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김철수는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연신 눈동자를 굴렸다.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자신이 왜 J.K 제약회사 사장실에 들어와 있나.
자신이 왜 최고급 용정차를 홀짝이고 있나.
머릿속에 많은 의문이 스쳐 갔다.
그런 그의 앞에는 당연하게 이 방의 주인인 제갈상민이 자리했다.
“중국 저장성 항저우에서 최고급으로 공수해 온 용정차입니다. 향이 어떻습니까?”
“아, 네. 아주 좋습니다. 하, 하하….”
용정차의 맛 따위는 모른다.
평소에 티백 녹차조차 입에 대지 않는 김철수였다.
하지만 지금의 분위기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용정차를 홀짝이는 게 전부였다.
착-착-착-
대화가 끊기자 옆에 앉은 이들이 서류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그들은 J.K 제약회사 법무팀으로, 김철수가 가져온 서류를 검토 중이었다.
시후에게 연락을 받은 김철수는 미리 준비해 놓았던 서류를 챙겨 나왔다.
그는 중국에서 시후와 이야기를 나눈 후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시후의 얼토당토않은 조건을 전해 들은 박철 사장이 김철수를 소환한 거였다.
그 후 S.W SOFT 회사는 긴 시간 동안 회의를 진행했다.
리그전을 펼치기 위한 기존의 계획을 수정할 정도로 말이다.
시후를 끌어들이기 위한 S.W SOFT의 노력은 그 정도로 대단했다.
시후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Safety World에서 ‘천마’는 엄청난 이슈였다.
정작 당사자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용정차를 홀짝이고 있지만 말이다.
“시후 님. 서류상에는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다만.”
J.K 제약회사 법무팀 직원이 서류를 시후에게 내밀었다.
“다만 뭐?”
“시후 님께는 맞지 않는 계약 내용입니다.”
“네?!”
법무팀 직원의 말에 김철수가 깜짝 놀랐다.
저 계약서가 어떤 것인가.
S.W SOFT 회사 임원진들이 몇 날 며칠 회의를 진행하여 만든 계약서였다.
김철수 본인 또한 야근을 밥 먹듯이 했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게 어떻게 만든 계약서인데요.”
김철수는 J.K 법무팀이 트집을 잡는 거라 생각했다.
법무팀 직원 중 무테안경을 쓴 남자가 안경을 고쳐 썼다.
“말했듯이 계약서는 문제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시행할 시후 님께 맞지 않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게 그 말 아닙니까?”
“다릅니다.”
남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크게 세 가지 정도가 있습니다. 우선, 리그전을 치르는 데 필요한 연습 방법.”
“그게 왜요? 리그전에는 단체전도 있기에 팀원들이 모여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 연습 시간을 S.W SOFT에서 지정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네?!”
“보시면 아시겠지만 시후 님은 아직 고등학생이십니다. 그런 분이 회사에서 정한 시간에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거야. 프로게이머 계약을 하시면….”
“시후 님께서는 프로게이머가 되실 생각이 없으십니다.”
“…네?!”
김철수는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아니. 프로게이머가 되지 않을 거라니.
그럼 지금 이 계약 자체가 필요 없는 거였다.
프로게이머가 되어야 나라를 대표하는 리그전에도 나갈 수 있는 것인데.
김철수는 지금 무슨 말을 하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시후 님께서는 프리랜서로 리그전에 참가하실 것을 원하십니다.”
“그게 무슨….”
김철수는 고개를 돌려 시후를 쳐다봤다.
계약서를 읽던 시후는 김철수의 시선에 고개를 들어 마주 봤다.
“왜요?”
“아니, 프리랜서라니요? 프로게이머가 프리라니요?”
“왜요? 안 되나요??”
“소속이 없는 프로게이머가 말이나 됩니까?”
김철수의 말은 당연했다.
프로게이머는 소속사가 있어야 돈을 버니까 말이다.
회사의 로고를 달고 게임에 참가하는 그들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광고판이었다.
한 예로, 축구 게임에 참가한 프로게이머는 소속사가 만든 헤드셋을 꾸준히 착용했었다.
그 프로게이머는 시즌 우승을 거머쥐었고, 우승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 인터뷰에 소리가 잘 들려서 그랬다고 했다.
그 결과 해당 소속사의 헤드셋은 판매율이 8%나 급증했었다.
이와 같은 미래지향적인 광고 전략을 세우는 것이 프로게이머와 소속사의 관계이다.
그런데 소속사 없이 프리랜서로 프로게이머가 되겠다니.
그러면서 리그전에도 출전하겠다니.
“시후 님. 저는 지금 이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간단하게 생각하세요. 저는 프리로 여러분의 광고판이 되어 드리겠다는 겁니다.”
“아니, 그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이런저런 법적인 사항도 있고….”
스윽-
법 이야기가 나오자 시후는 손을 들어 옆에 자리하고 있는 J.K 법무팀을 가리켰다.
“이들이 제 전속 법무팀입니다.”
“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J.K 법무팀이 개인의, 그것도 고등학생의 전속 법무팀이라니.
