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시후는 착의 기술로 잡은 단검 네 자루를 D.M에게 돌려줬다.
“그간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아, 네….”
시후의 칭찬에도 D.M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저 이 허탈한 결과를 되짚고 또 되짚었다.
왜 자신의 최고 기술이라 할 수 있는 유성비음검이 저리된 것인지.
왜 껌딱지처럼 시후의 검에 착 붙어 있는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런 D.M의 눈앞에 시후가 친절히 검을 들이밀었다.
그제야 D.M이 단검을 받아 들었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뭘?”
“방금 그거요.”
“뭐가.”
시후는 D.M의 질문에 모른 채로 일관했다.
자신에게 덤볐다는 것에 대한 보복이 아니었다.
기분이 좋아서 조금 골려줄 생각이었다.
‘키울 맛이 있는 놈이야.’
시후의 객관적인 평가였다.
아라크네 퀘스트를 하러 갈 때는 그 생각까지는 못 했었다.
그런데 조금 전 비천잠행술을 펼칠 때 솔직히 놀랐다.
‘어설프게 뒤치기만 하지 않았다면 살짝 늦을 뻔했어.’
단순하게 D.M이 시후의 등 뒤를 노리지 않고 발밑이나 백회혈을 노렸다면 시후는 몸을 날려 피했을 거였다.
그런 생각에 살짝 조언했다.
허와 실을 섞으라고.
‘그랬더니 분신술을 써?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야.’
응용력이 뛰어났다.
아직 완벽한 분신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재주를 부려야 피할 정도는 되었다.
그것에 즐거워 다시 한번 조언했다.
공격 방식을 달리하라고.
‘그랬더니 만천화우와 같은 단검 던지기를 해? 그것도 음공까지 섞어서?’
단검이 고막을 울리는 순간 시후는 몸에 이상을 느꼈다.
거리감 상실.
D.M과 떨어진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순간적으로 거리감을 잃었다.
싸움에 있어서 거리감이 얼마나 중요한가.
고수의 싸움일수록 단 1mm의 격차로 승부가 가려지는 법.
하지만 시후는 잃어버린 거리감에 연연하지 않았다.
거리감 따위는 무시할 무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화접목의 묘리를 가득 담은 무당파의 태극혜검(太極慧劍).
천마 시절 무당파의 장삼봉과 겨루며 얻은 거였다.
그랬기에 시후는 D.M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는 거였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칭찬 한마디 더 해주고 싶었다.
D.M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넋을 잃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
“그 멍청한 표정을 지우면 가르쳐주마.”
“진짜요?”
“그래. 배우는 길이 고단하겠지만 너 정도 되는 녀석이라면…!”
“감사합니다!”
덥석-
D.M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후의 손을 두 손으로 꼬옥 잡았다.
설마 남자 녀석이 손을 잡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시후는 피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슬쩍 빼려고 하니 더욱더 강하게 움켜쥐는 것 같았다.
“놔라. 남자랑 손잡는 거 취미 없다.”
“저도 없습니다.”
“그런 말은 이 손을 놓고 하는 거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후 님께서 가르쳐 주신다면 저는 지옥에까지 가서라도 배울 겁니다!”
“알았으니 손 좀… 놓으라고!”
탁-
시후는 살짝 내공을 흘려 넣고서야 손을 빼낼 수 있었다.
그만큼 D.M의 의지가 대단했다.
‘이 녀석이 이렇게 배움의 의지가 강한 녀석이었나?’
아라크네 퀘스트를 할 때만 해도 이러진 않았던 것 같은데, 자신이 D.M을 잘못 본 건가 싶었다.
시후는 모르겠지만 D.M에게 시후는 인생의 전환점을 준 은인이었다.
만약 시후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직도 헤라 왕국에서 상인들 삥이나 뜯고 다녔을 터였다.
사회에서 딱히 인정받지 못하던 자신이 이제는 프로게이머 계약을 앞둔 상황이니 시후를 은인으로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그랬기에 D.M은 다시 한번 불타올랐다.
자신은 강해질 수 있다며.
지금 자신의 모든 역량을 내비쳤음에도 눈앞에 존재에게는 새 발의 피였다.
그런 이에게 다시 한번 배울 수 있다면.
