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그인하는 천마님-155화 (155/275)

제155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직접 실력을 보여주고 박초연이 힘을 실어주니 나머지 프로게이머들도 시후의 눈치를 봤다.

태산과 인호의 프로게이머 계약 역시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둘의 계약 내용은 시후의 것과 비슷했다.

프리랜서처럼 자신이 원하는 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거였다.

그렇다고 무조건 회사의 일정을 모두 쳐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후 님과 태산 님과 인호 님은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세 번에 한 번은 꼭 회사가 원하는 일정에 참석하셔야 합니다.”

“알았다니까.”

계약서가 마무리되고 프로게이머들 일까지 처리되자 박초연은 시후를 부르는 호칭을 달리했다.

‘당신’에서 ‘시후 님’으로 바뀌었다.

분명 사회적 지위나 나이나 박초연이 월등히 많은데도 다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되레 시후가 그녀에게 하대하는 모습이 어울려 보이기까지 했다.

“아, 그러고 보니 한 녀석이 더 있다고 했지?”

“네. 오늘 부득이하게 빠지지 못하는 일정이 있어 참석하지 못한 분이 계십니다.”

“그래?”

시후는 박초연의 말에 의문을 가졌다.

지금까지 박초연이 누군가를 높여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박초연과의 관계.

-그를 저녁에 같이 만나볼 수 있는 건가.

시후의 전음에 박초연이 흠칫했다.

“맞나 보군. 이번에는 나오는 게 좋을 거야.”

“…알겠습니다.”

박초연은 낮은 침음성을 흘렸다.

마치 그의 존재를 감추고 싶었는데 들켰다는 자책감이 묻어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박초연은 시후를 다시 봤다.

오만방자하게 능력만 믿고 까부는 자라 생각했는데 자기의 능력을 백분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시후는 시시각각 변하는 박초연의 표정을 봤다.

황 노인이 시조라는 대력공방 18대 방주.

중국에서의 경험으로 보아 그녀가 시후를 찾은 게 그저 프로게이머 계약 때문은 아닐 거였다.

‘그렇다면, 네가 그런 표정을 지을 정도의 그는 누구일까?’

정체를 감추지 못했다는 것을 자책할 만큼 중요한 인물이 누구일지 궁금했다.

일단은 사람들의 인적이 적어지는 늦은 밤에 만나기로 했으니 궁금증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좋아, 그럼. 그때까지는 여러분의 실력 좀 볼까?”

“지, 지금이요?”

“이 시간에?”

“굳이 오늘?”

태산과 인호는 이미 그럴 거라 예상이라도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른 프로게이머 10명은 동시에 수군거렸다.

그렇다고 시후에게 직접적으로 반대를 표방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 시후가 자기들을 훈련할 ‘조교’로 임명받은 것을 들었다.

실력에 딴지를 걸자니 조금 전 닭 볏과 숯검댕이 눈썹과의 대결에서 실력은 충분히 입증됐다.

여기서 실력이 어쩌고저쩌고 딴지를 걸었다가는 당장 PVP 하자고 할 게 뻔했다.

게다가 아까처럼 계약 해지를 걸고 하자고 할 수도 있으니 다들 수군거리며 불만을 토로할 뿐이었다.

시후는 그들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림에도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굳이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지금 당장 모두 접속해 주세요. 그리고 시후 님 친추해 주시고요.”

적절한 때에 조민이 나섰다.

조민은 박초연이 건네준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거기에는 시후를 포함한 프로게이머들의 신상 명세가 적혀 있었다.

“오빠는 저 캡슐, 그 옆은 저, 그 옆으로 태산과 인호 님, D.M 님, 닭 벼… 크흠, 희준 님, 그 옆은 숯 검… 아, 태영님.”

조민은 캡슐 하나하나에 직접 인원을 배정했다.

그러면서 얼굴을 익히는 거였다.

“생각보다 이름이 평범하네.”

덕분에 시후는 닭 볏과 숯검댕이 눈썹의 이름이 희준과 태영인 것을 알았다.

생긴 외모에 어울리는 이름을 가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니 살짝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기 곁으로 다가오는 D.M을 봤다.

D.M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왔다.

나이는 대략 30대 초반 즈음 되었을까.

정장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상당히 말끔해 보이는 외모였다.

“후 님께서 이렇게 젊으신 분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왜, 그래서 한번 엉겨보게?”

“네? 하, 하하. 아닙니다, 제가 감히. 덕분에 계약도 수월하게 했는데요.”

솔직히 현실에서 처음 시후를 본 D.M은 적잖이 놀랐다.

Safety World에서 시후는 누구에게나 하대를 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고등학생의 나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말투를 가졌었다.

지금도 박초연 이사가 시후에게 설설 기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존대하는 일은 없을 거였다.

그런 D.M을 보며 시후는 캡슐로 들어갔다.

아마도 D.M만 저리 생각하는 것은 아닐 터였다.

‘아무래도 좀 보여 줘야겠는데.’

현실에서 무공을 펼쳐 저들을 제압할 수는 없기에 시후는 Safety World에서 실력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고등학생이 아닌 교관으로 보게끔 말이다.

