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소림사 혈겁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중국 정부도 백 명이 넘는 승려들의 떼죽음을 비밀에 부칠 수는 없었다.
공안은 대대적인 수사를 발표했고, 중국 통신은 연신 뉴스 속보로 다루었다.
시후 역시 그 기사를 보았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이었지만 내력을 집중하니 스마트폰을 편안하게 볼 수 있었다.
‘아주 작정한 것 같은데….’
누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는 뻔했다.
황 장로가 통화했을 때 혈교에서 다음 목적지를 소림으로 삼았으니 녀석들의 소행이 분명했다.
혈천수라강을 익힌 녀석들이 들이닥쳤으니 웬만한 이들이 막기는 어려웠을 거였다.
‘그런데 그 숫자가 걸린단 말이지.’
뉴스 기사에 나타나 있는 사망한 승려의 숫자가 유독 눈에 밟혔다.
소림 승려 백팔 명.
소림과 백팔이라는 숫자를 연결 지으면 누구나 떠올릴 터였다.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
아무리 현대 시대 무림의 위세가 천마 시절에 못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천마조차 쉽게 와해하지 못한 진인데, 혈교 녀석들이, 그것도 하룻밤 사이에 모두 죽였다?’
의심의 여지가 충분했다.
그리고 그 의심을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버스가 멈추자 목적지를 확인한 시후가 내렸다.
그곳은 숭산 바로 밑에 있는 마을이었다.
평소 소림사를 찾는 관광객들로 붐비던 마을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더욱 떠들썩했다.
기삿거리를 찾아 돌아다니는 기자들부터 개인 방송이다 뭐다 해서 영상을 촬영 중인 너튜버들까지.
그리고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호루라기를 불며 소리 지르는 공안들까지.
신난 거라고는 때 아닌 사람들이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루는 식당들뿐이었다.
“请进~!(어서 들어오세요)”
“Please come in.”
“들어와, 들어와!”
식당에서는 다국어로 손님들을 끌고 있었다.
시후는 그런 식당들을 둘러보다 한 곳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노파가 국수를 팔고 있는 노점이었다.
시후가 다가오자 노파가 힘겹게 고개를 들고는 웃었다.
“어서 오세요, 노사님. 무엇을 드릴까요.”
시후는 약선방을 떠난 후 줄곧 황 장로로 변용한 상태였다.
그랬기에 노파가 노사라고 부른 거였다.
그것보다 시후는 요즘 들어본 중국어가 아닌 고풍스러운 노파의 말투에 미소를 지었다.
‘정겹군.’
오랜만에 듣는 고향의 언어 같았다.
시후는 노파에게 대답 대신에 검지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네, 국수 하나 얼른 말아 드리겠습니다.”
뜻을 정확하게 파악한 노파가 빠르게 국수를 말기 시작했다.
시후는 한쪽에 마련된 나무 테이블에 앉았다.
“평소보다 더 소란스러워 보이는군?”
“네, 아무래도 소림사에 그런 난리가 났으니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 흉수는 찾았다나?”
“에이, 어디 찾았겠습니까? 아마 못 찾을 겝니다.”
“저렇게 많은 공안이 움직이는데?”
“그럼요. 아마 힘들 겁니다.”
노파는 시후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국수를 내오며 시후가 말하는 것에 답했다.
그리고 국수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분이 하시는 일인데 감히 저깟 것들이 눈치나 채겠습니까?”
“하긴.”
노파는 시후의 대답에 만족한다는 듯이 미소를 띠고는 다시 돌아갔다.
시후는 테이블에 놓여 있는 젓가락을 들어 국수를 휘휘 저었다.
사실 시후가 이 국숫집으로 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중 노파에게서 혈천수라강의 기운을 읽은 거였다.
그리고 역시나 황 장로의 모습으로 몇 마디 운을 띄워주니 알아서 다가왔다.
지금처럼 국수 안에 들어 있는 청경채에 다음 목적지를 적어주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 목적지가 의외였다.
[소림사 방장실.]
소림사 최고 권위자가 있는 곳에서 보자고 하다니.
혈교가 소림사에 얼마나 스며들어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시후는 국수를 먹으며 숭산 입구를 봤다.
그곳은 이미 공안들이 진을 치고 사람들 출입을 통제했다.
천잠음영술을 펼치면 감쪽같이 저곳을 지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황 장로처럼 행동해야 했기에 불가능했다.
황 장로는 내공이 이 갑자에 달하지만 마땅한 은신술 하나 익히지 못한 녀석이었기에 그에 맞게 행동해야 했다.
“아무래도 밤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어디 쉴 곳이 없을까?”
