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임신 : 아이나 새끼를 배다.]
몇 달 전 학교에서 성교육이라며 받았던 것이 떠올랐다.
참으로 대단한 교육이었다.
천마 시절에는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 기회였다.
남자와 여자의 다름을 이해했고, 서로가 어울리는 것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조화로워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남·여의 결실이 임신이라는 양호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리고 점점 그 위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덮였다.
“아들, 엄마 임신했다.”
그 말이 메아리가 되어 머릿속을 울렸다.
“아, 네. 어… 음….”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몰랐다.
잠시 어버버하는 사이 자신을 바라보는 부모님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자신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는 두 분.
그 안에 감추어진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보였다.
‘왜?’
분명 양호 선생님께서는 그러셨다.
아이를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의 임신은 축하받을 일이라고.
그런데 왜 두 분은 부끄러워하실까.
시후는 문득 부모님 눈가에 자리한 주름을 보았다.
‘아… 연세.’
세월의 흔적이 엿보여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정도였다.
불혹이 훌쩍 넘으신 연세에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 부끄러우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두려움은 왜?
‘아… 나 때문이구나.’
시후는 ‘강시후’의 행보를 되돌려봤다.
빵셔틀이나 당하던 17세의 아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자식.
해가 지나 이제 18살이 된 자식은 과연 부모의 임신 사실을 어떻게 생각할까.
혹여나 부모를 빼앗긴다는 생각에 자식이 혼란스러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두려워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독안공을 사용하지 않아도 부모님의 그런 마음이 저절로 느껴졌다.
‘이런 것이 유대감인가. 마음이 찌릿하구나.’
부모님의 이런 감정을 느끼자 다른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가족’이란 것에 소중함을 알아가는 요즘.
이 구성원에 한 명이 더해진다고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어머니, 아버지. 동생은 제가 꼭 책임지고 키우겠습니다.”
“시후야….”
어머니 윤여정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지어졌다.
아버지 강인 역시 무언가 훌훌 털어버린 것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 우리 아들. 아빠 아직 건재하다. 우리 아들과 딸은 이 아빠만 믿고 건강하게만 자라주면 된다.”
“여보!”
“아, 실수… 그건 비밀이었지.”
“뭐가요?”
“아이 성별 말이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아이 성별을 미리 알려주는 것은 불법이라고 했다.
대신 아들이면 ‘파란색의 벽지를 추천해 드려요.’라든지, 딸이면 ‘엄마를 많이 닮을 것 같네요.’라면서 돌려 말한다고 했다.
시후에게 딱히 그런 것은 필요 없었다.
그저 살짝 기를 흘려 넣어 태아의 성별을 확인하면 되었다.
‘그래야 알맞은 태교를 하니까.’
남들이 말하는 태교와는 다른 태교를 생각하는 시후였다.
그리고 슬쩍 기를 흘려 본 느낌으로는 여아가 확실했다.
아이가 건강하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으로 태어나면서부터 무공을 익힐 수 있는 최고의 체질을 만들어 줄 거였다.
어머니가 원한다면 영약이란 영약은 모두 구해줄 심산이었다.
거기에다 아이의 체질에 가장 알맞은 기를 살살 불어 넣어줄 생각이었다.
‘이런 게 태교고 조기 교육이지.’
그런 생각을 하자 문득 어머니의 몸이 걱정되었다.
아이가 튼튼하게 태어나려면 어머니의 몸도 튼튼해야 하는 법.
“어머니, 어디 아프신 곳은 없으시죠?”
“어머? 벌써부터 걱정해주는 거니?”
“혹시나 해서요.”
“걱정 말아요, 아들~. 엄마는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답니다.”
하긴. 그러실 거다. 밤마다 두 분께 추궁과혈을 해드렸으니.
‘어? 그러면 내 동생은 내 덕도 있는 건가?’
두 분이 체력이 날이 갈수록 좋아지며 자연스럽게 금슬도 좋아지셨으니 그 덕이 자신인 것 같았다.
