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김철수는 갑자기 벌어진 참상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조민이 박초연을 덮쳤다.
그것도 들고 있던 펜으로 말이다.
펜촉은 이미 박초연의 목에 상당히 찔러진 상태였다.
여기서 힘을 조금만 더 주면 당장이라도 피가 보일 것 같았다.
김철수는 조민이 어찌 움직였는지도 보지 못했다.
그녀의 몸이 흔들리자 사라졌고 순식간에 박초연의 뒤에 나타났다.
그러고는 박초연의 얼굴을 뒤에서 감더니 목에 펜을 댔다.
조금 전까지 잉크가 흐르던 펜 끝에는 서서히 박초연의 붉은 피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조민이 힘을 주기 시작한 거였다.
“그, 그만!”
김철수는 벌떡 일어나 조민을 끌어내려고 했다.
그런데.
“뭐, 뭐지? 몸, 몸이 움직이지 않아.”
어떻게 된 것인지 몸의 자유를 잃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 쥐인 듯.
그리고 무거워지는 눈꺼풀과 수마에 잠에 빠져들었다.
시후가 지풍을 날려 수혈을 짚은 거였다.
“아직은, 좀 더 내 사람이 된 후에 알려줘도 될 테니까.”
시후는 무림에 대해 김철수에게 알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사람이란 자고로 자기가 봐온 것들을 중심으로 세상을 본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봤을 하늘을 날고 발걸음 하나로 땅을 가르는 무공을 직접 본다고 쉽게 믿지 않을 거라는 거였다.
그러니 시후는 김철수에게 천천히, 아주 조금씩 무공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러니 저자는 좀 자게 두고. 너는 나랑 이야기 좀 해볼까?”
이제는 박초연에게 하대하는 시후였다.
박초연은 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흠칫하며 허리를 꼿꼿이 폈다.
“무, 무슨 짓입니까?”
“내 방식으로 대화의 장을 연 것이니, 고깝게 생각지 말고.”
“굳이 이러지 않으셔도 대화는 할 수 있습니다만.”
“그래, 일반인이라면 말이지.”
푹푹-
시후는 검지를 들어 지풍을 날렸다.
그러자 박초연의 두꺼운 안경의 다리가 부러졌다.
툭-
움직이지 못하니 흘러내리는 안경을 잡을 수 없었다.
얼굴의 반을 가리던 두꺼운 안경 속에 감추어져 있던 박초연의 눈.
일반적인 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왼쪽과는 다르게 오른쪽 눈은 저녁노을을 수놓은 하늘처럼 노란색이었다.
‘황 노인의 눈이다.’
시후가 아는 가장 최고의 장인. 대력거인(大力巨人) 황철력(黃鐵力).
천마 시절 칠척장신인 황 노인의 눈이 딱 저랬다.
시후는 초록창 앱에서 박초연의 그 눈을 봤다.
그래서 조민에게 그녀가 무림인임을 알렸고 그녀를 구속하라고 전음을 보냈다.
“너무 시기가 적절하단 말이지.”
“그렇게 두서없이 말씀하시면 제가 알아듣지 못합니다.”
“알아듣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좋은 꼴을 못 볼 테니까.”
박초연은 시후의 질문에 의연한 모습을 보였지만 내심 놀라고 있었다.
지풍을 날려 안경다리를 순식간에 부순 점하며 자기 목에 펜을 찌르고 있는 조민의 움직임하며.
이 장면을 대수롭지 않게 쳐다보고 있는 이 방의 사람들의 시선까지.
이들 모두가 무림인이라는 방증이었다.
시후는 박초연이 눈을 굴려 주변 상황을 파악하는 것을 기다려줬다.
“자, 질문 하나. 너는 황철력과 무슨 관계지?”
“저희 선조이십니다.”
“내가 묻는 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터인데?”
“크윽.”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시후의 말에 조민이 펜을 더욱 찔러 넣었다.
그러자 박초연이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콩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저는 대력공방(大力工房)의 18대 방주입니다.”
“좋아, 그럼 질문 둘. 왜 네가 기계라면 미친 듯이 달려드는 공로(工老)의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시후는 검지를 들어 박초연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구릿빛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박초연은 두 눈을 부릅뜰 정도로 놀랐다.
대력공방의 일대 조사님을 아는 것도 놀라운데 브로치의 정체까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한편 시후는 박초연이 놀라는 순간 독안공을 펼쳤다.
이미 독안공을 막는 안경은 사라졌으니 쉽게 속내를 읽을 심산이었다.
그러고는.
“허? 노친네들이 미쳤었나?”
시후는 대뜸 두 노인을 욕했다.
두 노인이란 황 노인과 공로를 말함이었다.
한 명은 정파의 기둥이라 불리던 무림 오절인 공로.
다른 한 명은 정파라면 죽도록 싫어하는 황 노인.
“그런 둘이 왜?”
시후는 미간을 좁힐 정도로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두서없는 시후의 말에 박초연이 대답했다.
