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생각보다 약선방이 돈이 많은 것 같았다.
어느새 연락해 놨는지 아미산 근처에 시후 일행을 태울 헬기가 도착해 있었다.
두두두두-
헬기는 총 두 대로 한 대에 조민, 진지춘, 시후와 당소영이 함께 타고, 다른 일행들은 다른 헬기에 올랐다.
당소영의 치료를 위해 진지춘과 시후가 같이 오른 거였고, 조민은 시후가 벌인 일에 대한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함께 한 거였다.
“그래서 오빠 말씀은 황 장로와 J.K 직원 얼굴이 팔렸다는 거죠?”
“아마도?”
“아마도라니요? 그런 어정쩡한 대답이 어디 있어요?”
“아미산에서 급히 내려오느라 정확한 확인은 불가했거든.”
시후는 아미파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했다.
무념전에 들어갈 때 시후는 J.K 직원으로 역용한 상태였다.
멸마절지검으로 린의 한쪽 팔을 자른 후 시후는 근처에 있는 CCTV를 볼 수 있었다.
붉은색 램프가 깜빡이는 것에 지금 상황이 녹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급한 대로 황 장로의 모습으로 바꾸고 CCTV를 부수었다.
여기까지 들은 조민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찍혔겠네요.”
“혹시나 해서 관리소라고 쓰여 있는 곳에 손을 쓰기는 했는데.”
“어떻게요?”
“제왕무적검을 좀 썼다.”
“거길 지졌다고요?!”
조민 역시 제왕무적검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시후의 말에 깜짝 놀랐다.
남궁세가의 제왕무적검은 번개를 형상화한 무공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시후가 관리소에 벼락이라도 떨궜다는 말이었다.
“거기 사람은….”
“인기척은 없었다.”
“휴… 그나마 다행이네요.”
일반인이 휩쓸려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조민이 안심했다.
“거기에 벼락이라도 떨어졌다면 하드디스크들은 다 날아갔겠네요.”
“하드… 뭐?”
“CCTV 영상을 저장하는 장치요.”
“아… 하드, 그래. 그랬겠지?”
조민이 말하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망가졌다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솔직히 시후가 그곳에 제왕무적검의 기운을 흘린 것은 하드디스크라는 장치에 대해서 알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전자기계가 있는 건 뭐든지 부숴버릴 생각으로 한 건데.’
그런 생각으로 저지른 일인데 의외의 소득이 생겼으니 잘되었다 싶었다.
소 뒷걸음질로 쥐 잡은 격이라 생각하던 그때 조민이 눈을 번쩍였다.
“아! 그래서 그들이 한국으로 찾아올 거라고 한 거군요?”
조민은 그제야 혈교 녀석들이 한국으로 찾아올 테니 돌아가자는 시후의 말을 이해했다.
덕분에 이 중에 속이 타는 것은 진지춘뿐이었다.
당소영을 치료해야 하기에 시후와 조민의 대화에 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귀를 쫑긋 세우고 있어 대략적인 흐름은 이해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 ‘아, 그랬구나.’ 이러면서 넘어가니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크, 크흠. 혈교 녀석들이 도련님의 정체를 눈치채기라도 한 겁니까?”
진지춘은 대답을 듣기 위해 자신이 생각해낸 가장 최악의 수를 말했다.
그런 진지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후가 입을 열었다.
“사람은 말이다. 자기가 아는 것만 보려고 하는 지랄맞은 본능이 있다.”
“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거다.”
“……! 지금 그 말은 저 흉보시는 겁니까?”
“…….”
시후는 대답 대신 눈빛으로 말했다.
“와! 도련님 너무하십니다, 제가 도련님을 얼마나 생각하는데요. 네?!”
“네가?”
“그럼, 아닙니까?! 뭣하면 아침 문안 인사까지 드리고 싶어 하는 게 접니다!”
“아니, 그건 너무 갔고. 너도 참… 병이야.”
궁금증 해소를 위해서라면 자존심 따위는 개나 줘버리는 병.
시후는 그런 진지춘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후가 그러거나 말거나 진지춘은 대답을 들어야 했다.
“아, 그래서 뭐요! 뭔데요? 저 이러다가 죽습니다.”
진지춘은 진짜 죽는다며 자기 목을 조르는 시늉을 했다.
