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이놈의 시끼들이….”
시후는 창피하다 못해 치를 떨었다.
화가 치밀어 오르자 기가 절로 일어났다.
쿵-쿵-쿵-
시후의 심장 박동에 맞추어 대기가 울렸다.
영주성 전체가 흔들리자 블칸 영주가 시후의 어깨를 다독였다.
“역시, 자네는 다르구만.”
칭찬의 말이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래도 그 말에 진정은 할 수 있었다.
“후, 좋아. 화를 당해야 하는 녀석들은 지금 없으니까.”
이미 로그아웃한 녀석들을 욕해봐야 뒷담화밖에 안 되니 말도 아꼈다.
대신 시후는 계획을 수정했다.
‘조민에게 좀 맡기려고 했더니 안 되겠어.’
시후는 프로게이머들 교육에 조민을 백분 활용할 생각이었다.
자신이 대련을 통해 그들의 문제점을 집어주고 나아질 수 있는 방향을 가르쳐준 뒤 조민이 잡아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데 블칸 영주의 테스트조차 통과를 못 한다니.
“어이가 없네.”
“크흠,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내가 괜스레 미안해지는군.”
“영감이 미안할 게 뭐 있어. 영감이 휘두른 한 번의 검격도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린 녀석들이 문제지.”
블칸 영주가 프로게이머들에게 한 테스트는 간단했다.
착용하고 있는 방어구를 해제하고 자신의 일격을 받아내는 것.
프로게이머들은 왜 방어구를 벗어야 하는지 의문을 표했지만, 그들이 앞으로 참여할 월드 오브 리그전의 기본 룰과 같다는 설명에 다들 따랐다.
“방어구를 벗는 것 외에는 모두 사용해도 된다고 했었네.”
“그랬는데도 모두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는 말이지?”
시후의 이마에 힘줄 한 가닥이 솟았다.
“모두 한 방에 나가떨어지지는 않았네. 지금 남아 있는 이들은 버텼다네.”
“녀석들은 모두 내가 키웠으니 그 정도 하는 건 당연한 거고.”
두 번째 힘줄이 솟았다.
“어쩐지. 저들 외에는 모두 스킬을 쓰거나 움직이지도 못한 이유가 있었군.”
“하?! 반응도 못 했어?”
시후의 이마에 세 번째 힘줄이 튀어나와 세 가닥이 연결되었다.
시후는 당장이라도 로그아웃할 기세였다.
“오빠!”
조민이 그런 시후의 허리에 태클을 걸듯이 매달렸다.
이대로 시후가 로그아웃하게 되면 현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했다.
적어도 S.W SOFT 3층은 똥 바다가 될 거였다.
되돌릴 수 없는 불상사가 벌어질 판에 그저 방관만 할 수 없었다.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도 그렇고 이곳에서의 일도 그렇고 말이다.
“오빠, 일단 여기부터 정리하는 게 순서일 것 같은데요?”
“여기 뭐?”
시후의 반응이 싸늘했다.
그래도 프로게이머라는 녀석들에게 일말의 기대를 했건만.
녀석들은 자신의 기대를 배반했다.
이 더러운 기분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장 뛰쳐나가 그 자식들 대가리에 들어 있는 똥 덩어리를 전부 뱉어내게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었다.
그런데 조민이 이렇게까지 말리자 잠시 망설였다.
시후는 조민을 그만큼 신뢰했다.
조민은 시후의 차가운 음성과는 다르게 그래도 망설이는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블칸 영주랑 공주요. 스페셜 히든 퀘스트 클리어하셨다면서요. 그런데 이렇게 가버리시면 안 되죠.”
조민은 빠르게 설명했다.
히든 퀘스트와 같은 굵직한 퀘스트들은 그 후에 대처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내용이었다.
Safety World도 하나의 현실이라고 여기는 이유가 이런 점에 있었다.
