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김철수를 그렇게 보낸 시후 일행은 서둘러 집을 나섰다.
진지춘이 운전하는 버스에 올라 화산파로 향했다.
“도련님, 조금만 더 가면 화산이 보일 겁니다.”
그 말에 시후는 살짝 들떴다.
화산파에 무엇이 있을지.
‘법정이 일천 년의 시간을 지나 남긴 양피지에 적힌 목적지, 화산파. 과연….’
법정이 무언가 남겨 두었다면 그것은 일천 년 전에 그리했다는 거였다.
그것을 무시하고 아미산으로 향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이번에 얻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은 아니지만, 혈천마라강시를 완전히 제압하기는 쉽지 않을 거야.’
블칸 영주를 속박에서 풀어주면서 얻은 마기를 떠올렸다.
덕분에 천마지체가 고양되어 혈교 녀석들을 상대하는 데 있어 한 수가 생기기는 했다.
그렇다고 완전한 승리를 장담할 수 없기에 혹시나 해 법정의 안배를 확인하려는 거였다.
“쯧. 찝찝하지만.”
뜻이야 어떻든, 자신에게 마지막 일 장을 날려 지금의 상황을 만든 법정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게 기분이 상했다.
덕분에 일행들만 죽을 맛이었다.
당장 궁금한 게 넘쳐났는데 물어볼 타이밍을 잴 수가 없었다.
시후의 표정이 수시로 변해서였다.
그러다 화산이 보인다는 말에 시후가 들뜬 표정을 짓자 기다렸다는 듯이 조민이 다가왔다.
“오빠, 이제 괜찮아요?”
“뭐가?”
“아니… 계속 인상 쓰고 있길래요.”
“아… 뭐, 별거 아니야.”
조민의 말에 시후는 다른 일행들의 표정을 살폈다.
‘내 눈치를 봤구나.’
괜히 다른 일행들을 불편하게 만든 것 같아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화산파에 오르면 벌어질 일에 대해 좀 생각하느라 그랬어.”
“아, 그랬구나….”
이해한다는 듯한 말과는 다르게 조민의 표정은 무언가를 더 원하고 있었다.
“뭐야, 진짜 궁금한 게?”
시후가 조민의 표정을 읽고 되물었다.
그러자 조민이 바짝 다가와 물었다.
“아까 S.W SOFT 직원에게 왜 그런 조건을 제시한 거예요?”
“NPC와의 비무?”
“네, 저는 오빠가 레전드리 아이템이나 골드를 원한다고 할 줄 알았어요.”
“뭐, 그런 것들이 필요할 수도 있지. 하지만 지금은….”
일대일 비무에서 대패한 이 치욕을 씻을 기회를 얻어야해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놈 말이 너무 신경 쓰였어.’
위리놈이 마지막에 남긴 ‘다음에 볼 때는 웃으면서 보자’라는 말이 어째 다음에 싸울 기회는 없을 거라는 말처럼 들렸었다.
그래서 시후는 Safety World를 운영하는 S.W SOFT에 이런 조건을 제시한 거였다.
어차피 당장 접속할 수도 없으니 고민은 S.W SOFT에 떠넘겼다.
시후는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일행들의 표정에 대충 둘러대기로 했다.
“스페셜 히든 퀘스트의 주역인 위리놈을 다시 만날 필요가 있어 보였으니까.”
“와~ 오빠가 거기까지 생각하시고 계약 조건을 그렇게 내걸다니, 대단해요!”
“뭐, 그렇지… 잠깐.”
어째 조민의 말투가 상당히 거슬렸다.
그동안 생각 따위 전혀 하지 않았느냐는 말처럼 들렸다.
조민은 자기 말의 속뜻을 시후가 눈치챈 것을 보고는 혀를 삐쭉 내밀고 자리를 떠났다.
급히 조민을 불러 세우려는데 이번에는 태산과 인호가 다가왔다.
“근데 너 진짜 리그전 나갈 거야?”
쉴 틈이 없었다.
“뭐, 기회가 된다면?”
“그럼, 진짜로 프로게이머가 될 거고?”
“그것도 할 수 있다면.”
“와… 그럼 학교도 그만둘 거야?”
“학교는 왜?”
“보통은 프로게이머 되면 학교 그만두잖아.”
인호의 말은 이랬다.
고등학생이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는 이유가 무엇이냐부터 시작했다.
적성에 맞는 학과나 좋은 대학을 가는 이유가 모두 밥벌이를 위한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거였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태산과 인호의 눈에 시후는 딱히 학업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거기에 이제는 S.W SOFT에서 프로게이머 계약서까지 들이밀었으니.
당연히 학교를 그만둘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후의 생각은 달랐다.
“그거 해도 학교는 그만두지 않을 거다.”
“뭐? 왜?”
