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PVP 영상의 시작점은 D.M이 바닥에 머리를 박는 장면부터였다.
“저 유저는 D.M이 아닙니까? 이번에 계약하기로 한 암살 계열 유저 맞지요?”
박진수도 D.M을 알고 있었다.
박철이 계약하기로 한 프로게이머가 고레벨 암살계 직업의 유저라는 정보를 이미 입수했었다.
그리고 그의 플레이 영상도 봤었다.
그는 어렵기로 소문난 암살 계열 퀘스트들을 척척 클리어했다.
특히, 암살 계열 직업이면서도 보스 몬스터와의 일대일 전투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박진수도 Safety World를 해봤기에 D.M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왜 저러고 있습니까?”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박진수의 질문에 박초연은 동영상을 가리켰다.
닥치고 저거나 보라는 거였다.
때마침 D.M이 자리에서 일어나 본격적으로 PVP 하는 장면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채 2분이 되지 않는 동영상이 끝나자 회의실은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박초연이었다.
“보면 아시겠지만, 저 유저는 D.M을 그냥 상대한 게 아닙니다.”
박초연은 동영상을 뒤로 돌려 공수가 한 번 끝났을 때로 되돌린 다음 다시 재생했다.
“여기. 저 유저가 무어라 말하고 있습니다. 아직 Test PVP 시스템이기에 음성 지원을 넣지 않았지만.”
박초연은 컴퓨터를 조작하여 다른 프로그램을 대입했다.
“입술의 움직임을 이 프로그램에 대입하면.”
삑-
[허와 실을 섞을 때는 허에도 살기를 실어야 하는 법.]
화면에 자막이 나타났다.
“그가 D.M에게 훈수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임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초연은 그들의 반응을 한 번 훑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D.M의 다음 공격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D.M이 분신 거울 스킬을 사용한 공격 영상이 끝났다.
그러자 이번에도 좀 전과 같이 프로그램을 대입했다.
“두 번째도 그는 훈수를 둡니다.”
“허, 허….”
이번에는 임원들 입에서 탄신이 흘러나왔다.
박초연은 동영상을 멈추고 임원들을 돌아봤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아시겠죠?”
다소 건방진 말투였지만 그 말에 화를 내는 임원은 없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그저 나이나 배경으로 임원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박진수는 인상을 구기며 박철을 봤다.
“저런 사람을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D.M을 저 정도로 우위를 점하며 상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에 맞는 조언까지 한다니.
유저로서의 실력과 코칭 능력까지 갖추었다는 말이었다.
왜 저런 인재가 박철의 눈에 띄었을까 싶을 정도로 탐이 났다.
“제가 인복이 좀 있잖습니까.”
비아냥거리는 말일 수도 있었지만, 사실이었기에 박진수는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박철이 인복이 있다는 말은 진짜 사실이었다.
박철은 ‘트레이드 박’으로 불릴 정도로 인재를 발굴해 자기 소속에 두는 수완이 좋은 남자였다.
회사 설립 때부터 함께했던 엔지니어인 박초연 또한 박철이 끌어들인 거였다.
박진수는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열었다.
“쩝.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렇다고 저자의 요구 조건을 모두 들어줘야 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박진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박초연이 스크린에 그 요구 조건을 띄웠다.
[요구 조건]
[1. 훈련 시간은 본인이 지정한 시간에 이루어진다.]
[2. 훈련 방식은 본인이 정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3. 경기 참여 레벨의 제한을 삭제한다.]
그것을 본 박진수가 손가락질했다.
“특히, 저 세 번째! 저희가 레벨 제한을 왜 뒀는데, 그것을 삭제해달라는 게 말이나 됩니까?”
S.W SOFT는 월드 오브 리그전을 준비하면서 각국에서 참여할 선수들의 레벨에 제한을 뒀다.
당연히 각국을 대표하는 이들이 참석할 것이니 그들의 레벨은 고레벨이라는 생각에서였다.
[Lv. 300 이하 참여 불가]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줄이자는 취지에서 붙은 조항이었다.
그런데 시후는 그것을 삭제하자는 거였다.
그렇게 되면 벌어지는 여파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었다.
“어중이떠중이들까지 붙어야 하는 상황이 오는 거 아닙니까. 그런 시간 낭비가 어디 있습니까?”
박진수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반박은 이미 시후가 전달해 놓은 상태였다.
박철은 자기 앞에 놓인 스마트폰의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김철수가 보낸 메시지.
