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버스 안에서 시후를 보며 방긋방긋 웃고 있는 진지춘.
시후는 버스 안으로 올라서려다 몸이 얼어붙었다.
“네가 여기 왜 있냐?”
“도련님~! 뵙고 싶었습니다~!”
“너 송하룡은 어쩌고 여기 온 거야?”
“제가 도련님을 얼마나 뵙고 싶었게요~!”
“…….”
시후는 진지춘의 동문서답에 조민에게 눈을 돌렸다.
조민은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샤오롱 언니에게 지리를 잘 알고 버스 운전할 수 있는 분을 보내 달라고 했더니….”
“그런데 쟤가 왔다는 거지?”
아마도 진지춘이 자원해서 온 것 같았다.
그때였다.
빵빵-
“깜짝이야.”
진지춘이 버스 경적을 울렸다.
놀란 시후가 고개를 홱 돌리자 진지춘이 헤헤 웃고 있었다.
“너 이씨…….”
“도련님~ 저는 진씨입니다~.”
뭐가 저리 기분이 좋아, 되지도 않는 아재 개그를 하는지.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우리는 버스 운전을 잘하는 놈이 필요했다만?”
“무사고 경력 20년을 자랑하고 있습죠~!”
진지춘이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시후는 한쪽 안면을 꿈틀댔다.
“그쪽 지리를 잘 아는 놈이….”
“아미산이 있는 쓰촨성이 제 고향입니다~!”
이제는 말까지 끊는 진지춘이었다.
빠득-
시후가 이를 빠득 갈았다.
“거기 가기 전에 Safety World 캡슐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제가 오게 된 가장 큰 이유입니다!”
“뭐?”
“인터넷 환경이 가장 좋은 시설을 찾으셨다면서요.”
“그래서?”
“사천으로 가시는 길 중간 섬서에 제 집이 있습니다.”
진지춘의 말은 이러했다.
쓰촨성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섬서에 자기 집이 있는데 그곳에 캡슐이 있다는 거였다.
평소에 Safety World를 즐겼던 진지춘이었기에 자신의 집 인터넷 환경을 단연 최고로 만들었다는 거였다.
“그럼, 거기 장소만 알려주지 네가 왜 왔냐?”
“에이~, 도련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신다~.”
빈정대는 진지춘의 모습에 시후가 슬쩍 손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진지춘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집에 들어가려면 제 안구 인식과 음성 인식이 필요합니다!”
“……! 쯧.”
결국, 저 조잘대는 놈을 데리고 가야 하는 상황이라는 거였다.
반면 시후와는 달리 태산과 인호는 버스에 훌쩍 뛰어오르며 진지춘을 반겼다.
“진 어르신!”
“어구~ 잘들 있었느냐?”
누가 보면 십년지기 친구라도 만난 듯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 셋이었다.
중국에 온 이후로 유독 돈독해진 셋이었다.
진지춘이 둘에게 진정한 남자로 거듭나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했을 때부터였던 거 같았다.
시후는 이마를 짚으며 조민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너 먼저 타라. 나는 좀 있다가 타마.”
“알겠어요.”
벌써부터 피로해 보이는 시후의 모습에 조민은 어깨를 토닥여주며 버스에 올랐다.
사실 진지춘이 동행하는 것에 실보다는 득이 많았다.
지리를 잘 알고 있다니 어디를 찾으러 갈 때 시간을 아낄 수 있을 터였고, 의원으로서의 실력 또한 출중했기에 위급 상황에 대처가 쉬울 거였다.
거기에 Safety World 캡슐이 있는 장소가 그렇게나 보안에 철저하다면 안전성까지 확보된 셈이었다.
다만.
“쉬지 않고 조잘대는 저 주둥이가 문제지.”
버스 운전대를 잡고 있으니 시끄럽게 굴 때 지풍을 날려 혈을 짚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자신과 다닐 때는 숨죽여 다니던 일행들이 진지춘의 등장으로 긴장을 푼 것 같아 보기는 좋았다.
그들의 표정처럼 어둠이 가시고 날이 밝아오며 숭산 뒤로 해가 떠올랐다.
“그래. 내가 좀 참지 뭐. 그나마 새로 올 녀석은 조용하겠…. 쟨 또 왜 저래?”
떠오르는 태양을 후광처럼 받으며 걸어오는 진권이 보였다.
그런데 그 모습이 범상치 않았다.
등에 메는 커다란 가방은 둘째 치고 양손 가득 캐리어까지.
누가 보면 피난이라도 떠나는 것처럼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왔다.
시후는 자신의 앞까지 다가와 합장하는 진권에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아…. 그건 다 뭐냐?”
