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형님!”
“교주님!”
“교주 오빠!”
“그래. 내가 거창한 말을 하지 못하는 건 잘 알지?”
천마의 말에 궁귀, 마천서생, 화마신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는 그들을 한번 스윽 훑었다.
궁귀는 말투만큼이나 거친 인상에 눈썹이 한일자로 붙어 있는 게 특이한 녀석이었다.
생긴 거는 소도둑놈같이 생긴 녀석이 활 하나는 귀신같이 쏘기에 궁귀(弓鬼)라 불렀다.
마천서생(魔天書生)은 호에 걸맞게 정갈한 옷을 즐겨 입었다.
행색만 보자면 천마신교가 아닌 도가에 어울리는 녀석이었다.
넷 중에 유일한 여성인 화마신녀(華魔神女)는 뭇 남성의 심금을 울릴 만큼 대단한 미모를 갖고 있었다.
물론, 머릿속이 텅텅 비어 있어 말보다 주먹이 먼저여서 문제지만 말이다.
천마는 오늘 이들 셋과 의형제를 맺기로 했다.
지랄 같은 자신의 성격에도 곁을 떠나지 않던 녀석들이 어느덧 신교의 주요 직책까지 맡고 있었다.
신교의 앞날을 걱정하며 끊임없이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형제같이 느껴졌다.
어느 날 의형제를 맺자는 마천서생의 말에 천마는 재미있을 것 같아 응했다.
그렇게 오늘 신교의 상징인 성화의 불꽃 아래 형제의 약을 맺었다.
“태어난 장소와.”
“태어난 날은 다르지만.”
“형제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형제다.”
넷은 술잔을 높이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천마는 고아로 자란 어린 시절의 보상이라도 받듯 즐거웠다.
셋 모두 천마신교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목숨을 내놓을 것처럼 살았다.
형제의 맹세처럼 슬픔과 기쁨을 같이했다.
천마는 독불장군처럼 살아가던 자기 등을 셋에게 맡겼다.
그뿐만 아니라 천마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 진소령을 가장 먼저 소개해 주기도 했다.
때문에 혈교에 의해 그녀가 죽임을 당했을 때 그들은 천마만큼 울분을 토하며 혈교를 도륙했다.
그랬던 그들이. 그렇게 천마를 이해하고 따랐던 그들이.
무림 정복을 위해 나선 후 소림사에 다다랐을 때 가장 큰 배신을 했다.
시후는 온몸에 검이 꽂혀 있는 자신의 벽화를 보며 입술을 잘근 씹었다.
삼매진화의 불길을 좀 더 크게 하자 그다음 그림도 보였다.
법정의 손에서 무언가 뿜어져 나오며 천마가 하늘을 뚫고 날아가는 그림이었다.
“법정… 도대체 당신은 왜….”
왜 자신을 죽이지 않고 영혼만 미래로 보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부처의 교훈인 자비를 베푼 것일 뿐인지.
다른 속셈이라도 있던 것인지.
그 의도가 궁금할 때 아직 끝나지 않은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그림은 다른 전투를 그리고 있었다.
한쪽은 머리에 띠를 두른 것으로 미루어 천마신교였다.
그런 그들과 싸우는 자들의 모습에 시후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왕야?!”
그들은 갑옷을 두르고 창과 방패를 들어 일정한 배열로 전열을 이루어 싸웠다.
그런 그들의 가장 뒤쪽에 높이 치켜든 깃발에는 뚜렷하게 ‘진(眞)’ 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렇다면 저들은 황실의 국군이라는 거였다.
그들이 왜 천마신교들과 싸우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황실을 쳐들어가는 것은 천마와 지괴, 마청우만이 알고 있었다.
무림 정복 후 작은 꼬투리를 빌미로 황실과 무림의 불가침 조약을 파기할 생각이었다.
그래야 그녀의 복수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시후는 안쪽으로 들어가며 다음 그림도 보았다.
“뭐야, 이젠 저 녀석들까지?”
머리띠를 두른 천마신교도뿐만 아니라 까까머리의 소림부터 거지꼴의 개방까지.
정파 사파 구분할 것 없이 모든 무림인이 다 함께 국군과 싸우고 있었다.
도대체 왜 천마신교와 무림인들이 합세하여 국군과 싸우는지 알 수 없었다.
