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언제부터였던가.
마천서생(魔天書生) 평수혁(平數侐)이 내 침소의 문을 두드렸던 것이.
똑똑-
“교주님, 저 수혁입니다.”
“또 왜?”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 들르게 되었습니다.”
“…….”
“교주님?”
내가 아무 말도 없자 마천서생이 재차 대답을 요구했다.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이곳까지 찾아온 수고를 생각해 하는 수 없이 손을 휘저어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이 시간에도 정갈하게 차려입은 녀석이 싱긋 웃으며 모습을 보였다.
“쯧. 너 지금 축시(丑時)인 거는 아냐?”
“이제 겨우 축시입니다.”
다들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을 시간임을 알면서도 저 자식은 상관없다는 듯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또 뭔데?”
“이번에 중원으로 나가시는 여정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녀석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무엇을 말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녀석 역시 지금 내가 느끼는 분노를 알고 있을 터였다.
아니, 어쩌면 녀석은 나보다 더할 터였다.
그런 녀석을 안쓰러워하는 내 마음이 표정에서 드러난 것일까.
지금까지 줄곧 싱긋 웃고 있던 녀석의 얼굴에 처음으로 어둠이 드리워졌다.
“아닙니다.”
“누가 뭐래?”
“하지만 가시는 여정에 대해….”
“알았어.”
“……! 지금 아셨다고 하신 겁니까?”
“그래. 청성, 화산, 무당, 소림으로 갈 것이니 그리 계획을 짜봐.”
“탁월하신 선택이십니다.”
“알았으면 나가봐.”
녀석은 내 축객령에 허리를 깊이 숙이고는 등을 돌렸다.
본래라면 그냥 내보냈을 테지만 오늘은 어째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평수혁.”
내 부름에 녀석은 한차례 몸을 움찔하더니 멈추었다.
“그녀는 너도 좋아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며 말하는 녀석의 등이 들썩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내 눈에 차오르는 눈물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 * *
시후는 일천 년 전 천마전에서 마천서생을 마지막으로 봤던 밤을 되새겼다.
“그런 너는 결국 내게 등을 돌렸었지. 그리고 지금 이렇게 다시 내 앞에 선 것이냐.”
시후는 단상 위에 놓인 판관필(判官筆)을 보며 마천서생 평수혁을 떠올렸다.
푸른색 옥으로 만든 판관필은 마천서생의 애병기로, 생긴 것처럼 옥룡(玉龍)이라 불렸었다.
시후가 그렇게 단상 앞에서 움직이지 않자 진권이 다가왔다.
“아시는 물건이십니까?”
“뭐, 좀.”
“상당히 귀해 보이기는 합니다. 그런 것에 문외한인 제가 봐도 귀해 보입니다.”
“귀하지. 신교 10대 보물 중에 하나였으니까.”
“신…교요?”
시후는 더 이상 진권의 질문에 답해주지 않았다.
진권 역시 시후가 더는 입을 열지 않자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여기에 이만한 보물 창고가 있는지는 어찌 아셨습니까?”
“몰랐어.”
몰랐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저 법정이 진권을 통해 남겨 놓은 단서가 화산을 지명했고, 이곳에 막연하게 무언가 있을 거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이런 보물 창고일 줄이야.
거기다가 황 노인과 마천서생의 흔적까지.
이런 것들을 종합해보면 한 가지 결론에 자연스럽게 도달할 수 있었다.
“너희들이 나 몰래 이런 안배를 해 놓았다는 거지.”
그랬다.
대실산 공동에서 보았던 벽화가 진실임을 알려주는 흔적이 이것들이었다.
“그리고 황 노인과 마천서생이라 불린 너희 둘의 합작이라면….”
시후는 머리 좋고 손재주 좋기로 소문난 둘이 손을 잡고 무언가를 했다면 이게 끝이 아닐 거라는 생각에 판관필을 집어 들었다.
그그극-
판관필이 들리자 단상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대신 앞에 있던 벽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열렸다.
그 안에는 좀처럼 놀라지 않던 시후의 두 눈이 부릅떠질 정도의 물건이 걸려 있었다.
