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시후는 천잠음영술을 펼쳐 국숫집으로 향했다.
그림자 속이었지만 품속에서 싸늘하게 식어가는 여아의 체온은 그대로 느껴졌다.
여아가 싸늘하게 식어갈수록 시후의 기분도 차갑게 내려앉았다.
국숫집에 당도한 시후는 조민의 일행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오빠? 오셨어…!”
조민은 시후를 반기려다 입을 다물었다.
평소에는 느껴보지 못한 무거운 기운에 짓눌리는 것 같았다.
대신 태산과 인호가 다가갔다.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이 피는 뭐야?”
“…….”
시후는 둘의 질문에 대답 대신에 침대로 다가가 여아를 내려놓았다.
일행의 눈앞에 침대를 향해 서 있는 시후의 등이 드러나자 조민이 깜짝 놀랐다.
“오빠! 등이!!”
조민은 시후에게 후다닥 달려가 등을 살폈다.
열십(十)자로 길게 베어진 상처를 보며 품속에서 단약을 꺼냈다.
으적-
“오빠, 아파도 참으세요!”
조민은 단약을 으깨어 상처에 천천히 발랐다.
저만한 상처에 약이 발라지면 고통에 소리를 지르기 마련인데 시후는 미동조차 없었다.
조민이 약을 다 바르자 시후는 그제야 돌아섰다.
여전히 황 장로의 모습인 시후를 보며 다들 숨죽였다.
시후는 일행들을 향해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대며 전음을 보냈다.
- 이곳에 도청 장치가 있다.
흠칫-
시후의 전음에 다들 흠칫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역시 조민이었다.
조민은 벽에 붙어 있는 콘센트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 안에는 오백 원짜리만 한 기계가 꽂혀 있었다.
- 그대로 두고, 이제부터 전음으로 이야기한다.
시후의 제지에 조민은 다시 콘센트를 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이는 이 국숫집 아이다.”
- 국숫집 주인은 어찌했지?
시후는 입으로 내뱉으면서 동시에 다른 전음을 보냈다.
“그렇구나.”
-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아무도 없었어요.
태산이 입을 열어 시후의 질문에 대답하고 조민이 전음으로 답을 했다.
그런 식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면서 조민이 새 옷을 내놓자 시후는 그것으로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여아가 누워 있는 침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천마 시절에는 느끼지 못했던 느낌이 가슴을 후벼 팠다.
커다랗게 베인 등의 통증보다 그 느낌이 더 아팠다.
이 더러운 기분을 풀 대상을 당장 찾지 않으면 아무래도 계획대로 하기 힘들 것 같았다.
시후는 조민에게 전음을 보냈다.
- 아이는 좋은 곳에 묻어줘.
- 네. 오빠는요?
- 나는 다시 소림사에 좀 다녀올게.
- 거기는 또 왜요?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신데.
- 걱정하지 마. 한 놈만 만나고 오면 되니까.
그 말을 끝으로 시후는 천잠음영술을 펼치며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 * *
후덕한 인상의 소림사 방장 혜인은 염주를 돌리며 불경을 읊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치레일 뿐.
혜인의 머릿속은 온통 황 장로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소교주의 손에서 탈출을 할 수 있지?’
분명 황 장로의 뒤를 쫓아 소교주와 린이 달려가는 것을 봤다.
자신과는 비견할 수도 없는 둘이 쫓아갔으니 당연히 황 장로의 목이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에 신음하는 소교주뿐이었다.
그 때문에 소교주와 린은 빠르게 숭산을 떠났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한다며 본교로 돌아간다고 했다.
이번에 벌어진 소림사 혈겁에 대한 처리를 끝마친 후 혜인 역시 본교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남게 되자 머릿속이 복잡한 거였다.
“후… 어찌한단 말인가.”
불경 읊는 것을 멈춘 혜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황 장로가 부순 창을 바라봤다.
구름에 가린 달이 오늘따라 을씨년스러웠다.
그 때문일까.
좀 전부터 알 수 없는 오한이 엄습해왔다.
“왜 이러지? 감기라도 오는 것인가?”
“감기 대신 내가 왔다.”
“헉! 누구냐?!”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혜인은 벌떡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분명 방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눈동자를 굴리고 기감을 넓혀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헛것인….”