“당신이 두 분을 어찌 아시는지 알 수 없지만 선대 어르신들께서는 서로를 사랑하셨다 하셨습니다.”
“…미친.”
그랬다.
개방 거지 늙은이와 함께 만났던 기계에 미친 공로는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 공로를 황 노인이 사랑했다는 말이었다.
여기서 시후는 아주 합당한 의문이 들었다.
“둘이 맺어졌다고 해서 결실이 생길 수는 없을 텐데?”
천마 시절 둘을 마지막에 봤을 때 두 사람은 이미 머리가 하얗게 셀 정도의 나이였다.
아무리 무공을 익혔다 하지만 자연의 섭리에 역행할 만큼 신체를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반로환동을 하지 않는다면… 설마?!”
“네. 선대 할머님께서는 반로환동을 하셨었습니다.”
“허?!”
여기까지만 들어도 시후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공로가 반로환동하여 신체 나이를 되돌리니 임신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황 노인과 결실을 보았다.
그리고 그 후인이 박초연이라는 거였다.
“그런데 너는 왜 박씨냐?”
“그 이야기를 하자면 저의 출생의 비밀부터 시작해야 합니다만….”
박초연은 주위를 힐끗거렸다.
주변에 듣는 귀가 많다는 뜻이었다.
시후는 굳이 박초연의 출생의 비밀까지 이곳에 있는 이들과 공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좋아, 그럼. 가는 동안 듣기로 하지.”
스윽-
시후가 손짓하자 조민이 박초연의 목에서 펜을 떼며 떨어졌다.
“S.W SOFT로 갈 거니까, 차 좀 준비해줄래?”
“1층에 차를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세 분이 한 차에 타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시후의 의도를 알았기에 제갈상민이 빠르게 대답하며 준비했다.
그러면서도 제갈조민을 시후 곁에 붙이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시후는 제갈조민 정도라면 이 이야기를 들어도 되겠다는 생각에 허락했다.
“그럼 내려갈까? 프로게이머라는 녀석들을 만나러 가야지?”
“안내하겠습니다.”
박초연은 부러진 안경을 품속에 갈무리하고는 손수건을 꺼내 목에 흐른 피를 닦았다.
시후가 사람들의 귀가 적은 차에서 이야기하자는 뜻을 알기에 순순히 따르는 거였다.
잠들어 있는 김철수는 무테안경을 쓴 직원이 따로 챙겼다.
그렇게 모두가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조민이 시후에게 전음을 보냈다.
-괜찮은 거예요?
제압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박초연을 저렇게 방치해도 되냐는 말이었다.
시후는 그런 조민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굳이 입을 열었다.
“괜찮아. 그럴 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혹여나 쓸데없는 짓을 하면 바로 목을 날려버리면 되니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저도 당신에게 듣고 싶은 것이 있으니까요.”
시후의 살기 어린 말에도 박초연은 의연하게 대답했다.
시후도 그렇고 박초연도 그렇고 이미 조민이 모르는 무언가를 아는 눈치였다.
어차피 차에 타면 둘이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될 것이기에 조민 역시 입을 닫았다.
1층에 내려 밖으로 나가니 제갈상민이 준비한 검은색 밴 세 대가 있었다.
“김철수 씨는 저희와 함께 뒤 차로 이동하겠습니다. 도련님께서는 저 차를 타시면 됩니다.”
제갈상민은 호위라는 목적으로 가운데 차를 시후에게 안내했다.
시후를 따라 조민과 박초연이 차에 올랐다.
“이 차는 전파 방해 및….”
툭툭-
조민이 운전석 뒤를 막은 유리를 두드렸다.
“방음 효과가 있는 차이니 마음 놓고 대화하셔도 돼요.”
전파 방해가 걸려 있으니 도청 장치는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솔직히 시후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제갈세가는 이제 자기 사람들.
‘앞으로 함께 걸어가는 길에 이만한 정보는 저들도 알아야지.’
그들에게도 박초연이 누구인지는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차가 출발하자 박초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입양압니다.”
갑자기 아침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단어에 시후가 눈을 껌뻑였다.
“네게 있는 것들이 그들의 핏줄임을 증명하는데 입양이라고?”
“네. 저는 박씨 가문에 입양된 후 성인이 되는 날. 저의 본 신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초연의 아침 드라마는 이러했다.
선대에서부터 내려오는 대력공방의 특별한 관습.
아이가 태어나 첫돌이 지나면 다른 곳으로 입양을 보낸다는 거였다.
부모의 얼굴을 기억하기 전에 대력공방에서 운영하는 입양 센터를 통해 적당한 곳으로 말이다.
첫돌이 지난 아기를 입양 보낸다는 것도 놀라웠는데 그 이유가 더 놀라웠다.
“대력공방은 핏줄의 힘을 강하게 믿습니다. 어디에 있든 그 가문에서 가장 큰 자리에 오를 거라는 믿음. 그래서 그 아이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성인이 되는 날 찾아와 정체를 알려줍니다.”