연유를 알기 위해 안쪽으로 더 들어가 그림을 보았다.
그곳에는 많은 시체가 즐비해 있고, 국군과 각 문파를 상징하는 깃발을 든 이들이 원탁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어떤 서신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협정이라도 맺은 것인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벽에 새겨진 그림은 끝이 났다.
공동 전체를 가득 채운 벽화는 말 그대로 천 년 전의 일을 기록한 거였다.
법정이 왜 이런 것을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는 분명 누군가가 보기를 위함이었을 거였다.
시후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자신을 배신한 형제들과 무림인들이 합세하여 국군과 싸웠다?
그것도 서로에게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피해를 남긴 채?
“그래서 지금의 무림이 이렇게 나약한 것인가?”
만약 저 벽화가 사실이라면 지금의 나약한 무림의 사정이 이해되었다.
그때였다.
휘이익-
공동 안쪽에서 느닷없이 바람이 불어와 삼매진화의 불을 흔들었다.
시후는 안력을 돋우어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보았다.
분명 바람이 불어왔는데 그곳은 벽만 있었다.
시후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동 안쪽으로 걸어갔다.
“이런 곳에 틈이?”
끝에 다다르자 벽 뒤에 숨겨진 벽을 찾았다.
바짝 다가오지 않으면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교묘했다.
그 안쪽으로 들어가자 또 다른 공동이 나타났다.
이곳도 조금 전과 같이 벽화가 그려져 있는가 싶어 삼매진화 불길을 거세게 일으켰다.
그런데.
“넌?”
천 년 전 천마를 현대 시대로 날려 보낸 장본인이 앉아 있었다.
그때의 그 모습 그대로 정좌하고 앉아 있는 법정의 모습에 시후는 말을 잃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났지만, 법정은 움직이지 않았다.
시후는 그제야 법정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님을 눈치챘다.
너무나도 살아 있을 때의 혈색을 유지한 모습이었기에 시후조차 이제야 눈치챈 거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머리와 어깨에 수북이 쌓인 먼지가 눈에 들어왔다.
“등선이라도 한 건가?”
이렇게 생명을 다한 후에 형체를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시후가 알고 있는 한에는 우화등선의 경지에 다다라 육체를 버렸을 때와 사술에 얽매여 죽지도 살지도 못한 자가 되었을 때뿐이었다.
저렇게 편안한 표정으로 두 눈을 감은 것을 보니 후자는 아닌 것 같았다.
시후는 자신을 무림에서 사라지게 한 장본인을 눈앞에 보고 있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수십 번, 수백 번 씹어 먹어버리라 다짐했건만, 조금 전에 본 벽화 때문인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궁금했다.
“도대체 이만한 노력을 들여 이곳을 만든 연유가 무엇이냐?”
시체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무의미하다 생각했지만 그래도 물었다.
대답 따위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고요한 침묵이 흐르자 쓴웃음이 지어졌다.
“내가 뭐 하는 것인지. 궁금증을 풀러 와서 더 큰 고민을 안고 가는 꼴이라니.”
혜인에게서 법정에 대한 정보를 얻었을 때만 해도 그간 궁금했던 것들을 풀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고민을 싹 다 갈아엎을 정도의 큰 고민이 생겨버렸다.
시후는 벽화를 떠올리며 돌아섰다.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법정 또한 쉬운 길을 걸어오진 않았을 거였다.
“그래, 넌 여기서 그렇게 쉬어라. 난 가련다. 법정.”
파스스스-
법정의 이름을 부르자 등 뒤에서 무언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법정의 몸이 바스러지고 있었다.
어떻게 손을 쓸까 싶은 사이 이미 옷가지까지 바스러져 불어오는 바람에 날렸다.
그리고 그가 있던 자리에는 투명한 돌들이 나타났다.
“저런 정순한 사리를 남기고 떠나다니.”
수행의 극에 달한 스님이 죽은 후 남긴다는 사리.
특히, 법정같이 불심이 깊고 내공이 고강한 이가 남긴 사리는 그 어떤 영약보다 효과가 좋았다.
“저 한 알 한 알이 공청석유에 버금가는 영약이지. 그것으로 나에게 한 짓을 퉁칠 수는 없지만 조그마한 보상이라 생각하고 가져가마.”