“학교에 다녀야 너희랑 놀지.”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요즘 들어 생각한 건데, 새 학기부터는 공부에 집중 좀 해볼 생각이었다.
병원장인 아버지, 유능한 로펌 변호사인 어머니.
강시후로 지내는 동안 부모의 사회적 지위를 생각해보니 대한민국에서 두 분의 아들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대학이라는 겉치레가 필요해 보였다.
천마로 돌아갈 수 없으니 앞으로도 계속 강시후로 살아가야 했고, 강시후의 미래에 부모님은 중요했다.
‘천마 시절에는 느껴보지 못한 가족의 소중함.’
그것을 지키고 싶었다.
되도록 화목한 가정으로 말이다.
그리고 솔직히 태산과 인호랑 노는 게 즐거웠다.
순수하게 자신을 따르고 스스럼없이 친구로 대하는 둘.
천마 시절 자신에게 등을 돌린 의형제들처럼 말이다.
시후는 똘망똘망한 눈빛의 태산과 인호를 봤다.
둘의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이들이 순수하고, 때가 타지 않았는지.
“너희들은 그들과 다르니까.”
“우리가 달라?”
시후의 중얼거림에 태산이 되물었다.
평소라면 대충 둘러댔겠지만 시후는 이 기회에 한 가지를 집어주기로 했다.
“당연하지. 너희 이미 다른 고등학생들과 다른 거는 알지?”
태산과 인호는 서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을 배운 시점에서 너희는 평범한 고등학생이 아니야. 앞으로 너희의 장래가 일반적인 방향으로 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고.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생각해봐. 무림이라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
태산과 인호는 시후의 말에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둘 역시 자신들의 미래가 일반적이지 않을 거라 생각은 했다.
한국대에서 독도 마셔봤고 칼에도 베여도 봤다.
일반적인 고등학생 삶에서는 상상도 못 할 삶과 죽음이 오가는 상황을 여러 번 겪었다.
그래서 둘은 시후를 따르고 싶었다.
시후가 자신들의 이정표가 되어줄 거라 굳게 믿었다.
“우리도 너랑 노는 거 재밌는데.”
“맞아, 웬만하면 너랑 계속 같이 있고 싶은데.”
“그럼, 너희도 하면 되지.”
“뭘?”
“너희도 월드 오브 리그 선발전에 나가보라고.”
“우리가 될까?”
시후는 걱정스러운 둘의 표정에 어이가 없었다.
둘은 아직 자신들의 역량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럴 때는 주야장천 설명을 늘어놓기보다는 기준점을 잡아주는 게 좋았다.
“너희들 아킬라이와 싸우면 어떨 것 같냐?”
“아킬라이 형? 음….”
둘은 시후의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거봐, 계산을 따져봐야 할 정도잖아. 그러니 한번 해봐.”
“그, 그래볼까?”
“셋이 프로게이머 하면 그것도 재미있겠네.”
태산과 인호는 시후의 말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둘은 서로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이번에는 진권이 다가왔다.
“하아… 넌 왜.”
아주 돌아가면서 찾아오고 있었다.
시후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만하자는 뜻이었지만 진권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강 시주, 정말 궁금한 것이 있어서 그럽니다.”
“하아… 뭔데.”
지금 보니 이놈. 눈치가 더럽게 없었다.
‘넌 정말, 화산파에 올라갔는데 아무것도 없기만 해봐라.’
그동안 쌓인 짜증과 울분을 진권에게 모두 풀 생각이었다.
그래서일까, 진권은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헉, 뭐, 뭐지?”
“‘뭐지’는 내가 할 대사고, 그래서 뭐가 궁금한데.”
“크흠, 그게… 진짜 강 시주께서는 반로환동한 선인이신 겁니까?”
“뭐?!”
기껏 질문을 받아줄 준비를 했건만 하는 말이 저런 헛소리라니.
어디서 그런 개소리를 들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느새 버스를 정차한 진지춘이 이쪽을 보고는 사색이 된 표정으로 후다닥 내리고 있었다.
“넌 오늘 뒤졌어.”
훅-
시후는 진권을 뛰어넘어 날았다.
순식간에 버스에서 내린 시후는 진지춘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이, 이게 뭐야?”
분명 화산에 당도했다고 했는데, 시후가 기억하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험난하기로 유명한 화산(華山).
천마 시절, 일만 교도와 함께 오르다가는 산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잃을 것 같아 정예 부대만을 꾸려 올랐을 정도로 화산의 산세는 험난했다.
그만큼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운 이곳에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거기다가 다들 눈에 띄는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있어 화산의 절경이 가려질 정도였다.
거기다.
“저건 또 뭐야?”
이들은 그냥 산을 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일전에 너튜브를 통해 본 기억이 있는 물건을 이용해 편하게 산을 오르라는 안내 표지판이 커다랗게 있었다.