프로게이머로서 더욱더 높은 곳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뭐가 되었든 시후는 D.M이 의지를 불태우자 즐거웠다.
가르칠 재미가 있는 놈이 배움의 의욕까지 활활 불태우니 절로 흥이 났다.
“좋았어. 조만간 현실에서 한번 보자.”
“네?”
“너 S.W SOFT 프로게이머라며.”
“아. 아직 계약서에 사인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설마?”
“그래. 나도 조만간 계약할 것 같다. 그리고 너도 계약하게 될 거야.”
“정말요?”
“그래.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조만간 보자.”
“네! 알겠습니다!”
D.M은 허리를 90도로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시후는 그런 D.M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로그아웃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김철수와 제대로 된 대화의 장을 가져볼 차례였다.
캡슐을 열고 나오자 가장 먼저 제갈상민이 달려와 부축을 하며 반겨왔다.
“고생하셨습니다!”
“어? 어. 그래.”
상당히 들떠 있는 모습이었다.
조금 전 D.M도 그렇고 제갈상민도 그렇고 남자의 스킨십은 별로였다.
스윽-
이번에도 시후는 내공을 살짝 일으켜 제갈상민의 손을 뿌리쳤다.
기분이 상할 만도 하건만 제갈 상민은 오히려 활짝 웃었다.
흠칫-
순간 본능을 자극하는 거부감이 들었다.
만약 이곳에 J.K 법무팀과 김철수만 없었다면 지풍을 날려 마혈을 짚어버렸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수 없기에 이런 분위기를 돌려야 했다.
“크, 크흠. 그녀는 좀 어떻지?”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지금은 조민이 곁에 붙어 간호하고 있습니다.”
두서없이 물었건만 찰떡같이 대답했다.
시후는 당소영의 상태를 물은 거였다.
대환단을 먹이고 추궁과혈까지 해주었으니 별 탈은 없을 거였다.
하지만 걱정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면 거짓이었다.
그래서 말도 돌릴 겸 당소영의 안부를 물은 거였다.
“건강하다니 다행이군.”
“네. 그래도 한번 들르시기는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굳이?”
“네. 당 소저께서 도련님을 많이 찾으십니다.”
“쯧. 귀찮게 하기는.”
귀찮다고는 말은 했지만 그녀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잖아도 김철수와 일을 마치면 제갈세가를 찾을 생각이었다.
‘핑계가 생겨서 다행이군.’
무슨 이유로 찾아갈까 했는데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다.
이제 웰컴 모니터 앞에서 넋을 잃은 김철수와 대화의 장을 마무리할 차례였다.
그렇게 시후가 김철수에게로 걸어가자 제갈상민은 웃고 있던 얼굴을 굳히고는 상당히 진지한 표정으로 시후를 주시했다.
제갈상민은 당소영을 거론하면서 보인 시후의 반응을 기억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분명 당소영을 마음에 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제갈세가도 무슨 수를 써야 한다고 말이다.
자신의 아둔함으로 제갈세가에 큰 피해를 남겼으니 차기 가주의 자격을 논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미 조민이 차기 가주로 거론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시후와 가깝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린 조카와 권력 다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제갈상민의 삶의 목적은 아버지와 같았다.
제갈세가가 번영하는 것.
그렇기 위해서는 시후를 잡아야 했다.
당소영은 당가의 여식.
그렇다면 제갈세가에서는 경쟁마로 무엇을 내놓아야 할까.
제갈상민은 그 생각으로 머리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시후가 걸어오자 김철수는 그제야 웰컴 모니터에서 눈을 뗄 수 있었다.
“놀랍습니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감탄이었다.
솔직히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중국에서 스페셜 히든 퀘스트를 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의 플레이를 보여주다니.
D.M이 어떤 유저인가.
자신이 한국 지부로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영입한 인재였다.
계약서 사인만 남겨둔 그는 고레벨 유저 중에서도 희귀한 암살 계열이었다.
거기에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는 스킬과 다양한 공격 방식은 발군이었다.
그런 그가 저렇게 허무하게 패하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이건 D.M이 못한 게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미스매치였다.
올림픽 국가대표와 영재발굴단에서 데려온 초등학생이 붙은 셈이었다.
김철수는 다시 한번 시후와 D.M의 대결 장면을 되새겼다.