시후는 고글을 쓰면서 내공을 끌어 올려 입을 열었다.

“접속하면 친추해라. 내 닉네임은 ‘천마’다.”

저들의 귓가에 정확히 꽂힐 수 있게 사자후를 펼쳐서 말이다.

그리고 빛이 번쩍이다가 눈부심이 잦아들고 Safety World에 접속되기 전까지 그들의 놀라는 목소리를 들었다.

눈부심이 가시고 주변 풍경이 보이자 시후는 미소를 지었다.

“으흠! 아주 좋아.”

의도대로 되었다.

귓가에 맴돌던 그들의 놀라는 목소리.

드디어 ‘천마’라는 두 글자가 지정한 가치를 보였다.

Safety World에 처음으로 접속하는 유저까지 ‘천마’를 경외시하도록 만들 생각을 했다.

“그렇게 되면 천마 시절 때처럼… 흐, 흐흐.”

천마 시절의 위용을 다시 떨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자네 괜찮나?”

어디선가 시후의 상념을 깨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후는 이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에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저 주변의 칠흑 같은 암흑의 밤하늘도 아름다워 보이는 이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허허… 젊어서 미치면 약도 없다던데.”

“…….”

“부디 곱게 미쳐야 할 터인데.”

“…….”

“저렇게 미치면 내쫓아야 하는 건가….”

“후우, 영감. 진짜 미치는 꼴 봐볼래?”

결국 시후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세상 해맑게 웃고 있는 블칸 영주가 있었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워서 그랬네.”

“영감이 나를 왜 반기지?”

“자네는 내 저주를 해주해 준 은인이 아닌가.”

“아, 여기는 은인을 미치게 하는 게 보답인가?”

“하, 하하. 반가워서 그랬다니까. 생긴 거와는 다르게 뒤끝이 있구만?”

시후는 말장난이 길어지는 것 같아지자 입을 다물었다.

대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역시, 없네.”

“대악마 위리놈을 찾는 거라면 그때 떠났다네.”

블칸 영주는 시후가 무엇을 찾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시후가 다른 곳에서 로그인할 수 있음에도 마지막 로그아웃 장소인 블칸 영주성에서 로그인을 한 이유는 위리놈 때문이었다.

혹시나 만날 수 있을까 싶은 작은 희망에서였다.

만난다고 해도 그때와 같은 결론이 나겠지만 그래도 만나보고 싶었다.

“아쉬워 말게나. 조만간 볼 수 있을 거라 했으니.”

“뭐, 그러지. 그런데 여긴 왜 이래?”

더는 위리놈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 말을 돌리는 시후였다.

시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영주성 담벼락이었다.

일전에 시후가 위리놈과 싸우면서 부숴버린 곳이었다.

“자네가 부수지 않았나.”

“그건 알아.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복구되는 거 아니었나?”

Safety World에서는 유저와 NPC에 의해 부서진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모두 복구가 되었다.

일전에 한스텔 마을 입구의 언덕을 날려버렸을 때 인호에게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게 대악마의 무서운 점이지.”

기껏 말을 돌렸더니 다시 위리놈의 이야기를 꺼내는 블칸 영주였다.

하지만 기본적인 시스템을 역행하는 듯한 내용에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위리놈이 왜?”

“자세히 보면 자네가 부순 곳들은 복구가 되었다네. 하지만 대악마가 부순 곳들은 복구가 되지 않는다네.”

“왜?”

“저길 보게나.”

블칸 영주는 검지를 들어 영주성을 가리켰다.

사람 몇은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뚫린 곳이었다.

“저건…?”

시후는 그것이 위리놈을 날려버리다 생긴 곳임을 기억해 냈다.

“저곳의 테두리를 보게나.”

“테두리? 어?! 저거 뭐야?”

블칸 영주의 말에 안력을 돋우니 무언가 보였다.

검게 일렁이는 연기가 구멍 테두리에 감돌고 있었다.

“대악마가 힘을 쓰기 시작하면 저런 흔적이 남는다네. 저 흔적을 지워야 복구가 되는 것인데, 그 흔적을 지우려면 적어도 5서클 마법사는 있어야 하네.”

“그 마법사가 없어서 이렇게 방치하고 있다는 거야?”

“마법사는 있네. 아직 잠들어 있을 뿐이지.”

“그럼, 깨워… 아!”

시후는 그제야 블칸 영주가 자신을 반긴 진짜 이유를 알아챘다.

블칸 영주는 확실히 능구렁이 같은 영감이었다.

처음부터 ‘도와주게’라고 말했다면 시후는 대가를 요구했을 거였다.

Safety World에서 NPC의 도와달라는 말은 퀘스트였으니 말이다.

같은 일을 한다면 당연히 보상이 큰 것이 이익이었기에 시후는 언제나 딜을 했었다.

그런데 블칸 영주는 위리놈과의 일을 거론하며 시후의 감정을 건드렸다.

조금이나마 미안한 마음이 들도록 말이다.

그 결과 보상을 거론할 사이도 없이 눈앞에 퀘스트가 나타났다.