시후는 두 분의 금슬이 낳은 결과가 동생으로 연결되었다면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 생각했다.
‘좋아, 어머님께서 무사히 건강하고 안전하게 출산하실 수 있도록 돕는다.’
어머니가 알아서 잘하시리라 믿지만 시후는 만전에 온 힘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필요한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시후는 부모님과 단란한 저녁 시간을 가진 후 무협지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걸터앉아 스마트폰으로 톡을 보냈다.
- 대환단은?
당성치에게 보낸 거였다.
오공단금술에 당한 당소영의 치료가 막바지였다.
약선방에서 송하룡과 진지춘이 열과 성을 다한 덕분이었다.
이제 시후가 대환단을 당소영에게 복용시키고 추궁과혈만 해주면 되었다.
사실 한국에 도착하는 즉시 당소영을 치료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영감탱이들이 쓸데없는 말을 해서는. 쯧.”
약선방에서 떠나올 때 송하룡이 당소영의 두 손을 꼭 잡고 한 말이 떠올랐다.
- 주모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련님께서 꼭 치료해주실 거니까요.
당소영에게 ‘주모’라고 하는 말에 화들짝 놀라 눈을 부라렸더니 그 넉살 좋은 송하룡은 허허 웃으며 진지춘에게 바통을 넘겼다.
거기에 진지춘은 한술 더 떠.
- 에이~. 방주님. 주모님은 너무 갔습니다. 아직은 도련님의 피앙세 정도가 적당합죠.
그 말에 시후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당소영이 두 사람의 손을 꼭 잡으며 감사하다고 했었다.
그 때문인지 당소영과 무슨 일이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시후는 당소영을 은근히 피했다.
그 결과 당소영을 먼저 당가로 보냈다.
대환단이 준비되는 대로 찾아갈 거라는 말을 남기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준비되면 연락하라고 했는데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이 자식이, 내가 한국에 없었다고 나사가 빠졌지.”
부모님의 호위를 해준 노고를 생각하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직접 목소리를 듣고 한 소리 해주려고 통화버튼을 찾는데 톡이 왔다.
- 준비 ㅇㅋ.
너무나도 단출한 톡이었다.
시후는 당성치가 보낸 게 아닌가 싶어 이름을 재차 확인했다.
“뭐지? 이 성의 없는 말투는?”
하도 어이가 없어 시후는 다시 톡을 보냈다.
- 내일 간다. 준비해 놔라.
그러자 바로 답이 왔다.
- ㅇㅋ. ㄱㄷ.
“허?”
좀 전보다 더 성의가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한 시후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네.
“너 뭐 잘못 먹었냐?”
- 제가요? 그럴 리가요.
“그런데 이 톡은 뭐냐?”
- 주군의 질문에 빠르게 답했을 뿐입니다.
“어쭈? 목소리에 감정이 실렸다?”
- 아닙니다. 제가 감.히. 그러겠습니까? 제.가. 뭐라고요.
중간중간 악센트가 들어간 말투였다.
무언가 있는 게 확실했다.
‘그렇다고 나한테 이렇게 말해?’
시후는 마음속으로 저울질을 하기 시작했다.
당성치의 노고와 버르장머리를 두고 말이다.
그 잠시를 기다리지 못하고 당성치가 결정을 도와줬다.
-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끊겠습니다. 저. 같.은. 놈.은. 바빠서요.
띠릭-
그러고는 통화가 종료되었다.
“…허?!”
하도 어이가 없어 반응이 늦었다.
그리고 저울질이 끝났다.
“그래. 네가 너. 같.은. 놈에게 대접이 소홀했구나.”
그동안의 노고를 생각해 오늘 당성치를 극진히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모님에게는 잠시 산책을 다녀온다며 집을 나온 후 옥상으로 올라가 몸을 날렸다.