“벌써 내 목소리를 잊었나?”
“헉!”
헛것인가 싶었지만, 다시 들리는 목소리에 기겁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황 장로를 봤다.
“화, 황 장로?! 당신이 여기를 어떻게?”
“아까는 잘도 초대하더니, 지금은 왜 그러실까? 섭섭해지려고 하네.”
혜인은 점점 가까워져 오는 황 장로를 피해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어째서인지 그에게서 풍겨오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 이봐. 황 장로. 본교에 나와 같이 간다면 내 당신의 신변을 약속하지.”
“본교라? 그 말은 네가 혈교의 본거지가 어디인지 알고 있다는 말이지?”
“당연하지. 자네가 봐서 알겠지만 혈고도 심지 않고 소림사 방장을 맡겼으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겠지?”
“역시.”
시후의 예상이 적중했다.
혈교의 본거지까지 찾을 수 있는 마당에 더는 혜인과 말을 섞을 필요가 없었다.
이제는 꾹꾹 눌러놨던 더러운 기분을 조금이나 풀 때였다.
푹푹-
시후는 검지를 들어 올리며 대놓고 지풍을 날렸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마혈과 아혈을 짚어갔다.
대신, 황 장로의 무위가 아닌 시후 본연의 무위로 말이다.
혜인은 지풍을 날리는 것을 보며 좀 전과 같이 몸을 틀어 피하려 했다.
그런데.
“으… 읏?!”
언제 지풍이 적중된 줄도 몰랐다.
혜인이 알고 있는 황 장로는 기껏해야 이 갑자의 내공을 가진 의원일 뿐이었다.
혈천수라강을 익히기는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는 게 아니듯, 평생을 의원으로 산 황 장로는 자신의 상대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까와는 전혀 다른 무위를 보였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혜인은 빠르게 눈을 굴렸다.
시후는 심하게 요동치는 혜인의 눈동자를 보며 독안공을 펼쳤다.
“이것 봐라? 너 낙동강 오리알 신세구나?”
“으….”
“소림의 방장이라는 녀석이 하는 짓거리 하고는, 백팔나한승 녀석들에게 산공독을 먹이다니.”
“으!!”
“쯧쯧. 그래서… 혈교의 본거지는 어디에 있느냐?”
“……!”
시후는 독안공을 통해 알아내는 것을 굳이 입 밖으로 꺼냈다.
혜인의 심기를 흔들어 더 많은 정보를 캐내기 위함이었다.
마지막 질문으로 혈교의 본거지까지 알아낸 시후는 천천히 혜인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시후의 손이 닿는 순간 혜인은 죽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죽음이 가까워지고 나서야 눈치챘다.
눈앞의 황 장로는 진짜 황 장로가 아님을.
“그래 맞다. 네 생각대로 나는 황 장로가 아니다. 소림도 참으로 썩었구나. 법정 땡중이 있을 때는 이렇지 않았…!”
시후는 천 년 전 법정을 거론하다 흔들리는 혜인의 눈에서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읽었다.
천 년.
강산이 100번은 넘게도 변하는 세월이 지났건만.
혜인의 뇌리에 법정에 대한 기억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꾸욱-
시후는 손아귀에 힘을 주며 혜인을 끌어당겨 코앞에 자리했다.
“그곳이 어디냐.”
“……!”
“대실산(大室山)이라.”
시후는 손아귀에 힘을 풀어 혜인을 놓아주었다.
바닥에 널브러져 꿈틀대는 혜인을 힐끗 보고는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혜인은 시후가 사라지자 죽음의 그림자가 사라졌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전음이 들렸다.
- 너도 여아의 고통을 그대로 느껴보아라.
그리고 시작이었다.
“그… 어….”
백회혈의 짜릿한 통증과 함께 눈, 코, 입, 귀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여전히 마혈과 아혈을 점혈당해 움직일 수도, 고통에 몸부림칠 수도 없이 혜인은 그렇게 몸속의 피를 모두 쏟아내며 싸늘하게 식어갔다.
한편 혜인의 백회혈에 내기를 흘려 넣고 소림사를 빠져나온 시후는 동쪽으로 날아갔다.
일반인에게는 암벽 등반 명소로 유명할 정도의 험한 산세를 자랑하는 대실산이었지만 시후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이미 하늘을 조깅하듯 날아가는 시후는 목적지까지 단숨에 날아갔다.
