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그인하는 천마님-129화 (129/275)

제129화

조금 전까지 블칸 영주가 속박당해 있던 붉은색 의자에 위리놈이 앉아 있었다.

일전에 시후를 처음 대면했을 때의 그 상냥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이다.

시후는 그 면상에 당장이라도 천마멸겁장을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일단은 좀 참고, 찾아야 할 답부터 들은 후에.’

그답지 않게 인내심을 발휘했다.

만약 이곳에 일행 중 누구라도 있었다면 일단 일을 벌인 후에 뒷수습을 맡겼을 터였다.

‘뒷수습은 귀찮단 말이야.’

귀찮음이 호승심을 이겼다.

위리놈은 생각이 많아 보이는 시후에게서 눈을 돌려 블칸 영주를 봤다.

“드디어 자유를 얻으셨습니다?”

“자네 덕분이오.”

“제가 뭘 한 게 있다고. 이 모든 게 계약에 의한 것을요.”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둘이 이러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시후가 독안공을 통해 알아냈듯 위리놈의 정체는 대악마이다.

그것도 ‘죽음의 왕’이라 불리며 수많은 전쟁에서 큰 업적을 남겨 최고 훈장까지 수여받은 자였다.

감히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강함을 가진 위리놈이 블칸 영주와 협력 관계인 것은 모두 ‘악마의 계약’ 때문이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시후는 자신을 배제한 채 둘이서 눈빛을 주고받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자끼리 그런 뜨거운 눈빛 교환은 좀 그런데.”

“이런, 죄송합니다. 하도 오랜만에 뵙게 된 영주님이라 반가움에 그만 실수했군요. 지금은 천마님이 먼저인데요.”

“그런 자세 아주 좋아. 그런데 여기가 진짜 블칸 영주성이 맞는 건가?”

시후는 위리놈이 자신에게 집중하자 흡족해하며 질문했다.

“네. 블칸 영주님을 대신하여 제가 지키고 있는 블칸 영주성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위리놈의 말에 시후는 눈치를 슬쩍 보고는 기감을 넓게 펼쳤다.

‘어딘가에 있을 텐데.’

퀘스트 클리어 조건의 존재를 찾는 거였다.

숨 한 번 내쉬었다 들이마시는 정도의 시간에 블칸 영주성 전역을 훑었다.

그런데.

“…….”

“찾으시는 게 없나 봅니다?”

마치 시후가 무슨 짓을 하는지 다 알면서도 일부러 방관했다는 듯이 말하는 위리놈이었다.

하지만 시후는 저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아무래도 저 대악마의 눈을 피해 무슨 짓을 벌이기는 어려울 것 같아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다.

“이봐, 영감. 영주성인데 왜 귀족이 없지?”

“귀족? 그들이 왜 여기에 있나? 다들 자신들의 보금자리에 있지.”

“아니, 내 말은….”

블칸 영주에게서 힌트 좀 얻으려던 시후는 입을 다물었다.

‘귀족들의 후원을 받아라’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데 필요한 귀족들을 말하는 거라는 사실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이걸 어떻게 돌려 말해야 하나 싶을 때 위리놈이 나섰다.

“명목상의 귀족을 찾으시는 거라면 여기도 있습니다만.”

“뭐?”

“지금 천마님께서 찾으시는 게 ‘귀족’이라는 직위라면 제가 ‘그거’라는 겁니다.”

“…….”

“그래서요? ‘귀족’인 제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요?”

위리놈이 귀족이라면 퀘스트 중 하나는 클리어 조건을 만족할 수 있었다.

‘거기다 영주성 가장 높은 층에 있는 누군가가 공주라면 말이지.’

기감을 퍼트렸을 때 블칸 영주성에서 느껴진 인기척은 넷이었다.

재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위리놈.

풀려난 것에 그저 기뻐하고만 있는 블칸 영주.

자기 할 일은 다 했다는 듯이 구석에서 하품을 하는 블랙 라이칸.

그리고 영주 성 가장 꼭대기 층에 있는 누군가.

그 ‘누군가’가 ‘공주’라면 오늘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도 있을 것 같아 확인이 필요했다.

“뭐, 귀족인 너도 필요하지. 근데 ‘공주’도 필요해서 말이야.”

척-

시후는 검지를 치켜들어 위를 가리켰다.

공주를 거론한 그 손동작은 위리놈과 블칸 영주에게 충분한 힌트가 되었다.

그에 처음으로 위리놈의 미소에 위화감이 떠올랐다.

“유저라는 족속들이 시스템의 가호를 받아 불멸자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가호까지는 아니지만. 뭐, 그래서?”

“그렇다고 눈앞의 상대가 어떤 이인지 파악도 못 하고 그렇게 입을 나불대시면 불멸자라 할지라도 영원히 죽을 수 있습니다.”

다분히 말을 가려 하라는 위리놈의 경고였다.

그리고 그 말에 시후는 확신했다.

