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린은 보았다.
시후가 단검 손 자루를 굳이 착(着)의 수법을 이용해 방향을 비트는 것을.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 시후는 힘을 쓰는 데 주저가 없는 이였다.
그런 이가 뜬금없이 이화접목의 수법을 펼치다니.
무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던 그때.
시후 뒤로 아미산을 오르는 관광객들이 보였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잔뜩 웅크린 모습이 조금 전 소리에 놀란 모습이었다.
한순간에 상황 판단이 끝났다.
스윽-
“미친!”
장강을 날리자 당연하다는 듯이 시후가 욕설을 내뱉고 그 앞을 막아섰다.
이번에도 이화접목의 수법으로 장강을 멀리 날려 보냈다.
“흐흐, 흐흐흐.”
그 모습에 하도 어이가 없어 실소가 흘러나왔다.
감히 혈천마라강시가 된 자신과 싸우면서 다른 이를 보호할 생각을 품다니.
그것도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남을 말이다.
“어디,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보자.”
펑-펑-펑-
연거푸 장강을 쏘아냈다.
중간의 것은 속도도 달리해 쏘아내었기에 쉽게 막지 못할 터였다.
역시나 쏘아져 올라오던 기세는 멈추고 굳건하게 자리를 잡더니 검벽을 펼쳐 장강을 막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저 검벽이 낯이 익었다.
분명 본 적이 있는데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이런 개또라이를 봤나?! 미쳤어?!”
낯익은 검벽을 기억해 내려는데 욕이 한 사발 들렸다.
혈천마라강시가 된 이후나 그 이전에도 저런 욕은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사실 혈천마라강시는 다른 강시와 달랐다.
일반적인 강시가 혼이 없는 꼭두각시라면 극강의 재생력을 보여주는 혈천마라강시는 혼이 잡혀 있는 강시였다.
즉, 이지를 잃지 않았다는 거였다.
“네깟 놈이 감히 나를 욕해?”
그동안 소교주 곁에 있었기에 감정을 죽이고 있었다.
심장을 내어주며 그의 검이 되기로 한 몸.
감정을 드러내면 그 의지가 흔들릴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소교주가 없었다.
이 더러운 감정을 단번에 쏟아낼 수라쌍극장(修羅雙極掌)을 펼쳤다.
끼에엑-
수라쌍극장 특유의 귀곡성과 함께 어지럽게 흩날리는 기운이 시후를 향해 쏟아졌다.
만약 이것을 피하거나 어정쩡하게 대응했다가는 뒤에 있는 이들이 죽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시후가 수라쌍극장을 막은 후 생기는 빈틈을 찌를 생각이었다.
“검벽이든 이화접목이든. 뭐든 해봐!”
린은 허벅지 안쪽에 숨겨둔 작은 단도를 꺼냈다.
단도의 크기는 작지만 혈강기를 불어 넣으니 일 척 정도의 검기가 솟아올랐다.
그리고 몸을 돌려 허공을 박찼다.
수라쌍극장 뒤에 몸을 숨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검을 휘둘러야 할 타이밍에 되레 검을 거두는 시후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가 한쪽 손을 내지르는 게 보이는 순간.
“천마멸겁장.”
“뭐?!”
엄청난 기운이 수라쌍극장을 밀어내며 자신을 덮쳤다.
급한 대로 내력을 끌어올려 방탄강을 펼쳤다.
급히 내력을 운용하였기에 내장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간신히 버텨냈다.
하지만 어느새 지상에서처럼 눈 깜빡할 사이 코앞에 시후가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단순한 회축차기로 옆구리를 얻어맞았다.
그 충격으로 몸이 'ㄱ' 자로 꺾이며 옆으로 날아갔다.
“크윽!”
벌써 두 번째였다.
지상에서 한 방, 조금 전에 한 방.
다른 어떤 공격보다 이 두 방이 문제였다.
“어찌 된 무공이길래 혈천마라강시의 회복력을 더디게 하는 것이지?”
시후가 내지른 검격에 뚫렸던 어깨와 옆구리는 이미 회복된 지 오래였다.
그런데 지상에서 복부에 얻어맞은 한 방은 아직이었다.
맞은 부분의 내장이 여러 갈래로 찢겨 아직도 수복 중이었다.
그런데 그런 한 방을 더 얻어맞았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별것도 아닌 녀석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렇다고 당장 달려들 수는 없었다.
