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시후는 전날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판다 연구소를 검색해봤다.
그리고 찾은 이미지에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 흰색과 검은색의 조화가 어우러진 모습하며 통통한 뱃살과 멍청해 보이는 행동들까지.’
시후는 판다의 매력에 그대로 빠져들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숙소에서 나와 일행들을 불렀다.
그것도 무려 어기전성(御氣傳聲)의 수법으로 말이다.
- 모두 어서 나와!
일반적인 전음술과 다르게 목소리에 기를 담아 뇌로 직접 때리는 수법이었다.
덕분에 깊은 수면에 빠진 사람도 이 수법에는 단숨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천마 시절 지괴에게 한 소리 들은 다음 날에는 어김없이 그것으로 지괴를 깨워줬었다.
그런 소소한 복수에 사용하던 어기전성을 지금은 판다를 보고 싶다는 일념에 펼쳤다.
덕분에 일행들은 해가 뜨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야! 강시후! 잠 좀 자자!”
태산이 방문을 벌컥 열고 소리쳤다.
그 뒤로 하나둘씩 방문을 열고 나와 이미 마당에 나와 있는 시후를 발견했다.
한쪽 눈을 겨우 뜬 그들의 눈에도 시후는 잔뜩 들떠 보였다.
“빨리 가야 한다고. 그 녀석들을 보려면 아침부터 가야 한단 말이야!”
“하아… 저 미친 자식.”
시후의 오두방정에 태산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태산과 같은 심정이었다.
시후는 어제저녁 자신이 검색한 판다에 대해 단체 채팅방에 장렬하게 서술했다.
직접 내려받은 이미지를 수없이 올렸으며 판다의 매력을 쉼 없이 떠들었다.
덕분에 일행들은 단체 채팅방 알람을 무음으로 해놓은 후에야 잠들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침까지 이어질 줄이야.
한껏 욕을 해주고 싶었지만 시후의 천진난만한 표정을 보니 그럴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는 정말 반로환동한 고인으로 보였던 시후가 저런 표정을 하고 들떠 있으니 이제야 제 나이로 보였다.
“그래. 강시후. 가즈아~!”
태산과 인호는 시후의 장단에 맞추어 주기로 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준비를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진지춘을 제외하고 말이다.
“도련님… 꼭 이렇게 아침부터 움직여야 합니까?”
“당연하지. 빨리 나와.”
“저 어제 운전을 너무 열심히 했더니….”
“저승 가는 길에 운전하고 싶지 않으면 나와.”
“……! 역시 판다는 아침에 보는 게 제일이죠! 암요!”
진지춘의 투정을 한 마디로 일축한 시후였다.
잠시 후 일행을 실은 버스가 빠른 속도로 달려 판다 연구 기지에 도착했다.
아직 개장 전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거봐. 내가 일찍 와야 한다고 했지?”
버스에서 내린 시후가 즐비한 인파를 보며 투덜댔다.
그 모습에 다들 하고 싶은 말을 삼킬 뿐이었다.
‘여기 오픈 시간은 7시 30분이야!’라고 말이다.
여전히 들뜬 시후를 선두로 일행들은 줄을 이어 섰다.
드디어 매표가 시작되고 시후와 일행들은 이정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여기 이름은 왜 연구소야? 동물원이 아니라?”
곳곳에 적혀 있는 연구소(硏究所)라는 한자에 시후가 물었다.
그 말에 조민이 슬쩍 다가왔다.
“이곳이 번식을 주목적으로 하는 곳이라서 그래요.”
“번식을?”
“네. 판다는 귀여운 외모와 생김새에 걸맞게 엄청 게으르거든요. 오죽하면 번식에도 게을러서 멸종 위기에 처해 있대요.”
“그래서 이런 거를 만들어서 번식을 종용한다?”
“맞아요. 거기에 판다를 보러 오는 관광객을 유치해 수익을 창출하니까. 중국으로서는 일거양득인 셈이죠.”
누구의 생각인지 모르지만 꽤 괜찮은 방법이었다.
멸종에 처한 동물도 구하고 그 치명적인 귀여움을 상품화해 돈을 벌고.
무엇보다 저만한 귀여움을 장착한 동물을 선별하다니.
“대애애박!!”
드디어 보인 판다의 모습에 시후는 육성으로 놀라움을 표현했다.
성인만 한 덩치의 녀석들은 하얀 얼굴에 귀와 눈 주위만 검은 털로 뒤덮여 마치 검은 반점 같았다. 몸뚱어리는 전체적으로 흰색이었는데, 팔다리와 등 부분은 검은색이었다.