“먼 길 가는 데 뭐가 필요할지 몰라 준비 좀 해 보았습니다.”
“아니, 누가 보면 이사하는 줄 알겠어. 며칠 갔다가 올 건데 뭘 그리 싸 왔어?”
“제가 산을 떠나는 것은 처음인지라….”
말끝을 흐리는 진권의 모습에 시후는 흠칫했다.
딱히 독안공을 펼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놈 촌놈이구나. 그것도 상 촌놈.’
저 나이 먹고도 산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 물정에 어둡다는 의미였다.
더욱 가관인 것은 진권의 두 눈이 설렘으로 가득 차 초롱초롱 빛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혹 떼려다가 커다란 혹을 하나 더 붙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법정에 대한 정보 좀 얻겠다고 저놈을 데리고 가겠다는 자신을 처음으로 탓하는 시후였다.
“그, 그래. 그 짐은 저기 짐칸에 넣고.”
탈칵- 탕-
시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진권이 버스 짐칸에 자신의 짐을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버스 입구를 힐끗거렸다.
어서 타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 시후는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타.”
“감사합니다!”
후다닥 버스에 올라탄 진권은 어느새 일행들과 인사를 하고 있었다.
시후는 아직 버스에 타지도 않았는데 멀미가 밀려오는 것처럼 현기증이 일었다.
‘법정. 진권에게 정말 많은 정보가 있어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진권을 통해 은밀하게 다음 목적지를 남긴 천 년 전의 인물 법정.
시후는 그에게 진심으로 바랐다.
부디 진권의 안위가 걱정된다면 부처님의 곁에서 아주 큰 자비를 베풀기를 말이다.
시후가 마지막으로 오르자 버스가 출발했다.
목적지는 섬서성 화인시.
화산 바로 근처에 있는 도시였다.
일출과 함께 출발한 버스는 정오가 돼서야 도착했다.
그사이 시후는 진권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중 단연 으뜸으로 관심이 가던 이야기는 법정에 관한 거였다.
‘법정이 천기를 읽을 수 있었단 말인가.’
소림에 남아 있는 법정에 관한 기록은 천기(天機)를 읽을 수 있다는 것에서 시작이었다.
천 년 전, 천마가 중원을 침략하기 전. 혈교와 중원이 먼저 부딪쳐 대패한 그때.
법정은 천기를 읽었다고 한다.
그가 읽은 천기에서 혈교의 끝은 그때가 아니었다.
천 년 후. 시대가 변하고 무공이 쇠퇴한 그때.
인류를 위협하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고 했다.
‘그 말은 혈교로 인해 혈겁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혈교가 포교라는 명목하에 중국을 넘어 한국까지 진출하려던 것이 떠올랐다.
만약 시후가 없었다면 남궁세가는 혈교의 앞잡이로서 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터였다.
그 후 삼면이 바다로 이루어진 한국의 지리적 요건을 백분 활용하여 세계로 뻗어져 나갔을 터였다.
여기까지는 진권이 말한 것을 토대로 한 시후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도착지까지 얼마 안 남았을 무렵 진권의 입에서 나온 말은 확신이었다.
“혈교가 인류 멸망의 발판을 마련한다 하셨습니다.”
“…….”
진권의 말에 시후는 턱을 쓰다듬었다.
도대체 혈교의 손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설마 아시아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까지?’
색목인들이 즐비한 그곳까지 혈교의 손이 뻗어나간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시후는 이번 여행에서 혈교와 끝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 가족까지 위험하겠어.’
천마 시절에도 십만 교도의 안위를 생각하던 버릇이 그대로 가족의 안위로 이어진 거였다.
그렇게 진권과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 진지춘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저 앞에 보이는 곳이 제 거처입니다.”
그 말에 시후는 버스 앞자리까지 갔다.
그리고 차창 너머로 보이는 5층짜리 건물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건… 하아….”
“멋지지 않습니까? 하, 하하!”
시후는 자신에게 엄지까지 치켜들며 자랑스러워하는 진지춘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약선방도 그렇고 너는 수수함이라는 것을 모르냐?”
“에이~ 요즘 같은 자기 PR 시대에 저 정도 광고는 해야 손님이 모이죠.”
“손님?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저 건물 전체가 Safety World 캡슐방입니다.”
진지춘의 말은 이러했다.
자신의 거처에서 Safety World를 마음껏 하려고 하니 문제가 많았다는 거였다.
가장 문제시되는 것이 인터넷 속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알아본 결과, 초고속 인터넷 회선을 개인 집에 설치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한국처럼 Safety World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한 인터넷 환경을 구축하는 것에 생각보다 중국 정부의 제재가 많다는 거였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캡슐방이었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캡슐방을 만들자 되레 정부에서 지원이 들어왔다고 했다.
