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시후는 컨테이너 트럭이 보이는 순간부터 기감을 옅게 퍼트렸다.
그리고 느꼈다.
트럭 뒤에 진열해 있는 혈교인들과 진류강의 존재를.
무엇보다.
‘찾았다.’
당소영이 그들 뒤에 있었다.
다소 불안정한 기의 흐름을 보였지만 살아는 있었다.
‘살아만 있으면 되었다.’
그다음은 어떻게든 자신이 할 수 있었다.
트럭이 움직이고 진류강의 재수 없는 낯짝이 보이는 순간 일행들에게 일렀다.
- 버텨.
입 모양만 보였지만 찰나의 순간 다들 알아들었다.
본래 인질이 잡혀 있는 상황에서 인질을 구하는 가장 최적의 시간은 인질범이 가장 방심했을 때였다.
진류강은 버스에 타고 있던 혈교인들로부터 시후의 낙담한 모습을 수시로 보고받았다.
전화 통화로 들려준 당소영의 비명이 신의 한 수라 생각했다.
‘그랬으니 저리 당당하게 얼굴을 내보였지.’
시후는 저들이 자신의 무위에 대해서 알게 된 시기를 생각해 보았다.
숭산에서 만났을 때로 짐작할 수 있었다.
사상지공의 일 장을 진류강 가슴팍에 날려준 그때.
그 정도의 실력을 가늠했다면 천마지기를 이용한 순시보(瞬時步)를 따라올 수 없었다.
사람이 눈을 한 번 깜빡이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천분의 1초.
순시보는 그 1천분의 1초의 시간을 비집고 근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보법이었다.
이 순시보 역시 이번에 천마지기를 보양하지 못했다면 펼칠 수 없었다.
순시보를 펼친 시후는 어느새 혈교인들을 지나쳐 그들 뒤에 있는 당소영 곁에 내려섰다.
역시나 창백한 혈색의 혈천마라강시인 린이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후는 당소영을 끌어안았다.
그 순간 혈천마라강시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는 것을 봤다.
‘역시, 순시보에도 반응할 만한 녀석이었어.’
천마 시절 보았던 혈천마라강시에 전혀 뒤지지 않는 녀석이었다.
시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잠음영술을 펼쳤다.
그림자 속으로 훅하고 꺼진 시후가 나타난 곳은 일행들의 뒤였다.
이 일련의 동작이 눈 한 번 깜짝일 사이에 벌어졌다.
진류강은 시후의 자리가 바뀐 것에 바로 기를 끌어 올렸다.
“오공혈시한장(五孔血時限掌).”
국숫집 여아를 죽였던 그 장법을 시동했다.
혹시나 하는 심정에 이미 당소영에게 손을 써놓은 거였다.
이제 당소영은 오공에서 피를 흘리며 싸늘한 시체로 변할 거였고 시후는 그에 이성을 잃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린이 그를 상대하기 쉬울 거라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어, 어떻게?!”
시후의 품속에 안겨 있는 당소영이 멀쩡한 모습으로 눈을 스르륵 뜨고 있었다.
당소영에게 오공혈시한장을 펼친 것은 진류강 본인이었다.
장법은 실패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시후가 무슨 짓을 했다는 거였다.
“대환단이나 공청석유 같은 영약이 없다면 치료하지 못할 터인데?”
희대의 영약이 없다면 오공혈시한장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믿기지 않는다는 진류강의 표정에 시후는 비릿하게 웃었다.
“세 번이나 당할 순 없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직도 손이 떨렸다.
당소영을 안은 순간 그녀가 오공혈시한장에 당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를 탈환하고 바로 도주하려던 계획은 수포가 되었다.
그렇다고 당장 오공혈시한장에 당한 것을 치료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마수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하는 방법을 찾았다.
온몸의 기를 역류하게 하는 한기를 막기 위해 일단 그녀의 심장에 막을 쳤다.
제니의 천음절맥을 치료할 때 해보았기에 능숙하게 해냈다.
하지만 천음절맥과는 다르게 기의 흐름을 막기만 해서는 금방 죽을 터였다.
한기가 서리는 것을 막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양의 기운이 필요했다.
직접 기를 불어 넣어주는 게 가장 좋겠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품속에 있던 영약을 먹였다.
‘빌어먹을 땡중. 이것으로 네 빚은 조금이나마 갚았다고 생각하지.’
법정이 남긴 사리를 당소영에게 먹인 거였다.