시후는 그런 진지춘의 목을 직접 조를까도 싶었지만,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당소영의 모습에 마음을 돌렸다.
- 나를 남궁 정도라 생각한다는 거다.
“아!!”
시후의 전음에 진지춘은 ‘유레카’라고 외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진지춘도 시후가 뚝섬에서 혈교 녀석들과 일전을 벌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 남궁세가 가주인 남궁정도의 모습으로 거의 전멸시켰다는 것을 말이다.
거기까지 기억해 낸 진지춘은 무언가 떠오른 듯 시후를 봤다.
“혹시 그때 놓치셨던 둘 중의 하나가 혈천마라강시입니까?”
“맞아. 그때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그리되었더구나.”
“그럼, 당장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건 아니다. 녀석들도 준비가 필요할 테니까.”
시후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멸마절지검을 들어 올렸다.
겉보기에는 녹이 잔뜩 슨 검이 혈천마라강시를 꼼짝 못 하게 하는 엄청난 보검이라니.
시후는 멸마절지검에 자하신공의 기운을 흘려 넣었다.
우우웅-
선분홍의 기운과 함께 멸마절지검이 울었다.
“오빠, 그거 설마… 자하신공은… 아니죠?”
“맞는데, 자하신공?”
“헐!”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시후의 말에 조민은 입을 떡 벌렸다.
도대체 시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알 수 없어지는 남자였다.
“오빠,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들 무공 다 할 줄 아시는 건 아니죠?”
“에이, 나라고 그걸 다 하겠냐? 그건 아니지.”
“그렇죠?! 오빠가 그 정도로 괴물일 리는 없어요? 그쵸?!”
무엇에 안심하는지 모르겠지만 조민은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시후는 조민에게 거짓말을 한 거였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사적인 질문을 할 때는 표정에 역력히 드러나네.’
조민은 조금 전 시후에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무공들에 언급할 때 다른 생각을 좀 했다.
중국에 와서부터인가.
조민이 J.K 직원으로 변용한 한 후부터 시후에 대한 마음을 이따금 내비쳤다.
아직 사춘기 소녀의 감성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었지만 내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그저 모른 척해주며 적당히 어울려준 거였다.
‘내가 그것들을 모두 할 줄 아는 걸 알면 넘볼 수 없는 존재라 생각하겠지.’
그렇게 되면 지금의 관계에 금이 갈 거라 생각했다.
시후는 적당히 어울려주며 조민이 좀 더 현명하게 사고하고 견문을 넓혀 성숙해지면 사실을 말해줄 생각이었다.
현대 시대의 지괴에는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때가 되면 아마도 내 진실을 알게 되는 이 중, 네가 처음일 수도 있겠구나.’
시후는 그만큼 조민을 인정했고 대우해 주었다.
“그래서 말인데.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필요한 게 좀 있다.”
“금은보화라면 이미 약선방에서 조치 중일 거예요.”
“그것도 그렇지만 그것 말고 다른 것도. 일단 진권 녀석부터.”
“진권 스님이요? 그분은 왜요?”
“걔도 데리고 가려고.”
스님을 데리고 가려는 시후의 계획은 이러했다.
이번에 혈교와의 접전을 통해 알게 된 것이지만 진권과 일행들의 상성이 좋았다.
그리고 혈교 녀석들이 한국으로 넘어올 때까지 시후는 바쁠 터였다.
천마 시절의 내공 회복을 위해 Safety World를 해야 했고 다른 가주 녀석들도 지도해줘야 했다.
그렇게 되면 태산과 인호와 조민에 대한 가르침의 시간이 소홀해질 수 있기에 그들에게 진권이라는 교재를 넘겨줄 생각이었다.
소림사 사대 수호신승 진권.
그는 무공에 있어서 정통파였다.
“그런데 이번에 혈교 녀석들에게 진권의 얼굴도 알려졌을 텐데 대충 여행 목적으로 데리고 갔다가는 뒤탈이 생길 수도 있잖아. 그래서 그러니 준비 좀 해봐라.”
“뭐, 준비야 어렵지는 않을 텐데. 진권 스님께서 같이 가려고 하실까요?”
“진권? 그 녀석이 같이 갈 이유야 차고 넘치지.”
순간 진지춘과 조민은 보았다.
누군가의 약점을 움켜쥐고 흔들 때 보이는 시후의 악랄한 미소를.