천마지기를 이용해 단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하는 순시보가 있다면 반대로 장거리를 빠르게 이동하는 경공술도 있었다.
천마비행공(天魔飛行功).
천마지기를 이용해야 하지만 그 빠름은 번개와 같았다.
무엇보다 천마비행공은 날아가면서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 무소음의 경공술은 천마 시절 진소령을 위해 만든 거였다.
언제나 황궁에 갇혀 있던 그녀를 만나기 위해 남들의 이목을 끌지 않으며 가장 빠르게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그것을 지금 시후는 당성치를 위해 펼쳤다.
혹여나 자신이 찾아가는 것을 눈치채고 어디 숨어버리면 찾는 시간이 아까워서 말이다.
“너 이 자식. 딱 기다려라.”
시후가 마음먹고 날아가자 한국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한국대 옥상에 내려선 시후는 곧장 총장실로 향했다.
쾅-
“너 이새…!”
시후는 총장실 문을 걷어차며 들어갔다.
그리고 보이는 당성치에게 육두문자를 날리려다 입을 다물었다.
총장실에는 당성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오셨어요?”
“…누워 있지. 왜 여기 있는 거냐?”
당소영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왔다.
많이 호전되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혈색이 이전처럼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눈 밑이 거무스름한 게 보는 이로 하여금 걱정스럽게 하는 얼굴이었다.
‘아차!’
당소영을 걱정하는 마음에 당성치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당성치는 눈치가 빨랐다.
“어구, 오셨습니까? 오신다면 오신다고 말씀을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주군?”
다분히 비꼬는 말투였다.
시후는 당소영에게서 눈을 떼고 당성치를 봤다.
자신을 주군이라 부르지만, 저 눈에는 주군에 대한 충성심 따위는 없었다.
이전에는 두려움과 경이로움, 당가의 비전을 찾아준 것에 대한 고마움 따위는 있었다.
지금은 그저 자신보다 아랫사람을 부릴 때의 그런 눈빛이었다.
“너 뭐 잘못 먹었냐?”
“제 주제에 뭘 먹었다고 잘못 먹기나 하겠습니까.”
“허? 뭐라?”
“그저 제 여식 하나 지키지 못한 못난 아비일 뿐인데요.”
“계속 헛소리할 거냐?”
“아닙니다. 제가 감히 주군 앞에서 그러겠습니까. 목숨이 몇 개 있는 것도 아닌데요. 하긴. 제가 죽어도 제 여식은 주군께서 거두어주실 테니 삶에 여한은 없습니다만.”
시후는 당성치의 더러운 혀 놀림에 독안공을 펼쳤다.
그리고 읽어진 당성치의 속마음에 저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졌다.
‘이 자식이 지금 제 자식을 볼모로 삼아 나를 쥐락펴락할 셈이구나?’
그랬다.
당성치는 중국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보고받았다.
거기에 돌아온 당소영에게서 추가 보고를 받은 당성치는 시후가 당소영을 남달리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국으로 당소영을 보낸 자신의 목적이 달성된 거였다.
거기에 시후가 많은 금은보화를 얻은 것을 들었다.
특히, 제갈세가에 보낸 병장기는 그 가격을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의 것들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은 시후의 장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자신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고 대뜸 대환단을 내놓으라고 하며 아픈 딸아이만 보내왔다.
그래서 심통이 난 거였다.
그것을 읽은 시후는 할 말을 잃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당소영을 연인으로 생각지는 않고 있었다.
천마 시절 진소령과 겹쳐 보이기에 다른 이들보다 호감이 가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욕심 가득한 늙은 여우의 만행을 두고 볼 정도로 깊은 관계는 아니었다.
시후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당성치는 기회는 이때다 싶어 입을 놀렸다.
“제가 살아봐야 또 얼마나 살겠습니까. 그저 다른 세가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당가의 위엄을 세우고 떡두꺼비 같은 손주 녀석의 재롱이나 받으며 노년을 보내는 게 꿈일 뿐입니다.”