‘공주가 맞는구나.’

슬쩍 떠봤더니 위리놈 스스로 공주가 맞는다며 증명까지 해줬다.

왜 공주를 거론한 것에 저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뭐가 되었든 이제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는 조건은 모두 갖춘 셈이었다.

‘공주를 구하고 담벼락을 부수고 저놈에게 후원만 받으면 되는 건데….’

그렇게 되면 보상으로 막대한 경험치가 들어와 레벨업을 할 것이고 현실에서는 내공이 증진되어 혈교와 싸울 때 도움이 될 거였다.

하지만 등산로가 있다고 하여 산을 오르는 것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공주를 구하고 담벼락을 부수는 거야 언제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위리놈에게 후원을 받아야 하는 문제는 좀처럼 해결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조민의 부재가 뼈에 사무칠 정도로 아쉬운 시후였다.

그 때문에 시후의 미간이 좁혀져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아무래도 당신에게는 제가 누구인지 확인시켜 드릴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요.”

시후가 인상을 찌푸린 것이 자기 말에 기분이 상했기 때문이라 생각한 위리놈이었다.

붉은색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위리놈은 서서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루프 앞에서 보았던 어둠의 기운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보통 이럴 때면 조민이 나서서 변명하였겠지만, 지금은 조민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후는 변명 따위 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래, 때로는 생각만 하기보다 몸을 움직였을 때 그 해답이 나오는 법이지.”

어둠의 구역에서 돌아온 이후 줄곧 위리놈의 미소가 신경 쓰였던 시후였다.

자신답지 않게 머리 쓰는 것에 슬슬 질리던 참에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아까부터 네 그 웃고 있는 낯짝이 거슬렸거든.”

천마 시절, 자신의 앞에서 그 어떤 이도 저렇게 웃지 않았다.

아니, 웃는 이는 있었지만 살아 있는 이들은 없었다.

시후는 위리놈이 끌어올리는 기세에 맞추어 내공을 끌어올렸다.

루프 앞에서 7성의 공력이 담긴 천마멸겁장에 아무런 피해도 보지 않은 위리놈을 떠올리며 처음부터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둘이 끌어올린 기운에 당황하는 것은 블칸 영주뿐이었다.

“왜, 왜들 이러나? 자네 둘이 여기서 싸우면 이곳이 어떻게 되겠나, 진정들 좀 하고….”

“그 문제라면 걱정 마.”

자신의 성이 무너질 것에 염려한 블칸 영주에게 시후가 씨익 웃어줬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블칸 영주는 흠칫했다.

저 미소는 절대 자신을 안심시켜 주기 위해 짓는 것이 아니었다.

“자, 자네….”

훅-

블칸 영주가 시후를 말리려는 그 순간. 시후의 인영이 흔들거렸다.

잔영을 남기며 사라지는 이형환위였다.

그리고 나타난 곳은 위리놈의 코앞이었다.

“나가자.”

쿵-

시후가 내지른 주먹이 위리놈의 옆구리에 꽂혔다.

위리놈은 시후가 내지르는 주먹을 보면서도 막지 않았다.

루프 앞에서 이미 시후의 실력을 봤기에 지금 몸에 두른 기운만으로도 충분하다 싶었다.

하지만 옆구리에 시후의 주먹이 닿는 순간.

“커헉!”

콰앙-

숨 막히는 고통에 신음을 토하며 벽을 뚫고 날아갔다.

벽에 생긴 구멍에서 먼지가 피어오르기도 전에 시후가 몸을 날렸다.

블칸 영주는 순식간에 벌어진 참상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어, 어찌. 대악마에게?!”

자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대악마가 어떤 존재인가. 위리놈이 어떤 대악마인가.

수많은 전장에서 녹을 먹은 자신조차 칼을 빼 들기를 꺼리는 존재인 그가.

지금 유저가 내지른 주먹 한 방에 고통스러워하며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블칸 영주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뻥 뚫린 벽으로 걸어갔다.

밖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쾅-쾅-

“크하, 하하! 그렇게 막기만 할 건가!”

선수를 잡은 시후가 옆구리를 움켜쥐고 있는 위리놈에게 연신 천마멸겁장을 날리고 있었다.

블칸 영주성의 높은 담벼락을 부수면서 말이다.

띠링-

[블칸 영주성의 높아진 담을 허물어라. 1/1]

히든 퀘스트 중 하나를 클리어했다는 메시지가 나타나자 시후는 손을 멈췄다.

그리고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위리놈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건 좀 아프지?”

“크윽, 당신.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무슨 짓을 하긴. 선수필승. 몰라? 요즘은 선빵이라고 하더만.”

자신과 호각이거나 그 이상의 적과 싸울 때 승기를 잡을 수 있는 병법 중 하나가 선수필승이었다.

시후는 실실 웃고는 있지만, 객관적인 평가로 위리놈을 자신보다 위에 놓았다.