J.K 법무팀이 어떤 이들인지 업계가 다른 김철수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제약회사는 필연적으로 법무팀의 실력이 회사 명운과 직결된다.
많은 연구와 임상을 거쳐 약을 시판한다고 끝이 아닌 게 제약이다.
그 약을 먹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의 특성은 천차만별이니까 말이다.
때로는 0.1%의 부작용으로 법적인 싸움을 할 때도 있었다.
그 상대가 개인부터 대학병원까지 다양했기에 제약회사의 법무팀은 실력이 좋아야 했다.
그중에서도 J.K 제약회사의 법무팀은 탑 오브 탑의 실력을 자랑했다.
지금까지 패소한 싸움이 없다고 김철수는 들었었다.
“진짜입니까?”
김철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무테안경을 쓴 남자에게 물었다.
“사실입니다.”
“허.”
J.K 제약회사 사장실에서, 그것도 사장이 함께한 자리에서 말하는 것이니 농담도 아닐 터였다.
이쯤 되자 김철수는 시후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혹시 성이….”
“제갈 성은 쓰지 않습니다.”
“아, 네….”
혹시나 제갈가의 자제인지 의심했지만 바로 부정당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렇게 제갈가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궁금증보다 다른 것을 먼저 처리해야 했다.
“그건 그렇다 치지만, 저희 연습 시간에 참석을 안 하시겠다는 말씀이신 겁니까?”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겁니다. 제게도 학업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아니, 프로게이머가 되면 학업을 굳이….”
“저는 그 ‘굳이’를 하고 싶습니다.”
시후가 저리 단호하게 말하니 김철수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리그전에 나가는 팀원들과 합은 맞추어야 했다.
“그렇다고 팀원들과 합을 맞추지도 못하고 리그전을 나갈 수는 없습니다.”
“으흠, 그럼 제가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네.”
“리그전은 친목 다지기가 목적입니까?”
“네?”
“모여서 도란도란 이야기나 나누면 승리가 거저 오냐는 말입니다.”
“그게 무슨….”
“확실한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훈련을 하자는 말입니다. 가장 강한 사람에게 배워서 말입니다.”
“그 말씀은….”
“네. 제가 그들을 가르치겠다는 말입니다.”
김철수는 당당하게 말하는 시후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저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강한 유저에게 배우는 것만큼 실력 향상이 빠른 것은 없었다.
하지만, 리그전을 위해 모은 프로게이머들의 레벨이 얼마인데.
지금 시후의 말을 빌려보면 그들이 시후에게 배워야 하니 자신의 연습 시간에 맞추라는 거였다.
“도대체 레벨이 몇이시길래?”
“…그게 중요하겠습니까. 실력이 중요하지요.”
시후가 살짝 뜸을 들여 말했다.
“레벨이 곧 실력….”
“레벨이 곧 실력은 아니라는 것을 직접 보여드리죠.”
시후는 김철수가 레벨을 걸고넘어질 것 같아 선수를 쳤다.
“네?”
“제 실력. 제가 그들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실력이 있는지 말입니다.”
김철수는 눈을 껌뻑였다.
그러니까 지금 시후는 S.W SOFT 소속 프로게이머랑 PVP를 하겠다는 말이었다.
그것으로 실력을 입증할 테니 자신이 원하는 계약 내용으로 계약하자는 거였다.
그게 가능하냐는 의문을 품기도 전에 시후가 일어났다.
눈치 빠른 제갈상민이 곁에 섰다.
“사내 복지실에 캡슐이 있습니다.”
“그리로 가지.”
시후가 고개를 까딱이자 김철수가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났다.
그러고는 귀신에 홀린 듯 시후의 뒤를 따라 J.K 제약회사 복지실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는 동안 김철수는 회사로 연락했다.
시후가 내건 조건을 보고한 후 지금 당장 접속 가능한 프로게이머를 수소문하는 거였다.
“저와 겨룰 상대는 있나요?”
“때마침 회사에 볼일이 있어 방문한 분이 계셔서 접속할 수 있다고 하시네요.”
“오, 그래요?”
시후는 자신의 질문에 빠르게 답하는 김철수를 보며 생각보다 능력이 있다 생각했다.
사장실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준비를 마쳐 놓다니.
인재를 알아보는 시후의 눈이 번쩍였다.
“응? J.K 제약회사는 겨울에도 에어컨을 트시나 봅니다?”
김철수 갑자기 밀려드는 오한에 어깨를 움츠리며 무테안경을 쓴 남자에게 물었다.
법무팀 직원은 무테안경을 고쳐 쓰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 그렇죠? 하, 하하….”
김철수는 자신이 생각해도 멍청한 질문이라 생각했지만 추운 건 사실이었다.
그게 시후 때문인지는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아마 이곳에 진지춘이 있었다면 김철수의 어깨를 다독여 줬을 거였다.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걸으니 어느새 복지실에 다다랐다.
“여기입니다.”
제갈상민은 직접 복지실의 문을 열었다.
곁에 비서도 있는데 굳이 자신이 직접 문을 연 이유가 있었다.