무엇보다.
“뒤뚱뒤뚱 걷는 저 걸음걸이!!”
멍청한 표정은 판다의 매력을 한층 부각시키는 매력 포인트였다.
거기에 걷기 귀찮다는 듯이 한자리에 앉아 대나무를 씹어대는 저 시크함.
“완전 취향 저격이야.”
시후는 판다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다른 이들도 시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귀여운 판다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귀여워요?”
당소영이 즐거워하는 시후 곁에 다가왔다.
“완전. 어찌 저 귀여운 생물을 이제야 알았을까 싶을 정도야.”
“후훗. 그렇게 귀여우면 한 마리 키우시지 그러세요?”
“그게 가능해?!”
시후가 고개를 홱 돌려 당소영을 쳐다봤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후의 눈빛에 당소영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처분할 금은보화 정도면 이만한 시설을 직접 차리실 수도 있을걸요?”
“진짜?!”
판다를 직접 키울 수 있다는 당소영의 말에 시후는 한껏 들떴다.
“안 돼요!”
조민이 단호하게 찬물을 끼얹었다.
“오빠, 지금 당 언니가 장난치는 거잖아요.”
“뭐야?!”
“후훗. 죄송해요. 도련님께서 그런 표정을 지으시니 저도 모르게 좀 놀리고 싶었어요.”
시후는 한껏 들떴던 기분이 착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각했다.
자신이 얼마나 애처럼 굴었는지를 말이다.
‘아… 이게 현타구나.’
순식간에 찾아온 부끄러움에 당소영을 째려봤다.
하지만 눈치 빠른 당소영.
“호호, 저는 가서 마실 것 좀 사 올게요~.”
어느새 물러났는지 인파 속을 내달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당소영의 모습에 시후는 실소를 했다.
‘저런 모습은 닮지 않았네.’
진소령도 천마와 친해지니 장난을 자주 치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장난에는 귀티가 묻어났다.
조신한 몸짓과 조리 있는 말투로 천마를 들었다 놨다 했었다.
한 예로, 당과를 가장 맛나게 만드는 곳이 당가라고 너무나도 진지하게 말해 그가 직접 당가를 찾아갔었던 적이 있었다.
당가 녀석들은 어이없는 말을 내뱉는 천마에게 자존심이 상했다며 죽을힘을 다해 덤볐었다.
덕분에 당가의 한 분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다.
천마는 일단 이유가 어떻든, 자신에게 덤볐으니 끝을 봐야 한다며 사천에 있는 당가의 본문을 찾았고 거기서 당가 가주 늙은이와 독으로 내기를 했었다.
‘당가에서 내주는 석 잔의 술을 마신다면 가주가 직접 석고대죄 하겠다고 했던가.’
이미 만독불사지체를 이룬 천마였기에 당가에서 내주는 독주(毒酒) 석 잔을 연거푸 마셨다.
알싸하면서 위가 따끔해지는 맛이라며 일평을 해준 후 당가 가주 늙은이와 술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판이 당가 가주 늙은이와 천마를 엮어주려는 진소령의 계략이었음을 말이다.
그렇게 진소령은 의미 없는 장난을 친 적이 없었고, 당소영처럼 저렇게 도망치지도 않았다.
어째서인지 인파 속으로 사라져가던 당소영의 뒷모습이 벌써 그리워졌다.
“내가 무슨 생각을….”
시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애써 자신의 감정을 거부했다.
그사이 대나무를 해치운 판다들이 사육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판다는 원래 활동 시간이 적은 만큼, 사육장으로 돌아가 잠을 자려는 거였다.
관광객들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판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시후 역시 작게 손을 흔들었다.
사라지는 판다의 뒷모습을 보니 기분이 고양된 느낌이었다.
“좋아. 이 기분으로 아미산까지 단숨에 가볼까?”
시후는 오늘 안으로 아미산에서의 일을 끝내볼 생각이었다.
사실 시후가 아미산을 찾아가는 것은 오로지 혈천마라강시를 상대할 방법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뜻하지 않게 무혈검을 얻었고 천마지기를 보양하기는 했지만, 아직 부족했다.
그만큼 혈천마라강시는 큰 변수였고 주의해야 할 상대였다.
“이제 저 녀석들에게도 알려 줘야겠지.”
소림사에서 혈천마라강시를 만난 이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으니 그쪽에서 무슨 반응이 올 때가 되었다.