‘내공뿐만 아니라 천마지기까지 실어 날린 주먹이 찌릿찌릿하다니.’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근접전 대신 천마멸겁장을 날린 거였다.

지금도 뒷짐을 취해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실은 이 역시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한편 위리놈은 나름대로 당황스러웠다.

몇 시간 되지도 않는 사이 시후의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것을 느낀 거였다.

사실 위리놈이 이만한 타격을 입은 것은 모두 천마지기에 의한 거였다.

블칸 영주에게 걸린 속박의 저주를 해주하면서 얻은 마기로 인해 천마지체가 보양되어 주먹에 천마지기를 실을 수 있게 된 거였다.

만약, 그런 게 아니었다면 조금 전에 날린 10성의 천마멸겁장처럼 위리놈이 걸친 옷가지나 겨우 찢는 공격이었을 터였다.

그것을 알 리 없는 위리놈은 시후에 대한 평가를 다시 했다.

“눈앞의 상대에 대한 평가를 잘못한 것은 되레 저였나 봅니다.”

“알면 이제부터 달리하든가.”

“그러려고 합니다.”

뿌득-뿌득-

위리놈은 자신 주위로 피어오른 어둠의 기운을 몸에 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뼈마디가 움직이는 소리가 울리더니 몸이 변형했다.

입고 있던 턱시도는 찢어지며 넝마로 변했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탄탄한 근육이 상체에 드러났다.

바지는 어둠의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하체가 되었으며 무엇보다 등 뒤로 흉측한 모습의 커다란 날개가 돋아났다.

좀 전에 보였던 집사다운 모습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위리놈이 본모습을 드러내자 시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허? 이것 봐라.”

아무리 현실처럼 만든 게임이라 하지만 게임은 게임일 뿐인데.

천마인 자신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강한 힘을 만나게 되었다.

거기에 스스로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긴장감을 느끼다니.

즐거웠다.

“확실히 달라 보이네?”

“보이기만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럴 거라 생각은 해. 하지만.”

훅-

시후는 또다시 이형환위를 일으키며 몸을 날렸다.

이번에 나타난 곳은 위리놈의 머리 위.

오른발에 천마지기를 가득 담아 내려찍었다.

쾅-

엄청난 굉음이 울렸지만 시후는 웃을 수 없었다.

위리놈의 거대한 날개가 시후의 발차기를 막은 거였다.

날개가 교차하는 틈 사이로 위리놈의 번쩍이는 눈빛이 보였다.

파지직-

“칫!”

무언가 번쩍이나 싶더니 위리놈의 눈에서 번개가 뿜어져 나왔다.

반사적으로 날개를 박차고 몸을 돌리지 않았다면 전기 통구이가 되었을 터였다.

그렇다고 여기서 뒤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접근전을 펼쳐야만 했다.

허공을 박차며 다시 몸을 날려 날개로 가리지 못한 허벅지를 걷어찼다.

물론, 천마지기를 가득 담아서 말이다.

하지만 그 역시 위리놈의 다른 쪽 날개에 가로막혔다.

그 순간 시후는 몸을 팽이처럼 회전했다.

위리놈의 날개가 하나는 위를, 다른 하나는 아래를 막자 그 틈에 벌어진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는 거였다.

몸을 회전한 기운까지 더불어 지금까지 중에 천마지기를 가장 많이 담아 날린 주먹이었다.

콰앙-

“아깝군요.”

이 역시 위리놈이 날개를 재빠르게 접어 시후의 주먹을 막았다.

날개 틈 사이로 위리놈의 비웃는 듯한 말이 새어 나오자 시후는 미소 지었다.

“이거지.”

촤악-

시후는 아주 조금 벌어진 날개의 틈으로 두 손을 찔러 넣었다.

양손 가득 천마지기를 담아 한순간에 날개를 활짝 벌렸다.

드디어 그 안에 두 눈을 부릅뜬 위리놈의 얼굴이 보이는 순간 시후는 몸을 비집어 넣었다.

그러고는 위리놈의 얼굴에.

쾅-

박치기를 날렸다.

또 한 번 울리는 굉음과 함께 승천하듯 시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와 반대로 위리놈의 머리는 뒤로 확 젖혀졌다.

“크윽!”

위리놈은 날개로 시후를 밀어내며 뒤로 물러났다.

자신이 본모습을 드러냈음에도 시후는 알 수 없는 능력으로 자신을 공격해왔다.

그 결과 또다시 허용한 공격에 느껴진 고통.

지끈거리는 이마에 위리놈은 인상을 구기며 날개를 활짝 펼쳤다.

“저에게 이만한 짓을 한 이가 있었나 싶군요. 당신이 만약 이 공격을 버틴다면 내 큰 보상을 드리지요.”

“말이 많아. 덤벼!”

그리고 시후는 보았다.

위리놈의 탄탄한 근육들이 찢어지며 그 틈으로 삐져나오는 무시무시한 어둠의 늑대들을.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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