박초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력공방의 방주가 된 후 취임식에서 받았던 브로치에 이런 비밀이 있을 줄이야.
시후는 브로치를 다시 박초연에게 돌려주었다.
“그럼, 들어가 볼까?”
“네.”
시후가 먼저 앞장서자 박초연이 그 뒤를 따랐다.
시후는 고개를 살짝 돌려 조민을 봤다.
“조민아?”
“알겠어요.”
역시.
눈치 빠른 조민은 이미 시후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시후는 그런 조민이 기특하다는 듯이 웃어주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은 나선형으로 돌아 내려가는 형태였다.
약 5층 정도 깊이를 내려오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가 나타났다.
시후는 그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왜요?”
“이런 곳이 이렇게 어두울 리가 없는데 말이지?”
무언가 안배를 해놓은 것이라면 중국에서 보았던 것처럼 야명주라도 박혀 있을 터였다.
그런데 이런 칠흑 같은 어둠이라니.
시후는 안광을 돋우어 주변을 훑었다.
그러자 앞의 모습이 대낮처럼 환하게 보였다.
버스 한 대는 지나갈 정도로 넓은 크기의 통로는 그 끝이 어디일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 보였다.
그렇게 주변을 훑은 시후는 피식 웃었다.
‘이놈의 미친 늙은이가.’
시후는 속으로 공로에게 욕을 한 사발 해줬다.
도대체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으면 이런 곳에 저런 장치를 해놓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기관진식인가요?”
박초연이 다가와 물었다.
“보여?”
스윽-
시후의 물음에 박초연은 안경을 한 차례 밀어 올렸다.
“아, 그거.”
생각보다 저 안경이 쓸모가 있어 보였다.
저 안경 때문에 독안공으로도 내력을 읽어낼 수 없는데, 기관진식까지 확인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황 노인이의 후손이라 그런가? 실력이 제법이야.’
황노인의 유품은 아닐 테고, 아마 대력공방의 작품일 터였다.
시후는 대력공방이라는 곳에 대한 기대감이 일었다.
저만한 것을 만들어내는 실력이라면 앞으로 유용하게 써먹을 곳이 있었다.
“그럼, 앞장서볼래?”
“네. 조심히 따라오세요.”
“그래. 너희들도 조심히 따라와. 내가 딛는 발 위치만 디딜 수 있게.”
시후는 어느새 따라붙은 태산과 인호와 조민에게 말했다.
셋도 어느 때부터 내공을 일으켜 안광을 돋우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후처럼 밝게 볼 수는 없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라도 시후를 따라갈 정도의 안광은 일으켰다.
그렇게 박초연이 앞장서고 시후 일행이 뒤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박초연은 가는 도중 급히 방향을 바꾸거나 갈지자로 걷거나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시후는 묵묵히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솔직히 시후는 박초연과 같이 이렇게 걸어갈 필요가 없었다.
이곳에 있는 기관진식은 바닥을 밟으면 작동되는 것들이었다.
‘아마도 공로가 만들었을 테니 천지가 개벽하는 정도의 것들이 나오겠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벽과 땅이 어떤 형태로 변환되며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기관진식이었다.
하지만 시후는 이곳에 발을 디디지 않고도 걸어갈 수 있는 내공이 있었다.
자기야 허공에 둥둥 떠서 날아가면 그만이지만 나머지 일행들은 그럴 수 없기에 이처럼 박초연을 따라가는 거였다.
그렇게 일각의 시간이 지나자 박초연이 멈춰 섰다.
“여기가 끝이에요.”
“그래 보이네.”
그들의 앞을 거대한 문이 막아섰다.
시후는 박초연에게 어서 문을 열라며 턱을 까딱였다.
박초연 역시 이미 이 문을 어떻게 여는지 알고 있었다.
그 문 중앙에 나팔꽃 모양의 홈이 있었으니 말이다.
박초연이 그곳에 브로치를 얹었다.
그그극-
그러자 육중한 무게를 짐작할 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얼마나 대단한 것을 숨겨놨는지 한번 봐볼까?”
시후는 문이 열리자 가장 앞장서 앞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