“커험, 강 시주께서는 ‘케이블카’도 모르십….”
“알아.”
뒤에서 촌놈이 으스대며 케이블카를 설명하려 하자 시후는 바로 일축했다.
지금 시후가 궁금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도가로 유명한 화산이 어째서 한낱 관광지로 전락한 것인지 궁금한 거였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얼핏 보기에도 녹이 슬어 보이는 안내 표지판들과 허름한 매표소로 언제부터 이랬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엿보일 정도라니.’
일단은 화산파 본관이 있는 곳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돌팔이.”
“네!”
시후의 진지한 목소리에 도망갔던 진지춘이 후다닥 달려왔다.
다년간의 눈치로 지금은 장난을 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거였다.
“정상까지 바로 갔으면 하는데.”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진지춘은 매표소로 후다닥 달려갔다.
지금이 밤이라면 어둠을 틈타 산을 오르겠지만 훤한 대낮에, 그것도 저 정도 인파의 눈을 피해 산을 오르기에는 다른 이들의 실력이 부족했다.
특히, 정직하게 소림의 무공만을 매진해온 진권이 말이다.
진권은 시후가 자신을 돌아보자 슬쩍 다가왔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그 양피지 너도 봤지.”
“네.”
“분명 ‘화산파’라고 적혀 있었잖아.”
“그렇습니다.”
“그런데 더 할 말 없어?”
“올라가 보면 알겠지요.”
시후는 진권에게 법정이 남긴 정보가 더 있는지 묻는 거였다.
하지만 눈치는 소림사 불상 밑에 두고 온 것인지 진권은 헛소리만 내뱉었다.
‘이 자식 진짜 아는 게 하나도 없네.’
사실 시후는 진권에게 질문을 하는 순간 독안공을 펼쳤었다.
그 결과 진권이 더는 아는 것이 전무(全無)하다는 것을 알았고, 아무래도 직접 법정의 흔적을 찾아야겠다 싶었다.
잠시 후 진지춘이 티켓을 끊어 오자 앞장서 걸었다.
경공술을 펼치면 몇 분 만에 오를 곳을 세월아 네월아 걸어 올라갔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역시 그런 것인가.”
천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니 기억에 남아 있는 화산과 눈에 보이는 화산이 다른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매표하고 다시 버스에 올라 한참을 오르자 그나마 눈에 익은 게 보였다.
옛 양식을 유지하려는 것인지 관문들이 보였다.
꽤 많은 계단을 한참 오르고 나서야 드디어 케이블카가 보였다.
케이블카는 다행히도 6인용이었다.
표를 주고 오르자 케이블카가 천천히 움직였다.
시후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화산의 절경을 봤다.
혹여 자신이 아는 곳이 있나 싶은 거였다.
“훗, 있을 리가. 강산이 변해도 백 번은 변했을…!”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한 시후는 눈을 부릅떴다.
세월의 풍파에 변형이 되기는 했지만 거대한 화산 절벽 중 움푹 파여 있는 그곳.
‘저 손바닥 모양의 자국.’
천마멸겁장의 흔적이었다.
천마 시절 화산을 오르며 날렸던 장법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봉우리 몇 개를 날려버린 후 남아 있던 내력에 의해 저렇게 찍혔을 터였다.
뜻하지 않은 것을 발견한 것에 기뻐하던 사이 어느덧 케이블카가 멈춰 섰다.
“도련님, 내리십시오.”
진지춘의 안내에 따라 내려서자 운무(雲霧)에 뒤덮인 화산이 보였다.
“역시 절경은 절경이로군.”
그러니 여기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였다.
아래보다 더 많은 인파에 시후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 오르면서 가장 먼저 갈 곳은 이미 정해놨었다.
화산파 조사들의 위패를 모아 놓은 그곳.
<옥천원(玉天園)>
안으로 들어서자 관광객들의 손길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들이 보였다.
시후는 그곳에 나열된 위패들을 찬찬히 훑었다.‘분명 그때 그놈 이름이… 저기 있다.’
<운암(雲巖)>
천마 시절 화산파를 봉문할 때의 장문인 이름이었다.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매화 향을 그윽하게 피어오르게 하는 검을 쓰던 녀석이었지.’
운암은 매화신검(梅花神劍)으로 이름을 떨친 화산파 장문인이었다.
그의 위패가 보이는 순간 시후를 일행들에게 손짓했다.
- 나를 둘러싸.
다른 이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자연스럽게 일행들이 그를 둘러싸자 시후는 기감을 넓게 펼쳤다.
블칸 영주 성에서 공주를 찾기 위해 했던 것처럼 옥천원 전각 전체를 훑었다.
그리고 잠시 후.
“찾았다.”
시후의 눈이 번쩍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