시후는 진권에게 무공 전수뿐만 아니라 일인전승으로 내려오는 탄지신공으로 협박할 생각이었다.
‘한국에 널리 널리 퍼트려 준다는 식으로.’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고지식한 진권이라면 곧이곧대로 믿을 거였고 따라나설 게 분명했다.
“그리고 화산파의 맥을 잇고 있는 녀석들이 있으면 좀 찾아봐라.”
시후는 진권의 문제는 그것으로 끝내고 또 다른 사항을 거론했다.
“화산파는 또 왜요?”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게 뭐예요?”
“그런 게 있어. 받은 만큼 주려고 하는 거니까. 좀 알아봐.”
밑도 끝도 없는 시후의 말에 조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시후가 화산파를 알아보라고 한 것은 직감 때문이었다.
법정이 거론한 것부터. 마천서생이 안배해 놓은 장소까지.
천마 시절 봉문한 문파가 한둘도 아닌데 왜 하필 화산파였을까.
‘그리고 이 검. 이 녀석이 반응하는 것도 자하신공이고.’
무엇보다 멸마절지검이 아미파의 기운 다음으로 화산파의 기운을 가장 잘 받아들였다.
그래서인지 시후의 감각이 말해줬다.
법정, 마천서생, 황 노인. 그리고 멸마절지검.
이것들과 관계된 화산파에 무언가 숨겨진 비밀이 있음을 말이다.
‘이리 말했으니 녀석이 알아서 하겠지.’
시후는 조민의 실력을 믿었다.
나이에 맞지 않은 능력과 그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제갈세가의 지원을 받는 조민이었다.
현대 시대에 자신이 사용할 수 없는,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말해놓은 것들을 준비해 놓을 거였다.
이제 시후는 당소영에 집중할 수가 있었다.
헬기에 탄 이후로 의식을 잃고 있는 당소영.
그 빌어먹을 오공단금술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꼭 대환단이 필요했다.
이미 당가에 연락을 취해 대환단을 준비하라 일렀으니 한국에 도착하는 순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때까지는 당소영의 상태를 호전시켜놔야 했다.
‘적어도 비행기를 자력으로 타고 갈 수 있을 정도로는 말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약선방 옥상에 도착했다.
지하 대회의실에서 큰일이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건물이 벌써 말짱해 보였다.
“너희 제법 능력 있다?”
시후의 칭찬에 진지춘이 헤헤 웃으며 헬기에서 내렸다.
“도련님께서는 저희를 좀 더 믿으실 필요가 있습니다.”
“또, 또. 조금만 칭찬하면 아주 그냥 하늘을 날려고 해요.”
“헤헤. 도련님이랑 함께면 하늘 나는 게 문제겠습니까? 우주도 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말은 청산유수지.”
진지춘의 너스레에 시후는 피식 웃었다.
시후는 진지춘의 저런 점이 싫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 자신이 웃을 상황은 아니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확신이 없었다.
천음절맥도 치료했는데 당소영을 치료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하지만 혈교 녀석들이 생각보다 규모가 있어 보였다.
아미산에서 그만한 소동이 있었는데 뉴스나 인터넷 기사에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녀석들이 이미 중국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서둘러 중국을 떠나야 했다.
자신이 아닌 일행들의 안전을 위해서 말이다.
그런 고민을 쉴 새 없이 하는 자신에게 진지춘은 이렇게라도 웃음을 주었다.
천마 시절에는 진지춘 같은 녀석이 옆에 없었다.
그래서 저런 녀석에게 어떤 것을 줘야 할지 기준이 없었다.
기회가 된다면 진짜 사상지공을 가르쳐줄 생각이었다.
시후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헬기에서 일행들이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약선방 사람들이 다가왔다.
의식을 잃고 있는 당소영을 위해 이동식 시트를 가져왔다.
“오셨습니까.”
무엇보다 송하룡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혈색을 보아하니 그동안 잘 먹고 잘 싸고 잘 지낸 것 같았다.
“신수가 훤해 보이네?”
“덕분입니다.”
“그래. 내 덕분이지. 그런데 내 덕분인 줄 알면서 이건 무슨 짓이지?”
시후의 말과 함께 지금까지 일행들을 마중 나온 약선방 인원들이 총을 꺼내 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