기본적인 퀘스트야 유저들이 게임에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보조하는 것이지만, 히든 퀘스트는 세계관과 연결된다.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보상만 받고 그대로 끝내면 그와 관련된 NPC들과의 관계도 거기서 끝나버린다.
일전에 오크 부족장 퀘스트 역시 시후가 델루를 죽이지 않고 수하로 삼으면서 Safety World의 세계관에 영향을 끼쳤다.
그전까지 케난 협곡에는 광석을 캐던 유저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오크들이 더 많은 게 바로 그 증거였다.
그처럼 시후가 이번에 만난 블칸 영주와 저 공주 역시 이대로 헤어지면 안 된다는 것이 조민의 주장이었다.
이 설명을 빠르게 전해 들은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공을 증진을 위해서는 중요한 것이지.’
시후는 정확히 핵심을 집은 조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품에서 놓아주었다.
“영감, 그래도 수고해줘서 고마워.”
일단은 블칸 영주의 수고에 감사를 표했다.
블칸 영주는 그런 시후의 모습에 턱수염을 매만지며 허허 웃었다.
“허, 허허. 역시 그 아이가 자네의 책사였군.”
블칸 영주는 조민을 높이 평가했다.
시후는 전형적인 강자의 자질을 가졌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런 그의 결정을 단 몇 마디로 돌려놓은 조민이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둘의 라포가 상당하군.”
이는 조민의 능력이 뛰어나서만이 아니었다.
둘에게는 다른 이들이 끼어들지 못하는 깊은 관계성이 있었다.
시후 역시 블칸 영주의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탐내도 소용없는 거 알지?”
“허, 허허. 자넨 역시 눈치가 빨라.”
시후는 블칸 영주의 눈에 욕심이 깃드는 것을 봤다.
가뜩이나 이 영주성은 인력이 부족해 보였다.
그러니 조민이 블칸 영주의 눈에 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사전에 경고한 거였다.
그리고 시후의 경고는 블칸 영주로서는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다.
“대악마와 겨루는 그대의 경고라면 내 뼛속에 깊게 새기겠네.”
“그런 태도는 아주 좋아. 앞으로도 유지하길 바라.”
시후는 블칸 영주와 대화를 이어가며 조민의 눈치를 살폈다.
이만하면 되었냐고 묻는 거였다.
하지만 조민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직 하나가 더 남았음을 말하는 거였다.
“칫.”
시후는 혀를 차고는 블칸 영주 뒤에 있는 공주에게 다가갔다.
“많이 놀라… 보이지는 않는군요?”
“네. 뭐, 저도 기사 가문의 여식이니까요.”
시후는 공주의 의연한 모습에 흥미가 일었다.
조금 전 시후가 홧김에 뿜어낸 기운은 영주성을 흔들 정도였다.
‘영감이 옆에서 기운을 상쇄시켜 줬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침착하다고?’
조금 전까지 키스해 달라며 보채던 철없는 여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이유를 찾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는 않았다.
“그런데 왕자님, 저분은 누구세요?”
“누구….”
“저 육체미를 자랑하시는 여성분이요.”
공주는 조민을 가리켰다.
현실과 다르게 Safety World의 유라는 볼륨감 있는 몸매의 소유자였다.
“우선. 제 이름은 ‘천마’입니다. 그리고 쟤는 제 동료이고요.”
“아… 동료시구나.”
공주는 조민을 향해 눈을 흘겼다.
그 모습에 시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상외의 의연한 모습에 공주에게 무언가 특별한 능력이라도 있는가 싶었더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그저 조민에 대한 질투에서 나온 일시적인 투기 같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잠시 일어났던 흥미가 가셨다.
“허, 허허. 그렇게 실망하지 말게나. 내 자식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실제로 이 아이의 능력은 다음에 평가해도 늦지 않을 테니.”
“뭐, 그러지.”
눈치 빠른 블칸 영주가 시후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미 시후의 눈에서 흥미가 사그라진 것을 본 그는 다른 수를 내놓았다.