검은색 천이 휘감겨 있는 사척(四尺) 길이의 그것은 검(劍)이었다.
“저게 어떻게….”
시후는 떨리는 손으로 검은색 천이 감겨 있는 검파(劍把)를 잡아 들었다.
그리고 손을 타고 들어오는 싸한 느낌에 확신했다.
‘진짜 너구나. 무혈검(無血劍).’
천마 시절, 검을 무기로 삼았던 그의 애병기였다.
천마동 비고 깊숙이 숨겨져 있던 현철을 황 노인이 가공해 만든 검이었다.
그리고 무림 정복을 위해 나섰던 마지막 장소인 소림사에서 화경에 다다른 문주들과의 싸움에서 놓쳐 잃어 버렸었다.
무혈검에 감아져 있는 천을 벗기자 황금색과 붉은색이 어우러진 검집에 꽂힌 검이 모습을 드러났다.
시후는 망설임 없이 검파를 잡고 검을 뽑았다.
그러자 검신(檢身)부터 검파까지 전부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무혈검의 모습이 드러났다.
“특이한 검입니다.”
“특이하지. 그리고 특별하지.”
“그런데… 어째 불길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역시 소림 땡중이라 이건가. 이걸 느끼게.”
진권의 말대로 무혈검에서는 특별한 기운이 흘러나온다.
그가 불길하다고 느낄 만큼 싸한 기운.
일반인이라면 등골이 오싹한 정도로 느낄 그 기운은 검신 전체를 현철로 만들었기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난 특징이라고 황 노인이 말했었다.
시후는 손끝을 타고 들어오는 그리운 느낌에 젖어 들다가 무혈검을 감았던 검은색 천에 시선이 갔다.
자세히 보니 그것에는 안광을 돋워야만 보일 정도로 희미하게 글씨가 적혀 있었다.
현대 시대에 사용하는 한자가 아닌, 천마 시절에 보던 한자였다.
[교주님. 못난 서생 평수혁, 교주님의 피가 젖은 이 천에 눈물로 글을 올립니다.
법정 스님이 읽으신 천기에 따라야만 하는 소인이 원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의 천기를 부정하고 싶었으나 소인이 읽은 천기 또한 일치했기에 궁귀와 화마신녀까지 속여가며 교주님을 떠나보냅니다.
분노와 고독이 가득한 가시밭길을 걸어가실 교주님께 작은 도움이 되고자 재물을 남깁니다.
지옥에서나마 다시 교주님을 모실 날, 석고대죄 하는 마음으로 맞이하겠나이다.]
마천서생 평수혁이 남긴 글이었다.
후회로 시작한 그의 글은 후회로 끝을 맺었다.
시후는 이미 대실산 벽화에서 법정이 벌인 일들과 후에 일어난 일들을 보았기에 화가 치밀지 않았다.
그저 마천서생이 천기를 읽을 수 있었다는 것에 놀랐고, 어쩔 수 없이 이 계획을 짜기 위해 속앓이를 했을 그가 안쓰러웠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야 한다지만, 굳이 이 방법뿐이었더냐.”
그제야 그날 밤, 마천서생이 천마전에 찾아와 봉문을 하며 갈 문파를 줄이자는 말의 속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진소령을 잃고 분노에 휩싸여 혈교주를 죽였지만, 그 뒤에 있던 더러운 진실에 황실을 공격하려던 자신을 말릴 수는 없었을 거였다.
진소령이 죽는 순간 이미 중원 침략과 황실과의 대립은 확정된 거였으니 다른 방법으로 천 년 후의 악업에 대비한 방도를 구상했다.
그게 천마였던 자신을 강시후로 만드는 방법이었을 뿐.
대실산을 내려온 이후 점점 퍼즐 조각이 맞추어지는 상황에 시후는 생각에 잠겼다.
그들이 천기를 읽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을 예측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벌어질 참상을 막을 가장 강력한 패로 천마를 택한 것일 뿐.
앞으로 그들이 안배해 놓은 것들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해 혈겁을 막을지는 오로지 시후의 몫이었다.