박철이 시후의 조건을 들어주겠다고 생각을 바꾸게 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말할 타이밍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금 잡았다.
“Safety World가 생긴 지 이제 3년입니다. 그 짧은 시간에 저희가 이만한 성장을 이룬 게 무엇 때문이라 생각하십니까.”
“……”
다들 박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박철은 장내를 한 번 훑고는 말을 이었다.
“재미가 있어서 아닙니까. 현실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직접 경험해보는 듯한 재미. 그것 때문에 저희가 이만한 성장을 이룬 것입니다.”
“누가 그것을 모릅니까. 그런데 그것과 이것이 무슨 상관이라고….”
“상관이 있지요. 월드 오브 리그전. 전 세계가 열광하게 할 이벤트 아닙니까. 그렇다면 모두가 참여하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네?”
“새로 만든 PVP 시스템. 평소라면 저레벨 유저가 감히 한 번도 싸워보지 못할 고레벨 유저들과의 PVP. 아이템 없이 자신의 스텟과 스킬, 그리고 컨트롤 실력으로만 싸워야 하는 그 재미.”
“……”
“전 세계 인구가 열광할 만한 요소가 충분하지 않습니까?”
박철의 말이 끝나자 다들 고민에 빠진 표정들이었다.
박진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당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리된다면 월드 오브 리그전은 그야말로 대성공일 터였다.
알아서 광고 효과가 일어날 테고, 새로운 유저의 유입은 떼놓은 당상일 터였다.
“허? 저 사람이 그것까지 생각하고 그 조건을 제시했다는 겁니까?”
박진수는 이런 놀라운 제안을 한 시후를 가리켰다.
그 말에 박철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는 자기 레벨 때문에 그 조건을 제시한 것 같습니다.”
“본인 레벨이요?”
“저 유저 레벨이 아직 Lv. 199라고 합니다.”
“……! 뭐라고요?!!”
지금까지 중에 가장 크게 놀란 박진수였다.
그가 어버버하며 무언가를 말하려 하자 지금까지 듣고만 있던 박초연이 먼저 나섰다.
“저 사람, 제가 만나봐도 될까요?”
박초연은 두꺼운 안경 안으로 활활 타오르는 눈빛을 보였다.
박철은 당연히 그녀가 그럴 거라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김철수는 박철에게 걸려 온 전화를 들고 그대로 굳었다.
“그, 그게 가능한 겁니까?”
박철이 한 이야기들은 시후의 조건을 모두 들어준다는 거였다.
아무리 규정이 확립되기 전이라지만 세계적인 프로젝트의 규정을 바꿨다.
그것도 고작 18세의 소년이 말이다.
김철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통화를 종료하자 시후가 방긋 웃었다.
“일이 잘 풀렸나 보네요?”
“아, 네…. 이게 잘 풀렸다고 해야 할지. 허, 거참. 저로서는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쉽게 생각하세요. 저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그게 무슨….”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김철수에게 시후는 검지를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제 동료들에게 제가 자주 하는 말이에요. 동료들도 지금 그 표정을 자주 짓거든요.”
“그럼, 그때마다 그 말씀을 하신다는 겁니까?”
“네. 사실이기도 하고요.”
“아, 네….”
김철수는 시후가 상당히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마치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김철수가 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면 시후는 김철수의 능력을 더욱 높이 샀을 거였다.
개인의 심리 상태까지 파악할 줄 안다며 말이다.
시후는 드디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자 즐거웠다.
이제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되기에 무테안경을 쓴 직원을 쳐다봤다.
“그럼, 저희가 제시한 조건을 추가하여 계약을 진행하시겠습니까?”
“네. 당연합니다.”
“그럼, 계약서를 다시 작성하셔서 오시면 그때….”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계약서가 도착할 것 같습니다.”
계약 일정을 다시 잡으려는데 김철수가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이미 계약서 작성이 끝나서 S.W SOFT에서 담당자가 이리로 오고 있다고 말이다.
그 말에 무테안경을 쓴 직원이 시후를 돌아봤다.
어찌할까 묻는 거였다.
“뭐, 이렇게까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시는데 좀 기다려 드리지.”
“네. 그럼 차를 다시 내오겠습니다.”
잠시 후 무테안경을 쓴 직원의 지시로 용정차가 다시 내왔다.
여전히 녹차 맛 따위는 알지 못하는 김철수는 그저 향만 맡고 있었다.