빠르면 아미산에서 녀석들을 만날 수도 있었다.
한국에 만난 혈교 녀석들 정도의 실력자들이 나타난다면 일행들에게는 쉽지 않은 싸움이 될 터였다.
시후가 일행들에게 바라는 것은 딱 하나.
자신이 혈천마라강시를 상대할 동안 살아 있기만 하면 되었다.
그랬기에 이제는 일행들에게 말해줄 때가 된 것 같았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 했던가.’
이기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버티는 시간이 늘어날 것은 분명했다.
이제 가자. 할 말도 있으니 서둘러 주차장으로 가자.
시후는 어기전성으로 일행들을 불렀다.
버스에 오르면 혈교와 혈천마라강시의 존재와 대응법을 말해줄 참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버스에 오른 시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런 개자식들이!”
분노에 가득 찬 욕설이었다.
* * *
진류강은 소림사에서 황 장로에게 불시에 일장을 허용했었다.
익히 알고 있던 황 장로의 무위가 아니었으며, 그가 사용한 장법 또한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
“흐읍, 후… 흐읍, 후….”
진류강은 운기조식에 버금가는 호흡법으로 심장 박동을 조종했다.
처음보다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세 시간에 한 번씩은 이렇게 다스려줘야 했다.
“빌어먹을 사상지공. 혈영수까지 사용했건만 아직도 이 정도라니.”
약선방에서 그토록 빼내기 위해 노력했던 사상지공이 황 장로의 손에서 펼쳐지는 순간 진류강은 확신했었다.
그는 황 장로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어떻게 그만큼 완벽하게 변용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를 그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를 감시하라고 지시했었다.
무공 수위가 남다른 것을 이미 알았기에 은신술에 능한 교인들일지라도 쉽지 않았다.
대신. 첨단문물을 사용하기로 했다.
지금 진류강 앞에 놓인 태블릿 PC에서 보이는 화면처럼 거리가 700m는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촬영했다.
혹시 몰라 촬영하는 이들 또한 은신술을 익힌 자들이었다.
그동안 알아낸 것이 있다면 황 장로로 변용한 그의 곁에는 약선방의 장로도 있었으며, 한국인들도 같이 움직인다는 거였다.
그리고 화려한 캡슐 방에서 나올 때 황 장로 대신 다른 남자가 있었다.
그들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최대한 들키지 않도록 미행을 했다.
그러다 버스에서 그 남자가 새로이 만난 여자와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봤다.
그 순간 진류강은 지시했다.
그 여자를 납치해 오라고.
그 결과, 지금 진류강 앞에는 당소영이 잠든 채 의자에 묶여 있었다.
“깨워.”
진류강의 손짓에 창백한 혈색의 붉은 눈을 가진 린이 손을 썼다.
“으음… 여, 여긴?”
잠에서 깬 당소영은 주변부터 살폈다.
물건이라고는 의자 몇 개가 전부인 허름한 창고.
붉은색 장포를 입은 자들이 양쪽으로 즐비해 있었고, 자신의 앞에 날카롭게 잘생긴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당소영은 심장에 비수가 꽂히는 느낌이 들었다.
당소영이 말이 없자 진류강이 입을 열었다.
“묻는 말에 답만 잘해 주시면 곱게 보내 드리겠습니다.”
“…네.”
당소영은 빠르게 상황 판단을 했다.
저자의 말에 반하는 행동을 해서는 득을 볼 게 없었다.
질문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따르는 게 답이었다.
“당신들이 향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아미산이요.”
“아미산이라…. 정확히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거기까지는 알지 못해요.”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가는 겁니까?”
“무엇을 찾으러 간다고만 알고 있어요.”
“무엇을요?”
“그것도 거기까지는 알지 못해요.”
“으흠….”
몇 가지 질문을 더 해보았지만 당소영이 알고 있는 것은 한정적이었다.
심도 있는 답은 들을 수 없다는 것에 진류강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당소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혈교인가요?”
“그렇습니다.”
“저희를 추적한 목적이 무엇인가요?”
“원하는 것을 얻고자 했으나 지금은 죽이는 게 목적입니다.”
진류강의 말에 당소영은 시후를 떠올렸다.
조민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시후의 등에 생긴 커다란 검흔(劍痕)이 이들 때문이라는 것을.
그 때문일까.
찰나의 순간에 당소영의 눈에서 살의가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것을 진류강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그 사람과 꽤 다정해 보였지요.”
“…….”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진류강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리고.
“당신이 죽으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