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검은 늑대를 타고 땅속으로 들어가자 끊임없이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
띠링-띠링-띠링-.
[누구도 찾지 못한 진실된 어둠의 구역에 최초로 입장하였습니다.]
[최초 업적 보상으로 전 스텟이 +5 상승합니다.]
[진실된 어둠의 구역에 입장하여 녹화 기능이 차단됩니다.]
[진실된 어둠의 구역에 입장하여 대화 기능이 차단됩니다.]
[진실된 어둠의 구역에 입장하여 로그아웃이 일부 제한됩니다.]
[…….]
이것들 외에도 많은 메시지가 나타났지만, 대부분이 평소 사용하던 기능들이 작동되지 못한다는 거였다.
시후는 지금의 상황보다도 주변에 보이는 광경과 느낌에 관심이 더 가졌다.
‘마치 천잠음영술을 펼친 것 같지 않은가.’
하늘 아래 그림자가 있다면 어디든 숨어들 수 있는 천잠음영술을 펼쳤을 때 보이던 광경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그리고 피부에 와닿는 이 기운.
천 년 전에나 느꼈던 기운이 느껴졌다.
그 출처를 찾아보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때, 저 멀리 희미한 빛이 보였다.
검은 늑대는 순식간에 그 빛을 향해 내달렸다.
빛을 통과하자 검은 늑대는 점차 속도를 줄였다.
주변에는 이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어둠이 깔려 있었다.
내공을 운용하여 안광을 밝혀야 보일 정도였다.
“숲?”
도착한 곳은 하늘까지 가릴 정도로 높이 치솟은 나무가 우거진 숲이었다.
도대체 조금 전에 희미한 빛은 어디서 난 것일까 궁금하던 차에 저 멀리서 빛이 깜빡였다.
그곳을 향해 늑대가 걸어가자 빛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나무에 박혀 있는 구슬이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동시에 켜졌다가 꺼지는 구슬을 보자 야명주가 떠올랐다.
‘신기한 야명주일세.’
하지만 흥미는 딱 거기까지였다.
인류가 만든 ‘전구’를 이미 경험해본 시후였기에 곧 시선을 돌려 늑대가 걸어가는 방향을 보았다.
우거진 숲이 끝나자 거대한 철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끼이익-
검은 늑대를 반기듯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거대한 철문이 스스로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조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거대한 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늑대야, 네 주인은 검은색을 참으로 좋아하나 보다?”
-크르륵.
위리놈의 성이라 짐작해 검은 늑대에게 말했다.
외벽 전체가 검다 못해 묵(墨) 빛에 가까웠다.
검은 늑대는 대답이라도 하듯 한 차례 으르렁대더니 거침없이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당도한 곳은 높은 단상이 있는 넓은 공간이었다.
단상 위에는 수수하게 장식된 붉은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은 신하들의 알현을 받는 장소 같았다.
검은 늑대가 멈춰 서자 시후는 훌쩍 뛰어내렸다.
“손님이 왔건만 왜 초대한 놈은 보이지 않는 거야.”
여기까지 왔는데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의아했다.
그때였다.
지금까지 아무도 없던 의자에 검은 연기가 일렁이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거창하게도 등장하기는… 어?”
당연히 위리놈이라 생각했는데 점차 모습을 드러낸 이는 전혀 다른 이였다.
겨울도 아닌데 두꺼운 털외투를 걸치고 있는 노인.
몸에 기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붉은 의자에 겨우 몸을 걸치고 있는 그.
그런데 그 노인의 눈만큼은 푸른색 안광을 번뜩이며 생기가 넘쳐 보였다.
“낯선 이방인의 방문이 얼마 만인지. 반갑군.”
“……!”
노인이 말을 하자 시후는 몸을 짓누르는 힘이 느껴졌다.
즉각 내공을 끌어 올려 저항하지 않았다면 자칫 무릎을 꿇었을 터였다.
‘6성의 공력을 운용해야 대항할 힘이라니.’
자신이 손 한번 휘저으면 당장 죽을 것 같은 노인이 보인 힘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한편 노인 역시 시후가 당당히 두 발로 자신의 힘을 버티자 놀라고 있었다.
“대단하군. 어둠의 대리인의 힘을 견디다니. 그 정도면 이야기를 나눌 자격이 충분해 보이는군.”
노인이 손을 휘젓자 시후의 몸을 짓누르던 힘이 사라졌다.
시후는 여전히 푸른 안광을 번뜩이는 노인을 향해 걸어갔다.