공청석유의 효과에 버금가는 법정의 사리는 당소영의 입에 들어가는 순간 양의 기운을 그녀의 전신에 퍼트렸다.
덕분에 오공에서 피를 쏟으며 죽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둘러 근본적인 치료를 해야 하는 것은 변함없었다.
심장에 쳐놓은 막이 오공혈시한장의 기운과 법정의 사리의 기운과 충돌하면서 언제 깨질지 몰랐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고작 10초였다.
이미 혈교인들은 매서운 기운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시후 일행들도 이번에 받은 무기들을 장착하며 기를 끌어 올렸다.
진권이 한발 앞서 혈교인들을 마주했다.
그사이 시후는 당소영을 품에서 내려놨다.
“여기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마.”
끄덕-
힘이 없는지 당소영은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시후는 공사장 한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철근이 무더기로 날아왔다.
푹푹푹-
날아온 철근은 당소영을 중심으로 땅에 깊숙이 박혔다.
“저놈들은 절대로 멸절항마진(滅絶降魔陳)을 뚫을 수 없을 거야.”
멸절항마진은 천마 시절 아미파에서 혈교와 맞서기 위해 만든 절진이었다.
항마의 기운을 담은 그것은 혈교인들이 익힌 혈천수라강에 반응했다.
일반적인 이들이라면 그저 오감이 흔들리는 정도로 그치겠지만 혈천수라강을 익힌 이들이라면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을 동반할 터였다.
오직 혈교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그 절진이 지금 시후의 손에서 펼쳐졌다.
오직 당소영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절진이 펼쳐진 것을 확인한 시후는 전장을 살폈다.
‘괜히 소림 사대 수호신승이 아니었군.’
진권의 손에서 펼쳐지는 무예는 혈교인들에게 그야말로 극악이었다.
기본적으로 항마의 기운을 담았기에 혈천수라강이 자랑하는 재생의 능력을 무효화했다.
그 때문인지 녀석들은 진권과 대립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그 뒤로 태산과 인호와 조민은 진권이 혈교인들에게 둘러싸이는 것을 막았다.
아무리 진권이라도 다구리에는 장사 없다고, 적들에게 둘러싸이면 답이 없기에 그런 대형을 유지하는 거였다.
마지막으로 진지춘이 그들의 안쪽에서 장법을 펼쳐 위험에 빠질 만한 순간을 넘기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상당히 팽팽한 싸움이었다.
문제는 저 상황에 혈천마라강시가 개입하면 균형이 한순간에 무너진다는 거였다.
진류강이야 당장 죽는 게 소원이 아니라면 무공을 사용하진 않을 터.
시후는 본래 계획대로 혈천마라강시만 상대하면 되었다.
“그럼, 빚을 받으러 가볼까.”
등을 베인 그 고통과 당소영을 잃을지 모른다는 그 절망감을 고스란히 돌려줄 심산이었다.
한편 진류강은 당소영의 모습이 흐릿해지는 것이 보이자 시후가 진법을 펼친 거라 생각했다.
이 상황에서 허접한 진법을 펼쳤을 리는 없을 테니 우선순위를 바꿨다.
“먼저 소림의 땡중부터 죽여.”
진류강도 전장의 가장 핵심 인물이 진권임을 눈치챘다.
진류강의 말에 린이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 한 발을 내디뎌 균형이 앞으로 쏠린 순간.
코앞에 시후가 나타났다.
쿵-
엄청난 굉음과 함께 린이 하늘로 치솟았다.
진류강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보다 잔뜩 일그러진 린의 표정에 놀랐다.
혈천마라강시가 고통을 느낀다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후를 쳐다봤다.
“어떻게?”
“그놈의 ‘어떻게’는. 대답은 쟤네들한테 들어라.”
퉁-
그 말을 끝으로 린을 향해 시후가 몸을 날렸다.
시후는 진류강에게 다소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지만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순시보를 펼쳐 천마지기를 주먹에 담아 린의 복부를 쳤었다.
위리놈에게 한 방 먹일 때 썼던 방법과 같았다.
그런데도 주먹에 통증이 남았다.
‘마치 거대한 산을 때린 것 같지 않은가.’
결코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다시 한번 자각했다.
린이 시야에 들어오자 시후는 경공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벌써 자세를 가다듬다니.’
린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통에 일그러져 있던 표정은 예의 무표정을 되찾았으며, 어느새 단도 두 개를 역수로 들고 있었다.