“하? 아이를 입양 보내 쓸 만한 곳을 먹는다?”
“네. 그 결과 한국뿐 아니라 일본, 중국, 미국 각지에 대력공방의 연줄이 생겼습니다.”
황 노인의 세월부터 이런 것이라면 천년의 세월 동안 대력공방이 일을 벌였다는 말이었다.
시후는 천마 시절 황 노인의 성격을 되새겨봤다.
우직한 성격이었지만 그는 사람을 좋아하는 노인이었다.
농부를 위한 곡괭이를 만들 때나 무인을 위한 검을 만들 때나 그것을 쓰는 사람을 보고 물건을 만드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사람을, 그것도 아기를 이용해 세력을 키웠다니.
“믿기 힘든데.”
“당신이 선조님을 어찌 아는지 모르지만, 그 표정을 보니 그분은 절대 그리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이런 일을 벌이신 것은 그의 부인이셨습니다.”
“아….”
박초연의 말에 시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 노인과는 다르게 공로는 사람의 생과 사를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녀가 중요히 여기던 것은 의(義)와 협(俠).
그것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식의 목도 직접 베어버렸던 여협(女俠)이었다.
시후는 생각을 정리할수록 하나하나 맞아 들어가는 퍼즐을 보고 있었다.
법정의 흔적을 시작으로 마천서생과 황 노인의 안배를 찾은 것.
그 후 자신을 찾아온 대력공방의 방주라는 박초연.
천 년의 안배 모두가 자신의 힘을 키우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마치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고 이 일을 해결하는 데 집중하라는 듯이 말이지.’
설마 저잣거리에서 놀기 좋아하던 천마의 성향을 걱정해서 이리 하지는 않았을 거였다.
도대체 혈교 뒤에 있는 녀석들이 어느 정도이기에 이런 안배를 남겨 놓은 것인지.
“점점 궁금해지네.”
흥미가 돋았다.
조민은 시후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에 흠칫했다.
저 표정은 시후가 무슨 짓을 저지를 때 짓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 뒷수습은 자신의 몫이었다.
조민은 입술을 악물었다.
시후와 박초연의 대화를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하려는 모습이었다.
박초연은 그런 조민을 힐끗하고는 입을 열었다.
“이제 제 질문에 답해주실 차례입니다.”
“그건 저녁 이벤트가 끝나고 함께 가는 것으로 하지.”
“네?”
박초연은 시후가 은연중에 내뱉은 ‘신이라도 들어오지 못할 곳’.
그것에 대한 단서를 잡으려는 거였다.
그런데 단서를 알려주는 게 아니라 같이 가자고 하니 당황스러웠다.
그러는 사이 밴은 어느덧 S.W SOFT 주차장에 들어섰다.
밴이 멈추고 문이 열리자 시후가 먼저 내렸다.
“어차피 거기는 밤이 되어야 가는 곳이야. 그러니 그때까지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겠지?”
해야 할 일은 후딱 끝내고 본래 일을 보자는 말이었다.
박초연은 당장 궁금해 미칠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이 시후를 따랐다.
“이미 다들 모여 있어요.”
“역시 준비성 좋고.”
J.K 제약회사에서 밴에 타기 전에 박초연은 이미 본사에 연락을 해놓은 상태였다.
올 수 있는 사람은 본사에 오고 그러지 못하는 사람은 Safety World에 접속하라고 말이다.
프로게이머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은 캡슐이 준비된 3층 연구실이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박초연이 3층을 눌렀다.
시후는 그런 박초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확히는 박초연의 가슴 쪽을 말이다.
“오빠!”
그 시선을 읽은 조민이 시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박초연도 그제야 시후의 시선을 느꼈는지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시후에게 눈을 흘겼다.
그런 둘의 반응에 시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들을 하는 거야?”
“그러는 오빠는요?”
“너는 가끔 보면 나를 무슨 색마로 보는 것 같다?”
“그럼 아니에요? 지금 빤히 저 언니… 봤잖아요!”
언제 봤다고 벌써 언니라고 부르는지.
이제 시후라는 한배를 타게 되었으니 친해지려는 조민의 수읽기였다.
시후는 조민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박초연의 눈치를 보니 그녀도 자기를 치한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쯧. 이 오빠는 말이다. 공과 사가 아주 분명한 사람이야.”
“오빠가요?”
“그래. 그리고 지금은 엄청 공적인 시간이고.”
“그런 공적인 시간에 왜 여자 몸매를 훔쳐보시나요?”
“내가 본 것은 저 여자 가슴이 아니라 저 브로치야.”
그 말에 둘은 박초연의 가슴에 달린 나팔꽃 모양의 구릿빛 브로치를 봤다.
때마침 3층에 다다랐는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시후가 먼저 내렸다.
“그거 이따가 꼭 챙겨와라. 아주 중요한 물건이니까.”
그리 말한 시후는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