계단이 있음에도 허공답보를 펼쳐 허공을 계단처럼 밟아 올라갔다.
그렇게 단상 위로 올라간 시후는 노인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나는 누가 나를 내려다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재미있는 이방인이로고. 앉게나.”
노인의 손짓에 검은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더니 의자가 만들어졌다.
시후는 성큼성큼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마주 보게 된 시후와 노인.
둘은 서로를 한 차례 훑어보고는 동시에 씨익 웃었다.
“네가 블칸 영주인가?”
“알아봐 주니 감사하군. 그대는 위리놈의 인정을 받은 자인가?”
“걔가 나를 인정했대?”
“블랙 라이칸을 타고 온 것을 보면 위리놈이 그대를 인정하고 나에게 보낸 것 같은데?”
제깟 놈이 뭐라고 나를 인정하고 말고 하냐며 일축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놈의 인정을 받으면 뭐에 쓰이길래 그걸 따지지?”
“그가 인정한 자만이 나를 구원해줄 테니까.”
선문답이 오고 갔다.
하지만 그 결과는 메시지가 알려줬다.
띠링-
[진실된 어둠에 묶여 있는 블칸 영주를 구하십시오.]
[해당 퀘스트를 클리어하지 못하면 ‘블칸 영주성을 침략하라’ 퀘스트를 진행할 수 없습니다.]
“이게 뭐야?”
나타난 메시지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메시지로 보면 눈앞의 노인이 분명 불칸 영주가 맞았다.
그런데 영주성 침략 퀘스트를 진행할 수 없다니.
“그것도 묶여 있는 영주를 구하지 못하면?”
조민의 존재가 절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나타났던 메시지 중에 분명 그런 내용이 있었다.
다른 곳에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수단은 모조리 차단되었다고 말이다.
시후의 난처한 표정에 블칸 영주가 입을 열었다.
“유저들이 보는 시스템이라는 것이 좀처럼 도움이 되지 않나 보군.”
“어. 그러네. 그럼 영감이 좀 알려줄래? 그거 어떻게 풀어줄지?”
시후는 검지를 들어 붉은 의자를 가리켰다.
블칸 영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붉은 의자와 블칸 영주의 손을 잇고 있는 검은 기운이 보였다.
“눈썰미가 좋군. 보시다시피 자네가 할 것은 이 어둠의 속박에서 나를 풀어주는 거라네.”
“그래, 그 어둠의 속박이 ‘진실된 어둠’이라 이거잖아?”
“맞네. 이것을 풀어준다면 자네는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 말은 블칸 영주를 풀어주지 못한다면 언제 로그아웃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말처럼 들렸다.
강제 로그아웃 제한이 걸려 있으니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좀처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힘으로 끊는 거였다면 위리놈인가 뭔가 하는 놈이 충분히 끊었을 거야.’
시후의 객관적인 평가로 위리놈은 지금까지 만난 이들 중에 단연 최고였다.
그런 녀석이 끊지 못하는 속박이라면 지금의 자신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녀석은 왜 자기도 하지 못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나를 보냈을까?’
이야기 흐름상 녀석은 블칸 영주가 풀려나길 바랐다.
그런데 나를 이곳에 보냈다?
그럼 힘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였다.
‘설마?!’
순간 무언가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눈을 번뜩였다.
잠시 후 시후의 한쪽 입꼬리가 씰룩였다.
“영감, 내가 궁금한 게 좀 있는데 대답해줄 수 있나?”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여기는 블칸 영주 성이 아니지?”
“그렇네. 여기는 (삐--)성 이라네.”
“뭐?”
“으흠…. 역시 들리지 않는 건가? 아무래도 지금의 자네는 내가 하는 말을 모두 들을 수 없는 듯하군.”
“이런….”
무슨 말인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Safety World 히든 퀘스트들 중에는 간혹 그런 경우가 있다고 했다.
유저의 레벨에 맞추어 히든 퀘스트가 주어지는데, 유저가 감당할 수 없는 세계관에 관한 이야기는 자동으로 필터링 된다고 말이다.
레벨에 맞추어 세계관에 대한 내용이 풀리지 않는다면 밸런스가 붕괴한다나.
풍문으로 들어본 것을 직접 경험해보니 생각보다 기분이 찝찝했다.
“쯧. 뭐, 됐어. 그럼 다음 질문. 누가 영감을 거기에 묶어놨지?”
“어둠의 종사자들.”
“그럼 영감을 풀어주면 그 녀석들과도 싸워야 하는 건가?”