J.K 제약회사는 대대로 사원 복지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복지 시스템을 제대로 구축하자는 게 제갈세가의 경영 방침이었다.
인재를 중요시하는 것은 시후뿐만이 아니다.
제갈상민은 그 점을 시후에게 어필하고 싶었다.
시후의 말대로 섭혼술에나 당하는 머저리가 아닌, 앞으로 시후가 걸어갈 길에 보탬이 되는 사람으로 말이다.
그런데 복지실 안을 슬쩍 둘러본 시후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다.
“음….”
“오! 역시 J.K입니다. 직원 복지 수준이 상당하군요?!”
제갈상민이 원하는 반응은 김철수가 대신 보여주었다.
제갈상민은 아쉬운 대로 그 반응에 힘을 실었다.
“회사 이념 중 하나가 ‘인재는 귀히 여겨라.’입니다. 그래서 이런 복지실도 마련한 것이죠.”
제갈상민이 이리 자랑할 정도로 복지실의 시설은 훌륭했다.
복지실은 건물 2층 전체를 사용했다.
헬스장, 요가장, 보드게임장, 탁구장, 음악감상실, 카페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특히, 가장 안쪽에 있는 Safety World 캡슐 방은 그 시설이 남달랐다.
양쪽으로 늘어선 캡슐의 개수가 무려 20대.
모두 최신형 모델들이었다.
무엇보다.
“어? 저건 웰컴 모니터 아닙니까?”
“알아보시는군요.”
김철수가 가리킨 것은 중앙에 놓인 70인치 모니터였다.
보기에는 평범한 모니터 같지만, 패널이 두 개 붙어 있는 모니터였다.
그것으로 3D에 버금가는 영상을 보여준다.
그것도 Safety World 플레이 영상을 말이다.
그 가격이 천만 원에 육박하기에 웬만한 장소에는 없는 신제품이었다.
그러한 내용을 무테안경을 쓴 직원이 시후에게 설명했다.
“잘되었군요. 저것으로 확인하시면 되겠네요.”
“네. 그럼, 이 IP로 접속해 주십시오. 이번 리그전을 위해 저희가 만든 훈련장 IP입니다.”
본래는 S.W SOFT 본사에 있는 캡슐로 접속해야 하는 것을 이번만 특별히 받아온 거였다.
김철수는 캡슐에 IP를 등록하는 직원들을 보며 시후에게 다가갔다.
“상대분은 이번에 저희 회사와 계약을 하실 프로게이머이십니다. 유저 직업은….”
“필요 없습니다.”
“진짜요?”
“그걸 알아서 뭐 하겠습니까. 어차피 자신이 쓰던 장비는 사용도 못 한다면서요.”
이곳에 오는 도중에 김철수는 시후에게 PVP 시스템에 관해서 설명했다.
본인이 평소 쓰던 아이템을 사용하지 못하고 준비된 장소에서 준비된 무기만을 이용해 겨룬다고 했다.
템빨 없이 겨룬다는 거였다.
유저가 가진 스텟과 스킬, 컨트롤 실력으로만 승부를 본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준비한 선수는 요즘 핫하게 뜨고 있는 유저였다.
특히, 스킬 운영이 아주 뛰어났기에 살짝 귀띔해주려 했었다.
그런데 시후는 그것을 거부했다.
다른 이가 봤다면 오만한 모습이었지만 제갈상민의 생각은 달랐다.
조민이 한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 시후 오빠는 Safety World에서 펼치는 무공을 모두 현실에서도 펼칠 수 있으세요.
조민이 자신을 놀릴 리는 없었지만 믿기 힘든 말이었다.
조민의 말을 듣고 시후와 관련된 동영상들을 봤었다.
거대한 회오리를 찍어 누르는 영상.
문신이 가득한 오크를 날려버리는 영상.
순식간에 불기둥을 솟구쳐 주변 유저들을 태워 버리는 영상.
그 믿을 수 없는 영상들이 현실에서도 가능하다니.
꿀꺽-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삼켜졌다.
조민의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제갈상민은 이번 PVP에 큰 의미를 뒀다.
그 영상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시후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생각이었다.
제갈상민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시후는 IP를 등록한 캡슐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고글을 쓰기 전 김철수를 봤다.
“미리 이야기하는데, 이 경기 뒤에는 저 계약서에 또 다른 내용이 기재될 겁니다.”
“네?”
“노동력에 대한 대가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에?!”
“그럼.”
김철수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오르건 말건 시후는 고글을 쓰고 Safety World에 접속했다.
어차피 그 일에 대해서는 법무팀에게 일러뒀다.
이제 자신이 할 일은 프로게이머라는 녀석을 상대하는 것뿐이었다.
흰색 빛이 번쩍이자 시후는 살짝 설렜다.
‘과연. 프로게이머라는 녀석의 실력은 어떨까.’
그래도 명색이 게임으로 밥 빌어먹고 사는 녀석들이라면 그만한 실력을 갖췄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밝아진 시야와 함께 보이는 유저에 시후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었다.
“허, 프로게이머라는 게 너였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