이제는 손주까지 거론했다.
가도 너무 멀리 앞서간 당성치에게 참다 못한 시후가 한 소리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아빠, 그만 좀 하세요.”
당소영이 한발 먼저 당성치 앞을 가로막았다.
당소영 역시 당성치가 무엇 때문에 저리 행동하는지 알고 있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자신을 이곳에 부른 때부터 말이다.
그래도 아비를 생각하는 마음에 따랐고 혹여나 시후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당성치가 입을 열면 열수록 어두워지는 시후의 낯빛에 먼저 나선 거였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이 자리에서 무슨 사달이 날 것 같았다.
눈치 빠른 늙은 여우 당성치는 당소영이 자신을 막아서자 그제야 시후의 눈치를 살폈다.
싸했다.
도저히 사랑하는 여인을 보는 그런 눈빛이 아니었다.
“주, 주군, 그러니까. 제 말은….”
“이걸로 퉁치자.”
“네?”
“내가 없는 동안 내 부모님을 지켜준 일은 이걸로 퉁치자고.”
“그건 신하로서 당연히….”
“아니. 넌 내 신하가 아니야.”
신하가 아니라는 시후의 말에 당성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되뇌었다.
시후가 누구인지. 처음 자신과 만남이 어땠는지.
그가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말이다.
꿀꺽-
당성치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자각했다.
이 상황을 수습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연신 머리를 굴렸다.
결국,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또 당소영뿐이었다.
“소, 소영아. 나는 말이다, 그게….”
“됐고. 당소영. 넌 나를 따라나서고.”
“네?!”
뜬금없이 따라오라는 시후의 말에 당소영도 당성치도 놀랐다.
놀란 두 사람의 얼굴에 시후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오공단금술. 치료해야지. 그러니 영감. 대환단 내놔.”
단호한 시후의 말에 당성치는 머뭇거렸다.
그 순간 시후는 독안공을 펼쳤다.
그리고 손가락을 튕겼다.
푹-
“헉!”
지풍을 날려 당성치의 마혈을 짚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당성치는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번에 호접무를 대성하며 자신의 무공은 한 단계 성장했다.
은연중에 자신감이 차올랐건만 시후가 날린 지풍 하나 막지 못했다.
그사이 시후는 허공에 손을 휘적였다.
덜컥-
그러자 당성치가 앉아 있던 책상의 서랍이 열리며 작은 갑이 날아왔다.
열어보니 대환단 한 알이 들어 있었다.
“당소영은 치료 후 돌려보내 주지. 앞으로의 일에 대한 상의는 당소영하고만 하겠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지? 늙은 여우 영감?”
“그 말씀은… 소, 소영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면 바보였다.
이미 차기 당가 가주로 거론되고 있는 당소영에게 시후가 전폭적으로 입김을 불어 넣겠다는 거였다.
시후의 존재 또한 당가에서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기에 저리되면 당성치 자신은 가주직에서 물러날 수도 있었다.
아직 이루고 싶은 일들이 많은 당성치였기에 간절한 표정으로 당소영을 불렀다.
네가 어떻게 좀 해보라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당소영의 눈빛은 시후와 더불어 싸늘했다.
“이 자리에서 도련님이 아버지를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저는 감사할래요.”
“그, 그게 무슨.”
“아니면 제가 비켜설까요?”
“아, 아니다!”
비켜선다는 당소영의 뒤로 시후가 눈빛을 빛냈다.
한순간에 살기가 날아들었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 엉덩이골까지 다다랐다.
“영감. 한국대 총장 자리는 하게 해줄게. 그리 알고 반성 좀 해.”
“주, 주군! 주군!!”
시후는 그 말을 끝으로 총장실을 나갔다.
당소영 역시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홀로 남은 당성치는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마혈은 풀어주고 가십시오! 주군!!”
당성치의 울부짖음은 다음 날 아침까지 울려 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