어서 덤비라는 듯이 시후를 내려다보면서 말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역시 네놈들은 그게 제일 마음에 안 들어.”
천마 시절의 혈천마라강시들도 린과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으로 자아가 없는 강시와는 다르게 혈천마라강시는 그 자아가 뚜렷했다.
특히, 비약적으로 상승한 내공과 혈천수라강을 극성까지 익혔을 때의 그 재생 능력을 십분 활용했다.
온몸을 일백 조각으로 나누어도 다시 살아나는 존재들.
그렇기에 그들은 주인 외의 다른 이들을 하찮게 여겼다.
시후는 처음부터 최선을 다할 생각으로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챙-
무혈검이 본모습을 드러내며 검은 기운을 흘렸다.
“좋아, 오랜만에 신명 나게 놀아보자고.”
사아악-
시후는 무혈검에 천마지기를 흘려 넣었다.
그러자 무혈검에서 흘러나오던 검은 기운이 검신을 감쌌다.
예기(銳氣)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무혈검이 순식간에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검신을 보였다.
“무혈일식(無血一式). 천관검(天貫劍).”
무혈검이 있어야 비로소 펼칠 수 있는 무혈식(無血式)이 시후의 손에서 펼쳐졌다.
하늘까지 꿰뚫는 천관검 초식은 일직선의 찌르기였다.
신검합일(神劍合一)의 경지를 담아서 말이다.
어느새 무혈검과 하나가 된 시후가 단숨에 린을 꿰뚫어 버릴 기세로 쏘아 올라갔다.
린은 역수로 쥐었던 단검 중 하나를 정수로 돌려 쥐고는 두 검을 교차시켰다.
그리고는 시후의 무혈검 끝에 교차 된 단검의 점을 맞대었다.
쩌저저정-
엄청난 굉음과 함께 린이 다시 한번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언뜻 보면 천관검에 린이 당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시후는 쓴 입맛을 다셨다.
“칫. 천관검을 점의 묘리로 막다니.”
린은 천관검의 엄청난 기운이 모인 검 끝에 자신의 단검 두 자루를 교차한 그 한 점에 기운을 집약해 막았다.
본래라면 상반신을 날려버릴 기운이 고작 하늘 높이 날려버리는 것에 그쳤다.
시후는 기세를 놓칠세라 다시 한번 하늘을 박차고 쫓아가려 했다.
그런데.
“꺄아악!”
어디선가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소리를 찾아 시선을 돌리니 아미산을 오르는 관광객들이 보였다.
그들은 조금 전 굉음에 천둥 번개라도 치는 줄 알고 잔뜩 웅크려 있었다.
“젠장.”
지상에서 혈천마라강시와 싸웠을 경우 엄청난 피해가 일어날 것을 우려했었다.
그래서 굳이 린의 복부를 쳐올려 아미산으로 날린 거였다.
그런데 이런 곳에 저만한 인파가 모여 있을 줄이야.
이대로 계속 싸웠다가는 눈먼 검기에 저들이 다칠 수도 있었다.
“칫.”
시후는 혀를 차며 다시 날아올랐다.
어느새 린은 몸을 가누고 있었다.
신형이 멈추자 린은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천관검의 위력을 단검 두 자루를 겹쳐 점으로 방어했으나 그 피해를 전부 막지는 못했다.
상반신이 날아가는 것은 면했지만 양쪽 어깨와 옆구리가 터져버렸다.
그리고 단검의 검신도 사라져 버렸다.
린은 쏘아져 올라오는 시후를 향해 손 자루만 남은 단검을 던졌다.
단지 던진 것뿐이었지만 그 기세는 매서웠다.
시후는 날아오는 단검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기에 무혈검을 내질렀다.
가볍게 쳐낼 수도 있었지만, 관광객들이 신경 쓰였다.
휘릭-
단검 자루가 무혈검에 닿는 순간 검착(劍着)을 펼쳐 붙들었다.
그리고는 검신을 돌려 방향을 비튼 후 검경(劍勁)을 펼쳤다.
단검 자루는 직각으로 꺾여 산세가 험한 곳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쾅쾅-
구름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암벽에 처박힌 게 분명했다.
시후는 이것으로 관광객들을 지켜냈다 생각했다.
하지만.
스윽-
“미친!”
린이 핏빛 기류를 손에 휘감더니 장강(掌罡)을 쏘아냈다.
잔뜩 웅크린 관광객들에게로 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