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진권의 입에서 법정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시후는 눈을 부릅떴다.
이미 진권을 마주한 순간부터 독안공을 지속해서 펼치는 중이었다.
‘사실이다. 뭐지? 천 년 전 땡중이 살아 있… 그럴 리가. 분명 내가 조금 전에 유해를 보고 왔건만.’
대실산에서 보고 온 법정의 유해를 떠올린 시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법정이란 말이냐?”
“네.”
“진짜, 진짜 법정이라고?”
“…시주께서 누구를 떠올리시기에 제 말을 믿지 못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소림에서 ‘법정’이라는 법명을 사용하시는 분은 그분밖에 없으십니다.”
이 또한 사실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을 때 진권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양피지?”
“그분께서 이것을 보여 드리라 하셨습니다.”
시후는 곱게 접혀 있는 양피지를 받아 들었다.
그 안에는 아주 간략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섬서, 화산파.]
‘화산파라면 그때 내가 봉문을 시켰던 곳인데.’
천 년 전 일을 떠올린 시후는 양피지를 다시 진권에게 돌려줬다.
“이게 무슨 뜻이냐?”
“그것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한다? 네가 들고 와 놓고서는?”
“저는 그저 그 양피지를 이곳으로 가져와 전해주라는 명만 받았을 뿐입니다.”
“그랬단 말이지…. 그 양피지를 법정이라는 땡중이 가져다 주라고 했단 말이지.”
“법정 스님께서는 땡중이라는 말씀을 들으실 분이 아니십니다만.”
“여튼, 조민아. 가는 길에 저기 좀 들러야겠다.”
시후는 쓰촨성을 가기 전에 화산파가 있는 곳에 들를 생각이었다.
이미 조민은 시후가 양피지를 펴는 순간 이리되리라 생각하고는 샤오롱에게 연락을 취해놨다.
“잘됐어요. 때마침 그곳에 들러야 했는데요.”
시후가 Safety World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라던 캡슐이 있는 곳이 그곳이었다.
그 내용은 따로 조민에게 전음으로 들은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지괴로서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는군.’
눈치 빠른 조민을 칭찬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이가 먼저였다.
“진권. 다들 온 것 같은데 괜히 힘쓰지 말고 들어오라고 하지?”
“역시 눈치채고 계셨군요. 사형들. 그만 들어오시지요.”
끼익-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며 세 사람이 들어왔다.
다들 진권과 같은 검은 무복에 복면을 썼다.
시후는 그들을 한차례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역시 맞네. 너희가 사대신승이구나.”
“그걸 어찌….”
시후의 말에 다들 깜짝 놀라며 복면을 벗었다.
그 속에는 진권과 같은 여섯 개의 점이 찍힌 민머리의 스님들이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진권과는 다르게 다들 나이가 있어 보인다는 거였다.
‘대략 오십대는 되어 보이는군. 성취는 이 갑자 이상인가?’
세 명의 백회혈이 불뚝 솟아 있는 것에 그들의 경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하긴, 사대신승이면 그 정도 경지는 당연하겠지.”
시후의 말에 세 명이 진권의 뒤에 자리하더니 포권을 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청해(淸海)라 합니다.”
“저는 진풍(進風)이라 합니다.”
“저는 화해(火該)라 합니다.”
각자의 소개를 마친 그들은 보며 시후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시후라 합니다.”
그들이 정중하게 예를 차려오자 시후 역시 예를 차린 거였다.
시후가 다시 자리에 앉자 그들이 물어왔다.
“시주께서는 어찌 사대신승에 대해 아시는지요?”
“짐작은 했습니다. 소림의 큰 화가 미쳤을 때야 등장하는 것이 사대신승이니까요.”
시후의 말대로 사대신승의 존재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
소림이 멸문의 위기가 찾아오지 않는 이상 절대 모습을 드리는 일이 없었다.
아마도 이번 백팔나한들의 죽음이 이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발단이 되었을 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 명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의 특성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천마 시절 소림에서 이미 사대신승과 겨뤄 봤었기에 그들의 특별한 기질을 아는 거였다.
‘금(金)의 기운을 토대로 화(火), 수(水), 풍(風), 토(土)의 기운을 갖고 있었지.’
그리고 이들이 한데 뭉쳐 천마를 막아섰을 때 얼마나 곤욕을 치렀는지 떠올랐다.