“잠깐 묵으실 거면 저희 집을 이용하시지요.”
노파는 자신의 뒤쪽을 가리켰다.
일반 가정집처럼 보였지만 입구에 떡하니 ‘숙박 100 위안’이라고 적혀 있었다.
시후는 테이블에 200위안을 꺼냈다.
“그럼 좀 부탁하지.”
“네, 노사님. 얘야! 2층 끝 방으로 노사님 좀 모셔라!”
노파가 소리치자 안에서 아이 한 명이 달려 나왔다.
여덟 살쯤 되었을까, 눈망울이 똘망한 게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아이는 시후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노사님. 저를 따라오세요.”
그렇게 시후는 아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구불대는 복도를 지나 2층 가장 끝 방으로 안내했다.
“이 방에는 창가가 있어 밖을 볼 수도 있어요.”
“음… 좋구나.”
호화스러운 방은 아니었지만 깔끔하게 정리 정돈된 방이었다.
시후는 창문을 열었다.
밖을 내려다보니 노파가 있는 곳과는 완전 반대편 같았다.
인적이 드문 뒷골목이 보이는 것이 야밤에 소림사로 올라가라는 노파의 배려 같았다.
“괜찮군.”
시후가 방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자 아이는 침대를 세팅했다.
“이곳에서 주무시면 될 것이에요. 헤헤.”
그러면서 시후를 향해 실실 웃었다.
아무래도 팁을 바라는 것 같았다.
시후는 품속에서 백 위안을 꺼냈다.
생각했던 것보다 큰돈이었던지 아이는 놀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바로 줄 생각은 없었다.
시후는 백 위안을 아이 눈앞에 천천히 흔들었다.
“아이야, 몇 가지 묻고 싶게 있는데 네가 답해줄 수 있을까?”
“네! 당연하죠, 저만큼 이곳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걸요?”
흔들리는 백 위안에 넋이라도 빠진 듯한 아이는 빠르게 답했다.
그 모습에 시후는 아이에게 백 위안을 넘겨주었다.
“소림사에 저 난리가 나기 전에도 이곳에서 국수를 먹고 숙박을 한 사람이 있었니?”
“어? 어떻게 아셨어요?”
“그 사람들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줄래?”
“음….”
고 녀석. 뜸을 들이는 것이 제법 귀여웠다.
시후는 품속에서 백 위안을 다시 꺼내어 흔들었다.
그러자 아이가 눈을 번뜩이더니 빠르게 말했다.
“소림사에 그런 일이 생기기 며칠 전이었어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날이었는데 해 질 녘에 좀 이상한 분들이 오셨어요.”
“이상해? 어떻게 말이냐?”
“남녀 한 쌍이셨는데 두 분 모두 모자와 선글라스를 깊게 눌러쓰셔서 얼굴은 못 뵈었어요. 그런데 우리 할머님이 다른 때와는 다르게 엄청 깍듯하게 모시더라고요.”
“그래서?”
시후는 아이에게 백 위안을 넘겨주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분들이 식사도 하지 않으시고는 저녁 늦게 나가시는 거예요.”
“밤에 말이냐?”
“네! 제가 소변이 마려워 잠깐 나왔을 때 봤어요. 두 분이 방을 나오시는 것을요.”
“그랬단 말이지? 그러고는 들어오는 것을 못 봤고?”
“어? 그건 어찌 아셨어요?”
아이는 시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녀석들이 혈교였다.
그리고 소림의 혈겁과 깊은 관계가 있을 터였다.
‘이미 이곳에 없겠지만 그래도 흔적이라도 찾아볼 수 있겠지.’
점점 소림사 방문에 흥미가 돋고 있었다.
그러다 손에 들린 삼백 위안을 보며 헤헤거리는 아이의 모습이 신경 쓰였다.
“아이야, 혹시 내게 말한 것을 다른 이에게도 말한 적이 있느냐?”
“네. 저희 할머님에게요.”
“그랬구나, 알았다. 이만 나가보거라.”
“네, 노사님.”
아이는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하고는 방을 나갔다.
아이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시후는 기감을 넓게 펼쳤다.
이 방을 감시하는 이가 있는지 찾은 거였다.
기감에 잡히는 이가 없는 것을 확인한 시후는 한쪽 귀를 살짝 눌렀다.
“모두 들었지?”
- 네.
“어떻게 생각해?”
- 오빠 생각과 같아요. 그들이 분명할 거예요.
시후의 귓속에 끼워져 있는 것은 보청기형 통신 장치로 약선방을 떠나올 때 받은 채비 중의 하나였다.
시후는 그것으로 조민과 대화를 했다.