“대신 내 좋은 정보를 하나 주겠네.”
“정보?”
“그래. 자네가 다시 이곳을 찾을 만한 가치가 있는 정보를 말이야.”
“그건 흥미가 돋는군.”
“역시 솔직한 친구야.”
어느새 블칸 영주는 시후를 친구라 불렀다.
그만큼 그에게 있어 시후는 귀인이라는 말이었다.
시후는 헛소리 그만하고 어서 할 말이나 하라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사설이 길어.”
“허, 허허. 이런 정보를 이렇게 받아 가는 이는 그대가 처음일 거야.”
“길다니까.”
“알았네. 자네의 책사가 가진 아이템들. 아직 완전히 해주가 된 게 아니었더군.”
“아이템?”
보상으로 나온 히든 퀘스트에 대한 정보라도 주려나 생각했더니 느닷없이 조민이의 아이템을 들먹이는 블칸 영주였다.
시후는 조민에게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조민이 다가오자 블칸 영주는 손을 내밀어 조민이 차고 있는 목걸이를 슬쩍 들어 올렸다.
[블락칸토의 심장 목걸이]
[등급 : 레어]
[기민함 : +10%]
[어둠 계열 스킬 능력 : +10%]
[시크릿 옵션 : 미개방 상태(헤라 3세의 축복을 받으면 개방 가능.)]
헤라 왕국 성 앞에서 구매했던 어둠 계열 아이템이었다.
시크릿 아이템으로 숨겨져 있는 옵션을 개방하기 위해서 헤라 3세에게 마르스를 위탁받았었다.
그 아이템을 블칸 영주가 거론하자 시후와 조민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자네가 갈 길에 여기 숨겨진 옵션이 나침반이 될 거야.”
“오빠가 갈 길이요? 그게 무슨….”
“히든 퀘스트 받았다.”
블칸 영주의 말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조민에게 시후는 간략하게 답했다.
조민은 왜 그런 중요한 말을 이제야 말하냐는 듯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시후를 째려봤다.
“허, 허허. 저자의 표정을 보니 자네가 그러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나 보군.”
정확하게 과거의 행적을 짚은 블칸 영주에 시후는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조민은 블칸 영주의 말에 힘입어 눈에 더 힘을 주고 있었다.
어서 말을 돌리지 않으면 불리한 상황에 처해질 것 같았다.
“저것들을 해결해주고 가지.”
지익-
시후는 인벤토리에서 이동 스크롤 한 장을 꺼내 찢었다.
그러자 빛이 번쩍이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오랜만.”
뒤집어쓴 로브를 걷으며 인사를 한 사람은 덕칠이었다.
“이자는 누구인가?”
블칸 영주는 새로운 유저의 등장에 일단 경계심을 보였다.
“영감이 말한 마법사.”
“마법사? 설마, 자네가 말한 저것들을 해결하는 방법이 마법사를 소개해 주는 거였나?”
블칸 영주는 영주 성 담벼락과 뻥 뚫린 벽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을 가리켰다.
5서클의 마법사는 있어야 저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설명을 시후는 마법사를 소환한 거였다.
하지만 블칸 영주의 표정은 탐탁지 않아 보였다.
“5서클의 마법사라면 내 딸아이가 있으니 되었네. 그것 말고 바로 해결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공주가 5서클?”
블칸 영주의 말에 시후는 공주에 대한 흥미가 다시 샘솟았다.
덕칠에 대해서 마법사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그저 마나를 이용해 스킬을 사용하는 단순한 존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럼, 공주도 대마도사인가?”
“뭐? 대마도사?”
“어. 마법사는 모두 대마도사가 아니야?”
“허. 대마도사가 그리 흔한 줄 아나? 대마도사는 내 생에 한 명밖에 보지 못했었네.”
“그래? 그럼, 두 명째네. 쟤도 대마도사거든.”
“뭐?!”