이번에 얻어맞은 옆구리 공격에 갈비뼈가 박살 나며 폐를 꿰뚫었다.
이 상태로 조금 전 공격을 또 허용한다면 필승을 장담할 수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욱 화가 치밀었다.
“내가 무엇을 포기하고 혈천마라강시가 되었는데….”
여자로 태어나 무인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여인의 삶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시가 되면서 오직 한 주인만을 위한 검이 되기로 했다.
그저 자신의 모든 것이던 그분의 곁에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렇게 얻은 힘으로 이렇게나 밀리다니.
린은 심호흡을 깊게 하며 암벽에 박혀 있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봉우리 위로 날아올라 섰다.
그사이 당장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자식이 건너편 봉우리로 날아왔다.
“넌 뭐지? 어떻게 너 같은 실력자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지?”
당장 달려들고 싶은 욕망을 꾹 누르고 시간을 끌 겸 정보를 캐내려고 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녀석이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이어진 녀석의 말에 린은 이성의 끈을 놓았다.
* * *
시후는 린의 손에서 어지럽게 흩날리는 기운이 뻗어오자 이를 악물었다.
‘또다시 사람들을 노린 수를 쓰다니.’
약점을 정확히 잡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하는 수 없이 천마지기를 끌어올렸다.
“우선 저것부터 해결하고. 천마멸겁장.”
린이 쏘아 내린 광범위한 기운에 천마멸겁장을 날려 소멸시켰다.
예상 밖의 공격이었는지 린이 주춤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다시 한번 순시보를 펼쳤다.
그렇게 린의 코앞으로 이동한 시후는 한쪽 발에 천마지기를 가득 담아 회축차기를 날렸다.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린이 구름 속으로 날아갔다.
“후우, 후우. 이런 소모전은 곤란한데.”
시후는 그답지 않게 심호흡으로 내기를 진정시키며 뒤따랐다.
저 멀리 암벽에 처박혀 있던 린이 몸을 빼내어 봉우리 위에 자리하는 모습에 건너편 봉우리에 섰다.
‘쟤를 어떻게 끌고 간다.’
우는 아이를 사탕으로 달래는 것처럼 꼬실 수도 없고.
벌써 회복하고 있는 저 괴물을 어떻게 데리고 가야 하나 싶은 그때, 의외의 말이 들렸다.
“넌 뭐지? 어떻게 너 같은 실력자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지?”
“……! 응?!”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을 텐데,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말을 걸어온다.
‘설마?’
시후는 독안공을 펼쳤다.
그러자 린의 상태가 그대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갈비뼈가 폐를 부수고 내장이 찢어발겨졌는데 수복 중이라. 그런데 감정 상태가 왜 이래?’
혈천마라강시의 자존심에 상처가 갈 만한 일이 벌어졌으니 뚜껑이 열린 것은 인정했다.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선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솜사탕처럼 생긴 먹구름을 만지는 느낌이랄까?’
다중인격과도 같은 그 감정선이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그것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뭐야, 반푼이였잖아?”
“뭐?! 반, 반푼이?!!”
“왜, 내 말이 틀려?”
“이… 이!!”
몸까지 떨며 치를 떠는 린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시후는 순간적으로 계획을 세웠다.
‘잘하면 끌고 갈 수 있겠어.’
괜히 아미산까지 온 게 아니었다.
어떻게 데리고 가나 걱정했는데 저런 반응이라면 쉬울 것 같았다.
“제 심장까지 꺼내 주고 혈천마라강시가 되었건만 완벽하지 않잖아.”
“……!”
그 말에 린은 움직일 수 없었다.
비아냥거리기는 했지만 저 말은 사실이었다.
[영생과도 같은 재생 능력과 고금제일의 내공으로 주인의 명이라면 심장까지 내어 주리라.]
혈천마라강시를 만드는 제조법에 적힌 내용이었다.
심장을 먼저 내어 주어야 나머지 것들을 얻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시후가 지적한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주인의 명령….”
“그래, 그거. 너 그거 지금 안 하고 있잖아.”
“…….”
린의 주인은 당연히 혈교 소교주 진류강이었다.
그리고 진류강이 마지막에 내린 명령은.
- 소림의 땡중부터 죽여.
린은 생각했다.
그 명령을 들었음에도 왜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
답은 눈앞에 있었다.