덕분에 2층부터 5층까지 캡슐방으로 만들었고 1층은 카페를 들여 놓았다.
“그럼, 우리도 다른 이들과 함께 저기를 이용해야 한다는 거냐?”
“에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 집은 지하에 있습니다. 그곳에도 캡슐이 있으니 그것을 사용하면 됩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기에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지춘이 근처 주차장에 버스를 주차하자 다들 내렸다.
건물로 이동하려는데 버스 짐칸에서 자신의 물건을 꺼내는 진권이 보였다.
“그건 두고 가지?”
“그럴 수 없습니다.”
“너 거기 들어 있는 거 대부분이 의식주에 관련된 것들이잖아.”
“그렇습니다.”
“그거 저기 가면 다 해결되니깐 두고 가라고.”
“그럴 수 없습니다.”
“너 그거….”
“오빠 그냥 가요.”
말이 통하지 않는 진권에 시후의 인내심이 한계에 치닫는 게 보였는지 조민이 말려왔다.
솔직히 조민도 시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후는 되도록 남들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아 했다.
그런데 스님 복장에 바리바리 싸 든 저 짐은 어디를 가나 시선을 끌었다.
이미 몇몇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들어 사진까지 찍고 있었다.
무언가 시작부터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정에 시후는 마음을 먹었다.
‘진권 저 자식. 아무래도 교육이 필요하겠어.’
지금 잡아두지 않으면 저 녀석 때문에 뒷목 잡을 날이 많아질 것 같았다.
“진권? 너 Safety World 해봤냐?”
“그게 무엇입니까?”
“몰라?”
“네.”
“그렇단 말이지?”
요즘 세상에 Safety World를 모르는 인간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지만 잘되었다 싶었다.
아무래도 진권의 교육은 현실이 아닌 Safety World 세계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 같았다.
시후는 최대한 진권에게 친근하게 다가가 그가 들고 있는 짐까지 손수 들어주었다.
“자~! 진권! 들어가자!”
“네. 감사합니다.”
느닷없이 진권에게 호의를 베푸는 시후의 뒷모습에 다른 일행들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쟤는 이제 죽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일지는 모르겠지만.
진권의 앞날에 큰 시련이 닥쳐올 것은 분명했다.
시후는 결코 아무 이유 없이 호의나 친절을 베풀 이가 아니니 말이다.
그렇게 진지춘의 거처인 지하로 내려가자 커다란 철문이 보였다.
진지춘은 재빠르게 달려가 잠금장치를 풀었다.
이제 버스 운전도 끝났으니 알아서 처신하는 모습이었다.
지하라 하지만 진지춘의 거처는 잘 꾸며져 있었다.
손님을 끌기 위해 화려하게 치장된 외부와는 다르게 모던한 인테리어로 이루어진 집이었다.
깔끔하기도 하고 이만한 인원이 들어와도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돌팔이, 제법 잘 꾸며놨네?”
“헤헤, 감사합니다. 도련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저 안쪽에 캡슐이 있습니다.”
진지춘의 안내에 따라 제일 안쪽 방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캡슐이 보였다.
시후네 집에 있던 최신형 캡슐과 같은 기종이 6대나 있었다.
“혼자 살면서 캡슐이 왜 저렇게 많아?”
“에이~ 혼자 산다고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저것들이 친구들과 즐기기 위해 들여놓은 거라고?”
“네~. 가끔 방주님도 찾아오셔서 같이 놀기도 했습니다.”
송하룡을 거론하는 것에 의외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잘되었다 싶었다.
마침 이곳에 모인 인원도 6명. 캡슐도 6대.
모두 동시에 접속할 수 있었다.
“좋았어. 다들 접속하자. 진권은 조민이가 좀 챙겨주고. 모두 아지트로 모여.”
시후는 그렇게 말해준 뒤 가장 먼저 캡슐에 들어갔다.
‘혈교와 일을 끝마치기 전까지는 접속하지 않으려 했었는데.’
한국에서 모두에게 말해놓은 것을 이렇게 빨리 철회할 줄 몰랐다.
그만큼 혈교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고 자신의 실력은 부족했다.
시후는 오늘의 접속으로 한 단계 위를 노려볼 생각을 하며 Safety World에 접속했다.
언제나처럼 눈부심 후에 눈을 뜨자 익숙한 마을 풍경이 보였다.
“쓰흡~ 이곳이 이렇게 정겹게 느껴질 줄이야.”
시후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걸음을 뗐다.
그런데.
띠링-띠링-띠링-띠링-
“뭐, 뭐야?!”
끊임없이 울리는 메시지 알림음과 눈앞에 나타나는 메시지 창에 당황스러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