“좋아, 해주지. 너희가 남겨 놓은 것들을 모두 사용해 혈겁을 막아주마. 대신, 너는 지옥에서 만나는 날 뒤질 줄 알아라.”
이미 지옥에 있을 마천서생에게 악담에 가까운 덕담을 남기는 시후였다.
그 말을 들은 진권은 조용히 합장했다.
“아미타불, 공수래공수거라 하였습니다. 모든 인간은 어차피….”
“넌 무공 쪽에만 눈치가 있는 거였구나.”
시후는 진권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지금은 네가 끼어들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 거였다.
진권이 입을 다물자 시후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이곳에 있는 금은보화들을 현재 시세로 환산한다면 천문학적인 금액이 될 터였다.
‘저만한 돈이 필요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건가.’
천마신교에서 지괴와 함께 똑똑하기로 소문난 마천서생이 남겨 놓은 것이니 틀림없었다.
“이것들을 옮겨야겠어.”
“여기 이 보물들을 전부 말씀입니까?”
“그래. 들고 가기 좋게 진열장과 궤짝이 준비되어 있잖아.”
“아니… 지금 저희가 어디 있는지 잊으신 겁니까? 여기는 화산 정상입니다.”
진권은 시후가 어떻게 화산 정상에서 저 많은 금은보화를 CCTV에 걸리지 않고 갖고 내려가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저만한 것들을 옮기려면 꽤 많은 인원을 동원해 케이블카에 실어 내려 보내고 주차장에서 트럭에 옮겨야 할 터였다.
그런데 시후는 그런 진권의 고민이 무색하리만큼 손을 슬쩍 들어 해결했다.
덜컥-덜컥-
시후가 허공섭물을 일으키자 금은보화들이 궤짝과 진열장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시후가 창고를 나서자 그것들이 뒤를 따랐다.
진권은 시후가 펼치는 무공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도대체 내공이 어느 정도기에 저만한 허공섭물의 경지를 보여주는지.
두 눈을 비비고는 눈을 부릅뜨며 다시 보아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시후는 그런 진권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다가 한 가지 잊은 게 생각났다.
“아! 한 가지 문제가 있구나.”
“그, 그렇지요?! 이만한 것들을 이렇게 해서 숙소까지 가실 수 있을 리 만무하겠지요.”
진권은 시후가 지금 무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이만한 허공섭물을 보일 수는 있지만, 화산을 내려가는 것은 어려울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시후가 말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무슨 헛소리냐. 내려갈 때는 올라올 때보다 더 빠르게 내려갈 터인데 네가 늦을 것 같아 하는 말이거늘.”
“네?”
“뭐, 그래서 말인데 너 이것 좀 배워라.”
“무엇을….”
시후는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에 생각했던 대로 진권에게 경공술 하나를 가르칠 생각이었다.
태산과 인호와는 다르게 진권은 이미 무공에 조예가 깊으니 구결만 알려줘도 바로 사용할 수 있을 터였다.
“푸른 하늘에 자유로이 떠가는 구름을 보니 세상 속에 빠른 것은 나 하나이구나.”
“그것이 무엇입니까?”
“달마청운보(達磨靑雲步)라 한다.”
“네?!”
시후의 입에서 달마가 거론되자 진권은 깜짝 놀랐다.
진권이 그러거나 말거나 시후는 달마청운보의 구결을 읊었다.
진권은 시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구결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듣다가 두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어 앉았다.
그러고는 그 구결을 되새기며 내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역시, 무공에 있어서는 눈치가 빨라.”
시후가 진권에게 달마청운보의 구결을 알려준 것은 진권이 달마신공(達磨神功)을 익히고 있어서였다.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경공에 대한 것은 배우지 못한 것 같았다.
이미 심법에 대해 알고 있으니 저렇게 명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바로 펼칠 수 있을 거였다.
잠시 후 진권은 천천히 눈을 떴다.
시후에게 묻고 싶은 것은 많았으나 그는 대답해주지 않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궁금한 것은 내려가서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알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화산의 밤하늘에서 잔뜩 들뜬 진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