시후가 덕칠을 가리키자 블칸 영주가 깜짝 놀랐다.
대마도사가 어떤 존재인가.
그저 Safety World의 직업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존재 개념 자체가 마법사와는 달랐다.
마법사가 그저 마나를 이용해 스킬을 사용한다면 대마도사는 마나를 이용해 마법을 사용했다.
즉, 마법사가 하늘을 날기 위해 10의 마나를 이용해 플라이 스킬을 펼친다면 대마도사는 1의 마나를 사용해 바람의 흐름에 마나를 흘려 넣어 플라이 마법을 펼치는 거였다.
당연히 대마도사가 하는 방식이 훨씬 어려웠다.
일전에 시후가 독안공으로 덕칠에게서 보았던 것이 바로 이거였다.
조민에게는 미리 귀띔해 주었기에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하지만 조민은 덕칠이 대마도사라는 사실에 놀라는 블칸 영주의 모습에 눈을 빛냈다.
“잘되었네요. 대마도사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저 원인 모를 어둠의 기운도 빨리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거고….”
조민은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마치 더 할 말이 있으며, 그 뒷말이 핵심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역시나 이미 흥분한 블칸 영주가 덥석 미끼를 물었다.
“대마도사에게 마법을 배운다면 공주님은 어떠실까요?”
그 말에 이곳에 있는 모두가 눈을 번뜩였다.
블칸 영주와 공주는 이런 흔치 않은 기회가 생겼다는 것에 번뜩였고, 대마도사 당사자인 덕칠은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게 되어 번뜩였다.
그리고 시후는.
“영감. 딜?”
새로운 흥정을 위해 눈을 빛내며 손을 내밀었다.
“허, 허허. 앞으로 더욱 가까운 관계가 되겠군.”
덥석-
블칸 영주는 시후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렇게 시후는 블칸 영주와 모종의 계약을 마치고 덕칠을 다독였다.
이곳에서의 노고는 현실에서 보상해 주겠노라고 말이다.
덕칠은 시후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기에 순순히 받아들였다.
은원관계가 확실한 시후가 주는 것이 결코 자신에게 하찮거나 가벼울 리가 없으니 말이다.
이제 이곳의 일이 일단락되었다.
시후는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블칸 영주를 애달프게 하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슬슬 박초연과 약속한 시각이 되어가는군.’
대력공방의 비밀의 문을 열 시간이 되었기에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그럼, 공주.”
“제희요.”
공주는 시후가 한 것처럼 자신의 이름을 정정해 주었다.
이미 독안공을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었기에 시후는 줄곧 공주라고 불렀었다.
“그래요. 제희. 다음에는 좀 더 긴 시간을 가져 보자고요.”
“저도 기대하고 있겠어요. 다음에는 좀 더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거예요.”
그것을 끝으로 시후는 로그아웃을 했다.
이미 태산과 인호와 D.M에게는 밖에서 기다리라고 해놓았기에 캡슐에서 나오자 다들 얌전히 시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박초연의 모습은 상당히 초조해 보였다.
시후는 고개를 숙인 프로게이머들을 한 차례 훑었다.
“당신들.”
흠칫-
시후의 부름에 다들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도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템이 없다면 자신들의 실력이 얼마나 초라한지 이번에 깨달은 거였다.
그 증거로 시후가 직접 가르쳤다는 태산과 인호, D.M이 있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기에 다들 시후의 말만 기다렸다.
“내일부터 열흘간. 이곳에서 합숙할 생각들 해.”
무슨 말을 꺼낼지 각오는 했지만, 합숙이라는 말에 다들 놀랐다.
개인의 사생활이라는 게 있는데 이렇게 갑자기 합숙이라니.
서로 눈치만 보며 누군가 나서서 한마디 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보다 시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싫으면 계약 해지서에 사인하고 나가.”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시후는 박초연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기 머리를 쥐어뜯는 프로게이머들을 내버려 두고 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