시후는 사리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리를 다 챙길 때쯤에 법정이 앉아 있던 자리에 무언가 보였다.
글귀였다.
예전 한자로 적힌 글귀에 시후는 그것을 법정이 남긴 거라 생각했다.
[천 시주, 그대가 이 글을 본다면 부처님의 은덕이 하늘에 닿았다는 말이겠지요.]
“천 시주? 설마… 나?!”
시후는 천 시주의 ‘하늘 천(天)’ 자가 자신을 가리키는 거라 생각했다.
천마를 거론한 법정의 글은 벽화로는 다하지 못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황실이 왜 무림을 공격했는지.
그에 대항한 무림의 역사가 어느 정도인지.
그 끝이 어땠는지.
남은 이들이 무엇을 후회했는지.
그런 것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천 시주, 그대의 시대는 이제 지난 세월일 뿐이오. 그대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간다면 남아 있는 이들은 가엽게 여겨 보살펴 주시길 바랄 뿐이오. 그들은 그저 선조들의 죄를 씻기 위해 사는 것뿐 아니겠소. 부디 그들을 도와줌으로써 천 시주가 손에 묻힌 피의 죄를 씻길 바라오.]
그것으로 글은 끝났다.
운명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이 시대에서 벌써 몇몇 녀석들을 도와주었다.
시후 본인의 의지로 시작한 일이었기에 법정이 그린 그림이라 생각지 않았다.
대신, 법정의 말을 그대로 따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덕분에 몇 가지 궁금한 것들은 풀렸다. 그리고… 혈교가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하는 것도 알게 되었구나.”
법정이 적어 놓은 글에서 거론된 혈교.
왜 형제들이 배신했는지 이해하라는 듯한 글귀에서 거론되었었다.
“뭐가 되었든, 지금의 우선순위는 여전히 너희들이구나.”
잠시 법정으로 인해 옆으로 샜던 길을 다시 찾은 느낌이었다.
이제 진짜로 녀석들을 찾아가야 할 차례였다.
시후는 법정이 앉아 있던 자리를 향해 손을 슬쩍 휘저었다.
그러자 글귀가 적힌 부분이 가루가 되며 바람에 흩날렸다.
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시후는 등을 돌려 동을 빠져나왔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지체되었는지 절경을 이룬 대실산 너머에서 동이 트고 있었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시후는 다짐했다.
며칠 안으로 이 땅에서 혈교를 지워 버리리라고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게 있었다.
천마 시절 오 할에 달하는 내공을 회복했지만, 더 큰 힘이 필요했다.
“지금으로서는 혈천마라강시를 상대할 수 없다.”
단순히 목을 치거나 사지를 잘라 버리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는 게 혈천마라강시였다.
천마 시절에도 천마와 검마가 아니면 소멸시키지 못했던 혈천마라강시.
아직도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시후는 계획을 세워야 했다.
시후는 한쪽 귀에 여전히 꽂혀 있는 통신 장치를 켰다.
“조민아, 들리니?”
- 네, 오빠.
이만한 높이에 있어도 작동하다니, 대단한 장치였다.
“쓰촨성에 있는 아미산으로 갈 거야. 준비해.”
- 네, 오빠 오시면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을게요.
“그래. 그리고 하나 더.”
- 뭐요?
“가는 길에 Safety World에 접속할 수 있는 곳을 찾아봐.”
- 갑자기 Safety World에요?
“그래. 잠깐 들어갔다가 와야 할 것 같아서 그래.”
- 음… 알겠어요. 그런데 쉽지는 않을 거예요. 한국만큼 빠른 인터넷망이 갖춰진 곳이 이곳에는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
“알겠어. 아미산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찾아놔.”
- 알겠어요.
시후는 Safety World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품속에 있는 사리가 공청석유에 버금가는 효능이 있다지만, 지금의 자신에게는 그다지 소용이 없었다.
지금의 단계 위에는 깨달음이 필요했기에 사리는 필요 없었다.
천마 시절에야 자연기를 몸속에 갈무리하며 그 벽을 깼지만, 이 시대에는 그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너무나도 미약한 자연기를 그때처럼 갈무리하다가는 족히 10년은 걸릴 거였다.
그래서 생각한 게 Safety World에서의 레벨업이었다.
천마분심공을 통해 레벨업을 하게 되면 깨달음이 없어도 현실에서 내공을 증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