띠링-

[블칸 영주성 침략 퀘스트 성공률 70% 달성.]

[스페셜 히든 퀘스트의 성공률이 50%가 넘었으므로 유예 기간을 갖습니다.]

[남은 시간 : 01:25:06]

[2. 블칸 영주성에 감금된 공주를 구하라. 0/1]

어찌 된 것인지 모르지만 일전의 스페셜 히든 퀘스트는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분명 실패했다고 생각했는데?”

“대악마 위리놈이 자네를 인정한 것 같더군.”

“아, 그래서 귀족 후원 퀘스트가 클리어되었다?”

시후는 스테이터스 창을 열어 커뮤니티를 뒤졌다.

스페셜 히든 퀘스트에 지금과 같은 사례가 있는지 찾는 거였다.

‘없네. 그럼 내가 최초라는 건가.’

최초라는 단어가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다만 여전히 부족한 정보가 신경 쓰였다.

예의 그 감각이 지금 섣부르게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봐.”

“시간이 얼마 없을 텐데 우선 공주부터 구하고….”

“알았어. 보채기는… 보챙이야?”

“응? 그게 무슨 말인가?”

“아, 몰라. 탑골 개그도 모르는 주제에. 기다려.”

요즘 부쩍 탑골 개그 너튜브를 자주 본 시후였다.

덕분에 블칸 영주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의문을 표했다.

그사이 시후는 조민에게 귓말을 보냈다.

-어디?

-저희는 한스텔 마을이요.

조민도 이번에 같이 접속했다.

프로게이머들의 전반적인 성향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일러주지 않아도 알아서 그들을 알아서 모아 놨다.

-다중 이동 스크롤 쓸 테니까 모여 있어.

-네. 준비되었어요.

시후는 인벤토리에서 다중 이동 스크롤을 사용했다.

그러자 눈앞에 빛이 번쩍이며 무리가 나타났다.

“여긴 어디입니까, 유라 님?”

“유라 님? 여기 처음 보는 곳인데요?”

“유라 님?!”

다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민을 찾았다.

그런데 어째 그 모습이 냉혈미녀 유라의 팬클럽처럼 보였다.

프로게이머들은 조민을 중심으로 뭉쳐 시후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박초연이 말한 게 저런 거였어?”

조민과 매니저 계약을 할 때 박초연이 유라를 언급했었다.

유라라면 프로게이머들이 따를 거라는 말.

현실에서 실물을 봤음에도 저리 치근덕거리는 모습이라니.

“한심하군.”

“저 어중이떠중이들은 무엇인가?”

시후의 말에 동조하듯 블칸 영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네 같은 인물 곁에 저런 녀석들이 붙어 있다니. 허, 허허. 고단하겠어.”

“그러게. 고생길이 열리는 것 같아 슬슬 짜증이 나네?”

“자네 마음 충분히 이해하네. 저런 녀석들은 굴리고 또 굴려야 쓸 만해질 텐데…. 자네가 고생이겠어.”

어째서인지 시후보다 블칸 영주가 더 못마땅해하는 눈치였다.

그 모습에 시후는 슬쩍 독안공을 펼쳤다.

종족 : 인간(T.NPC)

직위 : 백작/영주

직업 : 기사

<재능은 있으나 노력하지 않은 자들을 혐오함.>

<눈앞에 유저들을 손보고 싶어 근질거려함.>

독안공을 통해 블칸 영주의 심리 상태를 읽을 수 있었다.

그 순간 시후의 눈이 번뜩였다.

“영감, 우리 딜 한번 할까?”

“딜? 공주를 구해주면 자네 퀘스트는 끝나는 거 아닌가?”

“그렇게는 한데. 내가 저번에 위리놈에게 맞은 곳이 아직도 쑤셔서 그러는데 말이야….”

시후는 아프지도 않은 배를 움켜쥐었다.

누가 봐도 어쭙잖은 연기였지만 블칸 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대악마와 겨뤘으니 후유증이 남지 않는 게 이상한 것이지.”

“그래서 말인데. 쟤들, 테스트 좀 해줄래?”

“테스트?”

“응. 영감도 속박에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몸 좀 풀어야 하잖아.”

“핑계가 좋기는 하다만. 내게 돌아오는 것은 무엇이지?”

“저거. 없애주지.”

시후는 검은 연기가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담벼락을 가리켰다.

그에 블칸 영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네 마법사였나?”

“아니. 그건 아닌데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어쨌든 콜?”

시후는 블칸 영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블칸 영주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잡았다.

“콜. 하지만 테스트가 쉽지는 않을 거야.”

“내가 바라는 게 그거야.”

시후는 공주를 구하러 가는 사이 자기 대신에 블칸 영주에게 테스트를 시킬 생각이었다.

테스트 영상이나 평가는 조민에게 맡기면 되니 시간을 절약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후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블칸 영주성에 꼭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을 말이다.

“그럼, 내 마음대로 테스트해 보겠네. 크흠!”

의지를 다지는 블칸 영주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어두운 밤에도 뚜렷이 보이는 붉은색의 모자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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