대실산 정상.
신이 내린 축복이라고 불릴 만큼 절경을 자랑하는 대실산의 절경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시후가 내려섰다.
시후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혜인의 뇌리에서 꺼내 본 장소를 찾았다.
“찾았다.”
저 멀리 암벽에 새겨진 부처상이 보였다.
시후는 단숨에 그곳까지 날아갔다.
암벽에 새겨진 부처상은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어림잡아도 20m는 되어 보였다.
시후는 그 부처상의 면에 손을 대었다.
“법정. 이게 그대가 후학에게 남긴 유산인가?”
그랬다
그 부처상은 천 년 전 시후를 사라지게 한 법정 스님이 손수 만든 부처상이었다.
혜인의 기억에는 법정은 이 부처상을 오로지 검지 하나만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얼핏 들으면 본신의 내공과 심신 수양의 결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직접 보니 알 수 있었다.
“일양지(一暘指)의 묘리를 담아 탄지신통(彈指神通)까지 익힐 수 있게 만들었구나.”
암벽을 깎을 때는 일양지의 묘리를 담았고 부서의 이마에 점을 찍을 때는 탄지신통의 묘리를 담았다.
아마도 제대로 된 후학이 이곳을 발견했다면 일양지 하나만으로 천하를 흔들었을 거였다.
하지만 시후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이 아니었다.
시후는 훌쩍 날아올라 부처상 이마 앞에 우뚝 섰다.
그곳에는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있었다.
시후는 망설임 없이 그곳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손끝에 부처상에 새겨진 일양지의 묘리를 담아서 말이다.
푸스스-
구멍에 정확히 손가락이 들어가자, 그 끝의 암벽이 아주 조금 부서졌다.
시후는 손가락을 빼고는 처음 그 자리에 내려섰다.
그러고는 암벽을 향해 걸어갔다.
암벽에 시후의 몸이 닿자 빨려 들어가듯 안으로 사라졌다.
암벽 안쪽은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정도의 동굴이 나타났다.
안력(眼力)을 높이니 안쪽으로 이어진 게 보였다.
“법정, 도대체 저 안쪽에 무엇을 둔 것이냐.”
일양지의 묘리를 터득하지 못하고서는 이 입구를 발견할 수 없었다.
일종의 진법으로 꾸며 놓았기에 다른 암벽처럼 막혀 있었다.
어째서 이만한 노력을 기울여 이런 공간을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안쪽으로 빠르게 들어가자 곧 커다란 공동(空洞)이 나타났다.
더는 다른 곳으로 이어진 곳이 없어 보이는 게 이곳이 종착점 같았다.
시후는 손을 슬쩍 들어 삼매진화를 일으켰다.
화르륵 불타오르는 불꽃에 그토록 어두웠던 공동의 내부가 밝혀졌다.
그리고 동굴 벽면에는 밖에 있던 암벽과 마찬가지로 법정이 직접 손을 댄 흔적이 있었다.
“저건… 그때인가?”
벽에 그려져 있는 것은 그림이었다.
공동 입구에서부터 시작하는 그림은 마치 누군가의 일대기를 그린 것 같았다.
시후도 익히 아는 그것이었다.
천 년 전 천마로서 무림 정복을 위해 나섰던 자신의 일대기였다.
무당파, 화산파, 청성파를 부수는 그림들이었다.
이마에 띠를 두르고 있는 이들은 천마신교를 상징하는 거였을 테고, 그들 가장 앞에 당당한 모습으로 자리한 것이 천마일 터였다.
그리고 소림에 다다른 그림에서 시후는 눈을 부릅떴다.
홀로 소림사에 오른 천마를 뒤로하고 떠나는 천마신교들.
그들 앞에 선두에선 이들.
그들이 누구인지는 손에 들려 있는 무기로 알 수 있었다.
“궁(弓)을 들고 있는 궁귀(弓鬼), 판관필(判官筆)을 들고 있는 마천서생(魔天書生), 륜(輪)을 들고 있는 화마신녀(華魔神女). 너희들을 여기서 이렇게 보는구나.”
온몸에 검이 꽂힌 천마를 뒤로하고 떠나는 이들의 수장들을 보니 형제의 약을 맺은 그 날이 떠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