한국 대표로 거론되고 있는 그 누구도 D.M을 저렇게 상대할 자는 없었다.
김철수는 왠지 벌써 시후의 목에 금메달이 달린 것처럼 보였다.
“원하시는 게 훈련 방식의 변경이라면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더 이상 딜은 없었다.
김철수에게는 이제 시후를 영입해야 한다는 사명감만이 남았다.
그 모습에 시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대화는 이런 식으로 하는 거지.’
천마 시절부터 다져진 시후의 대화방식은 이번에도 먹혔다.
이 정도라면 큰 난관이라 생각했던 마지막 조건도 통과할 것 같았다.
시후가 고개를 까딱거리자 무테안경을 쓴 직원이 다가와 태블릿을 들이밀었다.
“이것이 마지막 조건입니다.”
“하, 하하! 뭐든, 그게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저희와 계약만 하신다면… 어?!”
김철수는 호탕하게 말하다가 무테안경을 쓴 직원이 내민 태블릿에 적힌 조건을 봤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 이건 아무래도 제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닌 것 같습니다.”
“천천히 하시지요.”
시후는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하며 한쪽에 마련된 소파를 가리켰다.
김철수는 터덜터덜 걸어가며 전화를 걸었다.
- 네. 박철입니다.
통화 상대는 박철 사장이었다.
이번에 월드 오브 리그전을 구상한 것도 박철이었다.
S.W SOFT의 사내 정치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그가 내민 히든카드였다.
그랬기에 박철은 김철수의 능력을 높이 샀다.
일전에 버그 유저라 생각했던 유저와 접촉을 한 것도 그가 유일했고, 중국에서 스페셜 히든 퀘스트가 끝났음에도 접점을 마련한 것도 그였다.
뭐가 되었든 어떻게 해서든 결과를 마련해오는 김철수의 전화였기에 박철은 김철수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러고는 답을 했다.
그 답을 들은 김철수는 상당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후를 봤다.
“왜요? 잘 안되었습니까?”
“아…. 저, 그게… 긴급회의를 할 만한 사안이라고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십니다.”
“괜찮습니다. 그럴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시후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 모습에 김철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 미소년의 미소가 어째서 천 년 묵은 구렁이의 미소처럼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 * *
박철은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임원들 모두가 월드 오브 리그전의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었기에 다들 회사에 상주 중이었다.
소집 연락을 돌린 지 10분도 되지 않아서 회의실에 모두가 모였다.
S.W SOFT 임원은 모두 11명.
다들 회사 설립에 이바지한 초기 구성원이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박철은 바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임원들은 예상대로의 반응을 보였다.
“미친 거 아닙니까? 이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프로젝트입니다.”
영업력 하나로 임원을 꿰찬 박진수 이사였다.
그의 말을 시작으로 줄줄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 두 번째 조건도 그렇습니다. 그걸 들어줄 겁니까?”
“그 유저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계약을 해야 합니까?”
“아직 프로게이머도 아니라면서요. 허, 허허.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의 치기 아닙니까?”
박철은 그들의 의견을 묵묵히 들었다.
이들 모두가 자신과 대립하는 박진수 이사파였다.
지금 S.W SOFT는 자신과 박진수 이사파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살짝 자신이 뒤지는 상황이었다.
이번 월드 오브 리그전 프로젝트가 성공해야만 자신이 진정한 S.W SOFT의 CEO가 될 수 있었다.
점점 의견이 박진수 이사 쪽으로 기울자 박철은 다른 이에게 눈을 돌렸다.
임원이 모이는 자리인데도 덥수룩한 헤어스타일에 멜빵바지를 입고 참석한 여자.
얼굴의 반을 가리는 도수 높은 안경 때문에 어려서부터 별명이 돋보기인 박초연.
자신과 함께 Safety World A.I를 만든 엔지니어였다.
그리고 박철은 임원들이 소집되는 10분의 시간 동안 그녀에게 영상 하나를 보여줬다.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제시한 유저와 D.M이 PVP한 영상이었다.
그리고 박철의 시선을 받은 박초연이 손을 들었다.
“그런 말은 이 영상부터 보고 말하세요.”
그녀는 자기 앞에 놓인 컴퓨터를 조작하여 프로젝트를 작동했다.
시후와 D.M의 PVP 영상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