“그치?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 그들이 그곳에 남아 있을 확률은 낮지만 그래도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내 생각도 그래. 해가 떨어지면 나 먼저 올라갈 테니 알아서들 와.”
- 네.
“아, 그리고.”
시후는 통신을 종료하려는 조민을 불렀다.
- 뭐 다른 하실 말씀이라도 있어요?
“저 아이, 챙겨.”
- 도련님? 아이는 왜 챙깁니까?
갑자기 조민과의 통신에 끼어든 진지춘이었다.
“네가 왜 튀어나와.”
- 아니, 도련님께서 갑자기 여자아이를 챙기라고 말씀하시니까 그러죠.
“그게 왜.”
- 그렇잖습니까? 도련님이 누구 불쌍하다고 적선이라도 하실 분도 아니시고 부모의 마음을 느끼실 만큼의 어른도 아니신데…. 설마?
“설마? 설마 뭐.”
- ……!
진지춘은 무엇에 놀란 것인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다 세상 진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 도련님… 설마 취향이…! 그건 엄연한 범죄….
“너 이 새끼!”
약선방을 방문한 후로는 헛소리를 하지 않던 진지춘이 그동안 이자라도 쌓아놨던 것처럼 헛소리를 터트렸다.
- 아, 아니시죠? 헤헤, 저도 그럴 거라 생각은 했습니다.
“돌아가면 네 입에 쉰내가 나는 것을 경험하게 해주겠어. 제갈조민. 돌팔이랑 쓸데없이 어울리지 말고 애 잘 챙겨.”
- 네.
- 도, 도련님? 도련….
뚝-
시후는 애달픈 진지춘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통신을 종료했다.
진지춘의 쓸데없는 헛소리에 울화가 치밀었지만, 아이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시후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오늘 저녁에 숭산을 오르면 저 아이는 죽을 거라는 것을.
아이가 이 방에서 늦게 나간 시점에 이미 혈교의 의심을 샀을 거였다.
작은 꼬투리도 남기지 않으려는 녀석들에게 아이의 목숨 따위는 별것도 아닐 거였다.
그래서 시후는 조민에게 아이를 챙기라고 말한 거였다.
그리고 조민이 챙긴다고 했으니 아이는 목숨을 건질 거였다.
천마 시절이었다면 저런 아이의 목숨을 챙기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텐데.
시후는 천마가 아닌 강시후로 살아가는 자신의 변화를 느꼈다.
“뭐, 나쁘지 않아.”
독불장군이나 다름없던 천마에서 ‘리더 강시후’로 살아가는 지금이 좋았다.
그리고 앞으로 그렇게 살기 위해서 반드시 혈교 녀석들을 지워버려야 했다.
녀석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하는 짓거리가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그대로 두게 되면 분명 언젠가는 자신의 주변 인물들이 위험해질 우려가 있었다.
시후는 벽에 걸려 있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살짝 마른 체형의 황 장로의 모습이 보였다.
“뭐가 되었든 오늘은 제대로 된 놈을 만나야 할 텐데.”
소교주라고 불리던 놈과 같이 혈교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은 녀석을 만나기를 바랐다.
그렇게 방에서 쉬는 사이 기다리던 밤이 되자 시후는 열린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건물 지붕을 날아가는 경신술에는 딱 황 장로의 실력만큼만 내공을 담았다.
하지만 일반인에게는 들킬 리 만무했다.
그렇게 공안들이 지키고 있는 바리케이드도 훌쩍 넘은 시후는 빠르게 산을 올랐다.
얼마쯤 지나자 저 멀리 소림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후는 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혹시 모르니까 통신은 종료하지.”
- 네.
저곳에 어떤 녀석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제법 실력이 있는 이라면 이런 통신 장치의 작은 잡음 정도는 잡아낼 수 있었다.
혹시 모를 우려에 시후는 장치의 전원을 껐다.
산을 오르기 전에 이미 지도 앱으로 소림사의 구조를 파악해 놨기에 빠르게 방장실이 있는 전각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몇몇 승려들이 보였지만 모두 무공을 익힌 흔적은 없었다.
‘소림도 별거 없는 건가.’
소림 또한 천마 시절에 뒤떨어지는 모습에 살짝 아쉬움이 들었다.
어느덧 방장실이 있는 전각이 보였다.
창문이 활짝 열린 방이 있었는데,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마치 자신을 기다리는 듯했다.
창문 옆에 살짝 내려선 시후는 방 안쪽을 살며시 살폈다.
그때였다.
“황 장로, 오셨으면 들어오시지요.”
친근하게 황 장로를 찾는 목소리에 시후는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