“그거라면 걱정 말게. 나도 같이 싸워…! 자네 지금 설마? 이걸 풀 수 있는 건가?!”
블칸 영주는 대답하는 도중 눈치챘다.
시후의 질문은 자신을 풀어준 후의 일에 관한 것들이었다.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미리 계획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는 거였다.
믿을 수 없었다.
이것에 묶인 이후로 풀려나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오죽하면 악마에게 영혼까지 팔았을까.
그런데 저 유저의 재수 없는 미소는 이미 자신을 풀어준 것 같았다.
“다시 한번 묻겠네. 정말 이걸 풀어 줄 수 있는 겐가?”
“뭐야, 그거 풀어달라고 나를 초대한 거 아녔어?”
“어, 어찌. 아, 아니네! 어서! 어서 풀어주게!!”
블칸 영주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발버둥까지 치며 애원했다.
눈앞에 자유가 보이자 침착함을 잃은 탓이었다.
하지만 그건 블칸 영주 일생일대의 실수였다.
시후와 대가를 논해야 하는 상황에서 약점을 노출하다니 말이다.
“영감. 그렇게 보채지 마. 그런데 말이야.”
“뭐가 그런데 말인가? 어서 풀어주게!”
“그래 풀어준다니까. 그런데 풀어주고 나면? 나한테 떨어지는 거는?”
“……! 뭐?”
“풀어주면 영감은 나한테 뭘 해줄 거냐고.”
“그건 시스템이 보상을 주지 않나?”
“그건 그거고. 영주씩이나 돼서 세상을 날로 먹으려고 하는 건 아니지?”
“…….”
“내가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야, 영감의 절실함에 맞는, 내 마음을 울리는, 그런 소소한 보상을 원하는 거야.”
슥슥-
시후는 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를 비비며 웃었다.
그런 시정잡배 같은 모습에 블칸 영주는 할 말을 잃었다.
대륙의 그 누구도 자기 앞에서 저런 태도를 보인 이들은 없었다.
하다못해 대륙을 다스리는 세 명의 왕들까지도 말이다.
“그런데 고작 유저가 내 앞에서 그런 태도를 보여?!!”
주위를 울리는 블칸 영주의 외침에 그가 얼마나 분노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시후는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한쪽 귀를 후빌 뿐이었다.
“뭐야, 줄 수 있는 게 없어? 그럼, 나 간다?”
“허? 가다니. 이곳이 어떤 곳인데 그대 마음대로 간다 만다고 한단 말…!”
훅-
블칸 영주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눈앞에 시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치 어둠에 녹아들 듯 말이다.
그리고 느꼈다. 지금 시후는 이곳에 없음을 말이다.
“이, 이보게! 이보게!!”
블칸 영주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드디어 의자에서 풀려날 기회를 자기 발로 차버린 꼴이니 말이다.
만약, 이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언제 다음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몰랐다.
“이보게!! 내가 잘못했네! 내 뭐든 주겠네! 뭐든!!”
블칸 영주는 눈에 핏발까지 세우며 목 놓아 소리쳤다.
그러자 사라졌던 시후가 다시 그 자리에 나타났다.
“좋아, ‘뭐든’이라는 그 단어가 아주 내 마음을 울렸어.”
“그, 그런가? 하, 하하.”
어디서 개수작이냐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블칸 영주는 그 말을 꾹 참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여준 적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풀어주겠나?”
“좋아. 당신이 기사의 맹세만 해주면 바로 풀어주지.”
“그건….”
“왜? 싫어? 나 갈까?”
“아, 아니네. 하겠네.”
시후가 말한 기사의 맹세는 Safety World 기사 NPC가 유저와의 약속을 어기지 못하게 하는 안전장치였다.
그것을 어기면 최악의 경우 리셋이 되기도 한다.
블칸 영주는 쓴 입맛을 다시 입을 열었다.
“크흠, 나 블칸은 기사의 명예를 심장에 새겨 맹세한다. 나를 속박에서 풀어주는 이에게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겠다고.”
사아아-
블칸 영주가 기사의 맹세를 하자 푸른빛이 일렁이더니 블칸 영주의 심장에 스며들었다.
이는 안전장치가 제대로 작동했음을 나타내는 거였다.
시후는 만족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블칸 영주에게 다가갔다.
“영감,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고.”
“알았네. 그러니 어서.”
살짝 격양된 블칸 영주의 목소리에 시후는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블칸 영주만큼이나 기대에 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천마흡기공(天魔吸氣功).”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