소림의 땡중을 죽이기 위해 발을 내딛는 순간 시후가 자신을 이곳까지 날려버렸다.
그런데 그랬다면.
“나는 돌아가야 했다.”
“그렇지.”
“…….”
“이지를 상실하지 않는 것이 다른 강시와 다른 특징이라 하지만, 주인의 명령은 절대적이지.”
“…….”
린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데 너는 우선순위를 주인의 명령이 아닌 ‘주인’으로 인식하고 있잖나.”
“아, 아니… 나, 나는….”
“그게 아니라면 너 스스로 주인에게 가장 방해가 되는 인물인 나를 상대하고 있잖나.”
“아니다! 나, 나는!”
점점 발악에 가까운 외침을 내뱉는 린이었다.
‘다 되었다.’
시후는 그 모습에 마지막 일갈을 날렸다.
“뭣하면 내려가서 네 주인에게 말해줄까? 넌 불량품이라고.”
“미친놈이!!”
쾅-
린은 봉우리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시후가 자신을 도발하는 말을 내뱉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류강에게 자신을 불량품이라고 말한다는 것에 이성의 끈을 놓았다.
혈천마라강시의 자존감과 진류강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폭발한 거였다.
“크하, 하하! 어디 막아보든가!”
시후는 매서운 기세로 쏘아져 오는 린을 향해 큰 소리로 웃어주고는 몸을 날렸다.
사실 시후가 이렇게 린을 도발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제 천마지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린을 상대하기 위해 이번에 보양한 천마지기를 거의 소진했다.
순시보를 펼칠 때, 린의 복부와 옆구리를 공격할 때, 그리고 무혈검에 천마지기를 흘려 넣을 때.
‘앞으로 많아 봐야 두세 번. 그 안에 찾아야 한다.’
시후는 혈천마라강시를 상대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을 찾아 빠르게 산을 올랐다.
드디어 아미산 정상이 보이는 순간 시후는 경공술을 달리했다.
“천마뢰음보.”
우루루-쾅쾅-
천둥이 치는 엄청난 소리가 아미산을 울렸다.
지금까지 펼친 경공술보다 현저히 느린 천마뢰음보를 펼친 것은 순전히 저것 때문이었다.
“꺄악! 어서 안으로!”
“서둘러! 벼락 맞기 싫으면 안으로 들어가라고!”
엄청난 천둥소리에 사찰을 찾은 인파들이 서둘러 안으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래, 그렇게 구석에 짱박혀서 나오지 마라.’
그래야 눈이 뒤집혀 미친 듯이 달려오는 혈천마라강시에게 죽을 일이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인파들을 사찰 내부로 대피시킨 시후는 목적지를 향해 내달렸다.
<무념전(無念殿)>
시후가 무념전을 찾기로 한 것은 숭산을 떠날 때부터였다.
대실산과 소실산을 넘나들며 법정의 흔적을 찾았고, 혈천마라강시의 존재를 알게 된 후로 아미파를 떠올렸다.
천마 시절 숭산에서의 마지막 날.
수많은 고수 중 유독 천마의 앞을 막은 이가 있었다.
아미파 장문인 중현사태(重賢師太).
무위로만 따진다면 천마가 100초식 안에 목을 날려버릴 수 있는 이였지만 그녀의 손에 들렸던 검에 의해 천마는 위기를 맞이했다.
<멸마절지검(滅魔絶之劍)>
모든 마를 제거하고 끊어 버리겠다며 만든 그 검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매번 내 기를 뚝뚝 잘랐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멸마절지검은 천마지기의 흐름을 뚝뚝 잘랐다.
기의 흐름을 잘랐기에 무공이 끝까지 펼쳐지지 못했고,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었다.
이토록 천마를 괴롭혔던 그 검을 시후가 간절히 찾는 이유는 단 하나.
혈교가 중원에 나타났을 때 아미파가 살아남은 이유.
“저기 있다!”
시후는 무념전 안 중앙에 전시된 녹슨 검 한 자루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 뒤로 악귀와도 같이 얼굴이 일그러진 린이 달려들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두 손에 혈강을 가득 담아 내지르고 있었다.
“수라쌍… 헉!”
서걱-
수라쌍극장을 날리려던 린의 손에서 피어오른 것은 핏빛 기운이 아니었다.
강시가 되어서도 붉은색인 그녀의 피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