개인의 능력은 천마의 능력에 비견되지 않겠지만 넷이서 합을 맞추면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아마 지금의 나로서는 넷의 합공을 견디기 힘들게야.’
시후는 냉철하게 현재의 자신과 넷의 전력을 비교했다.
“그럼, 저를 찾아오신 연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꼭 시주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신다면?”
“마을에서 느껴지는 기에 반응하여 이리 달려온 거였습니다.”
진권이 뒤에 있는 태산과 인호를 가리켰다.
그 말에 인호가 말했다.
“뒤뜰에서 태산과 연습을 하고 있었어.”
“시후 네가 가르쳐준 연공법으로.”
“그래서 그랬구나.”
둘의 말에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사대신승은 태산과 인호의 개걸심법과 천투심법을 느낀 것일 거였다.
두 심법의 뿌리가 구양진경에 있기에 그들에게 감지된 것일 거였다.
‘그래도 의외네? 이곳에서 발한 기가 숭산까지 닿다니.’
시후는 태산과 인호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저 둘에 대한 평가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았다.
이번에는 사대신승 중 가장 덩치가 큰 청해가 말했다.
“혹시 두 시주께서는 어디에 사문을 두고 계시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
사문을 묻는 말에 태산과 인호는 대답 대신에 시후를 바라봤다.
어찌 보면 둘의 사문은 시후 그 자체이니 말이다.
시후가 둘을 대신해 대답했다.
“저 둘의 사문은 말씀드리기 어렵겠습니다.”
“역시 그러실 거라 생각은 했습니다.”
청해는 답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기분 상해하지는 않았다.
현대 시대에서 저만한 무공을 익힌 자가 사문을 쉽게 말해주지 않을 거라 예상한 거였다.
반면 시후는 이들에게 천투심법에 대해 말해줘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개걸심법은 달랐다.
현대 시대에 남궁세가 당가, 소림까지 있는 마당에 개방이라고 없을 리가 없었다.
개방 방주에게 내려오던 개걸심법의 존재를 이들에게 말해 줬다가는 괜히 귀찮은 일에 엮일 것 같아 비밀에 부친 거였다.
‘그래도 이들이 우리에게 우호적인 입장이라 다행이네.’
사대신승이 만약 적대심을 갖고 왔다면 이렇게 마주 앉아 있지는 않을 거였다.
아마도 저들이 모이기 전에 한 명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만들었을 거였다.
시후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대신승은 태산과 인호에 대해 저들만의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저런 모습을 보니 속세에 때가 타지 않은 것은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하나가 걸렸다.
시후는 진권을 바라보며 전음을 흘렸다.
- 네가 먼저 온 것은 저들과 무관하렷다?
- 그렇습니다.
진권 역시 전음으로 대답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시후로서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대답이었다.
고민이 되었다.
자신에게 우호적인 사대신승.
그중에서 홀로 법정의 명을 받드는 진권.
아무래도 진권과 긴 이야기를 나눠야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우리는 아미산으로 갈 겁니다만, 같이 가실 겁니까?”
시후가 정중하게 사대신승들에게 물었다.
사대신승은 서로를 바라보며 전음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잠시 후.
“송구스럽지만, 저희는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음….”
예상은 했었다.
소림이 멸문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에 쉽게 따라나설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진권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 너라도 나를 따라가지?
- 이미 저는 제 할 일을 모두 마쳤습니다.
- 그래도 법정이 너만을 이곳에 보낸 것에는 그만한 뜻이 있는 거 아니겠어?
- 그러시겠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소림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 백팔나한을 그리 만든 녀석들 잡으러 갈 건데도?
- …제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소림에 일어난 혈겁과 관련된 녀석들을 잡으러 간다는 말에도 진권은 단호했다.
시후는 어떻게 진권을 꾀어낼까 고민에 빠졌다.
그때 옆에서 숙덕거리고 있는 태산과 인호의 말이 들렸다.
“아까 진짜 장난 아니었어. 저 진권이라는 스님 말이야.”
“맞아, 탄지신통을 직접 보다니. 손가락 하나에서 나온 기운이 그렇게나 엄청날 줄이야.”
“탄지신통?!”
시후는 둘의 대화에 훅 끼어들었다.
그리고 시후의 놀란 외침에 사대신승 역시 연신 놀리던 입을 닫고 진권을 바라봤다.