그렇게 계약서를 기다리는 정적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제갈상민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정신이 딴 데 팔린 것 같았고 김철수는 계약서가 오고 나서야 할 말이 있는 듯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시후는 그런 둘을 힐끗거리고는 찻잔을 들었다.
천마 시절부터 이런 정적은 죽을 만큼 싫었다.
그랬기에 언제나 저잣거리를 쏘다닌 것일 수도 있었다.
“용정차 향이 참 좋지요?”
“네? 아, 네.”
다분히 할 말이 있다며 운을 띄우는 시후였다.
그에 제갈상민과 김철수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분께 건의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어떤 것을요?”
“제가 상당히 똑똑한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습니다.”
“아, 네. 그런데요?”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제가 그쪽 회사와 계약하면서 추가로 그 사람도 추천하고 싶은데요.”
“네?”
추천이라니.
김철수는 지금 시후가 프로게이머 청탁이라도 하는 것인지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시후의 말은 전혀 다른 거였다.
“저희 팀 매니저를 맡기고 싶습니다.”
“매니…저요?”
“이미 그쪽 회사에서 계약을 진행한 프로게이머들이 상당할 거라 생각합니다.”
“네. 그렇기는 합니다.”
사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솔직히 시후와 D.M이 마지막 계약자였다.
이들을 포함해 S.W SOFT와 계약한 프로게이머는 12명.
월드 오브 리그전에 참전할 수 있는 선수단 인원인 24명의 절반에 달하는 인원이었다.
S.W SOFT는 자기 회사 소속 프로게이머 12명 전원이 대표팀에 발탁되는 것이 목표였다.
이 사실은 계약서가 오면 말할 내용이었다.
“제가 그들 모두를 직접 교육은 할 겁니다. 하지만 추가적인 훈련에 대한 예습과 복습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예습과 복습이라니.
도대체 훈련을 어떻게 얼마나 시키려고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일을 도와줄 수 있는 시스템은 이미 S.W SOFT에 있었다.
“그런 것이라면 S.W SOFT에서도 이미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것도 체계적으로 말이다.
프로게이머 1세대에서 이름을 날려 현재 E-스포츠에서 감독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임여한과 계약해 놓은 상태였다.
시후는 준비를 해 놓았다는 김철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제 방식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니 그거야….”
“우승하시기 원한다면서요. 그럼 제 말을 따르시죠.”
막무가내도 이런 막무가내가 없었다.
이번 사항도 도저히 김철수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행히 지금 이곳으로 오는 사람이라면 이 문제에 대해 논의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기에 김철수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지금 오시는 분과 이야기를 나누시는 게 더 빠르실 듯싶습니다.”
“잘되었네요. 마침 오신 듯하니까요.”
지잉-
시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캡슐방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들어온 사람은 한눈에 봐도 전력을 다해 달려온 모습의 박초연이었다.
“헉, 헉헉. 안녕… 헉. 헉헉. 하세요. 헉, 헉헉.”
박초연은 인사 반, 헐떡임 반으로 첫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이리 앉으시죠.”
시후는 박초연을 김철수 옆으로 안내했다.
그러면서 박초연을 살폈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는 방금 달려왔다고 저리된 것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틀은 머리를 감지 않아야 저리될 것 같았다.
그리고 안경은 어찌나 두껍고 큰지 주먹만 한 박초연의 얼굴 반을 가렸다.
딱히 격식을 중요시하는 시후는 아니었지만 이런 자리에 멜빵바지를 입고 온 그녀에게 시후는 흥미가 일었다.
“반갑습니다. 강시후입니다.”
“헉, 헉. 박초연입니다.”
시후가 먼저 손을 내밀자 박초연이 맞잡았다.
그 순간 시후의 눈이 부릅떠졌다.
박초연의 손을 타고 느껴지는 것은 분명 기(氣)였다.
흥미에 흥미가 더해졌다.
시후는 박초연의 손을 놓으며 옆에 앉아 있는 제갈상민을 봤다.
“조민 좀 불러주겠나?”
“조민은 왜….”
“조금 전에 말한 사람이 조민이니까 그러지. 당사가 있어야 제대로 이야기할 것 아닌가.”
시후의 말에 제갈상민은 빠르게 스마트폰을 들었다.
지금까지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것의 활로를 찾은 것 같았다.
당가에 대항할 대항마를 말이다.
시후는 제갈상민이 조민에게 연락하는 사이 다시 박초연을 봤다.
“그럼, 마저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뜻하지 않은 탐색전의 시작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