진권이 살짝 난처한 기색을 띠는 모습이 소림 절기를 사용한 것에 꾸지람을 듣는 것 같았다.
시후는 진권이 그러거나 말거나 태산과 인호에게 전음을 보냈다.
- 진짜 탄지신통이었어?
- 어. 손가락에서 기운이 뻗어 나오더니 담벼락과 뒤에 있던 나무까지 꿰뚫었어.
정확히 탄지신통의 무위였다.
시후는 고개를 돌려 진권을 바라봤다.
그리고.
씨익-
흠칫.
진권은 갑자기 자신을 보며 웃는 시후의 모습에 움찔했다.
왜 갑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등골이 오싹했다.
시후는 진권이 탄지신통을 사용했다는 것에 그를 데리고 갈 실마리를 찾았다.
‘일인전승(一人傳承)으로 이루어지는 탄지신통을 계승했단 말이지?’
소림의 수많은 절기 중 탄지신통을 익혔다는 것에 시후는 진권이 확실히 법정과 연관이 있다 생각했다.
그리고 독안공을 팔 성까지 펼쳐 진권을 훑었다.
진권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모든 것을 읽어 들였다.
그리고 확신했다.
‘아직 미숙하군.’
진권의 탄지신통 성취는 오 성의 경지였다.
만약 팔 성의 경지였다면 태산과 인호의 눈에 기가 발하는 것이 보이지도 않았을 거였다.
거기에 진권은 젊은 나이에 어울리게 호승심이 대단했다.
저리 담담한 표정은 그동안의 수양으로 이룬 거였다.
이 두 가지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시후는 진권에게 방긋 웃으며 전음을 흘렸다.
- 성소형소(聲消形消).
“……!”
그 전음에 진권의 담담하던 얼굴이 변했다.
안면근육 이곳저곳이 꿈틀대는 것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진권이 들은 그것은 탄지신통의 구결 중 일부였다.
시후는 그런 진권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진짜, 진짜.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
“같이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따르겠습니다.”
“권아?!”
결국, 시후를 따라나서겠다는 진권의 대답에 나머지 사대신승이 놀랐다.
그러고는 진권을 둘러싸고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시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실 거면 내일 아침 6시까지 이리로 오시지요.”
“…그럼.”
시후의 축객령에 사대신승은 침음성을 흘리며 국숫집을 나섰다.
나가면서도 연신 진권을 설득하는 셋의 음성이 끊임이 없었다.
그렇게 사대신승이 사라지자 조민이 다가왔다.
“오빠, 정말 저 스님 데리고 가게요?”
“본인이 따라나선다면?”
“왜요? 무공이야 고강한 것 같지만….”
앞으로 자신들이 가는 길에 굳이 새로운 인물을 추가해야 하냐는 뜻이었다.
시후는 조민의 걱정이 무엇인지 알기에 조민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저자가 가는 것에 흉(凶)보다는 길(吉)이 더 많을 거야. 특히…. 저 둘에게는.”
시후가 태산과 인호를 가리켰다.
둘 역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진권을 둘의 연습 상대로 삼을 생각인 것 같았다.
“자, 그렇게 되었으니 너는 그것에 맞게 계획 잘 짜고.”
“알겠어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좋아, 그럼. 오늘은 이만 자고 내일 아침에 보자.”
시후의 말을 끝으로 다들 잠자리에 들어갔다.
시후 역시 침대에 누워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천 년이라는 세월을 지나 만나게 된 법정. 마치 지금의 시대를 내다본 것 같았단 말이지.’
천 년 후의 일을 예견한 듯한 법정이 남겨 놓은 것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연결 고리의 해답을 찾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역시 진권에게 이야기를 더 들어봐야겠어.’
답을 찾기 위한 퍼즐 조각으로 진권을 떠올린 시후.
탄지신통을 미끼로 던져 주었으니 적당히 가르쳐줄 생각이었다.
“아미산까지 가는 길이 심심하지는 않겠어.”
진권의 합류로 바빠질 생각에 즐거워하는 시후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런 시후의 즐거움에 요소를 더할 이가 찾아왔다.
샤오롱이 보낸 전세 버스가 국숫집 앞에 도착했다는 소리를 듣고 나간 시후는 운전대를 잡은 이를 보며 인상을 구겼다.
“네가 왜 여기 있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