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혈교인들이 달려드는 순간 샤오롱은 자신의 독문 무기인 쌍두사검(雙頭巳劍)을 꺼냈다.
품속에 넣고 다닐 만큼 작은 단도를 양손에 역으로 쥔 샤오롱은 뒤로 훌쩍 날아올랐다.
일단은 뒤로 물러나 녀석들과 거리를 벌린 후 시후 일행과 합을 맞출 생각이었다.
“모두 제 뒤로 물러나세… 어머?!”
하지만 샤오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려들던 혈교인들이 뒤로 튕겨 나갔다.
태산과 인호가 혈교인들의 공격을 튕겨낸 거였다.
혈교인들은 자신들의 공격이 단 한 번의 공세로 무효가 되자 당황했다.
반면 태산과 인호는 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에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실전이라고는 서울대에서 벌였던 남궁화성과의 일전이 전부였다.
그때는 너무나도 심한 격차와 산공독에 중독당해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샤오롱을 향해 달려드는 혈교인들의 공격을 별다른 초식의 운용도 없이 막아냈다.
“할 수 있어.”
“맞아, 이제 짐이 아닐 수 있어.”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동안 시후의 믿을 수 없는 업적을 따라가면서 현실에서도 버스를 타는 것 같았다.
친구라는 명목 아래 자신들은 언제나 보호만 받는 처지였다.
그런데 이제는 아닐 수 있었다.
둘은 마음에 짐을 내려놓는 기분으로 자세를 가다듬었다.
태산은 두 다리를 벌려 기마 자세를 취했고 인호는 언제든 뛰쳐나갈 수 있게 몸을 가볍게 했다.
둘의 그런 모습에 황 장로가 소리쳤다.
“뭣들 하는 거야?! 당장 저들의 목을 쳐버려!”
그 외침에 혈교인들은 반사적으로 튀어 나갔다.
녀석들은 두 무리로 나누어 달려 나갔다.
한 무리가 태산과 인호를 부채꼴 대형으로 압박하는 사이, 다른 무리가 그들을 훌쩍 뛰어넘어 조민을 향해 달려갔다.
태산과 인호가 몸을 돌리려 하자 조민이 소리쳤다.
“전 걱정하지 마시고 앞에 집중하세요.”
그 외침에 순간적으로 태산이 주먹을 내질렀다.
“개걸폭렬권 삼 초식.”
퍼퍼벙-
순식간에 다연발로 뻗어지는 태산의 주먹에서는 권기(拳氣)가 쏟아져 나갔다.
압박하던 혈교인들은 예상치 못한 권기에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았다.
하지만 곧 일어나 대형을 유지하려 했다.
그때였다.
“투신검각권 풍(風).”
어느새 멈춰 서 있는 혈교인들 곁으로 다가온 인호가 발을 휘둘렀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전력을 다하지 않았지만, 혈교인들을 당황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녀석들은 각기(脚氣)가 쏟아져 오는 것 같아 몸을 피하려는데, 어째서인지 되레 빨려 들어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회오리라도 있는 것 같았다.
그 기세를 몰아 태산과 인호는 망설임 없이 다수의 혈교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적절히 개걸폭렬권과 투신검각권의 묘리를 담아 펼치는 둘의 모습은 혈교인들을 압도했다.
조민 쪽도 만만치 않은 모습을 보였다.
샤오롱이 조민과 합세하여 다른 혈교인들을 상대했다.
중국행 전에 제갈신길은 현원진신공을 대성하자 조민을 일대일로 가르쳤다.
덕분에 조민은 현원신공을 십 성의 경지에 올릴 수 있었다.
거기다 제갈세가에서 가보로 내려오는 옥섭선(玉攝扇)까지 챙겨왔다.
“버티기 힘드실 거예요.”
후웅-
조민이 현원신공의 묘리를 옥섭선에 담아 휘두르자 강한 풍압이 뿜어져 나갔다.
덕분에 혈교인들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자 그 사이를 샤오롱이 파고들어 쌍두사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그 모습에 황 장로는 슬슬 불안해졌다.
오십이나 되는 인원이 고작 네 명에게 붙잡혀 있다니.
이 상황을 타파하려면 자신이 나서야 했다.
그런데 이미 분당 120회를 넘어선 심박수에 그러질 못했다.
‘생사공이라니, 처음 들어보는 무공이다. 도대체 저자는 누구란 말인가.’
이런 실력자들을 부리는 시후의 존재에 의구심이 들었다.
저들의 수장은 이미 자신에게 관심을 끊은 것인지 다른 이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황 장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아직도 움직이지 못하는 혈교인들을 봤다.
‘이곳에서 승리를 취할 수 없다면 우리의 흔적이라도 지워야 한다.’
생각이 끝나자 실행은 빨랐다.
삐이이이-
황 장로는 휘파람에 내공을 실어 불었다.
대회의실을 우렁차게 울리는 휘파람 소리에 혈교인들이 몸을 움찔했다.
그러고는 다들 이를 악물고는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들의 몸에서 짙은 핏빛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시후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저 미친 새끼가!! 다들 물러나!”
시후의 다급한 목소리에 다들 반사적으로 물러나며 한곳으로 모였다.
그와 동시에 핏빛 기운을 흘리던 녀석들이 온몸에서 피를 뿜어내며 몸을 부풀렸다.
“설마, 자폭?!”
그제야 혈교인들이 동귀어진의 수법을 사용하는 것을 알았다.
어찌해야 하나 싶을 때 시후가 일행들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퍼버펑-
동시다발적으로 혈교인들의 몸이 폭발하며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미사일이라도 터지는 듯했다.
핏빛 열기가 일행들을 덮쳐왔다.
그 순간 시후가 한쪽 팔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거대한 기벽(氣壁)이 솟아올랐다.
그 길이가 대회의실 끝과 끝에 다다를 정도였다.
콰과쾅-
엄청난 굉음과 진동이 대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샤오롱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무공을 익힌 후에 지금과 같은 무위를 보여준 이를 처음 본 거였다.
다른 이들 역시 시후가 보여준 무위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샤오롱과 다른 거라면 시후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잠시 후 폭발음이 잦아들자 기벽도 사그라졌다.
역시나 그 뒤에 살아 있는 혈교인들은 한 명도 없었다.
대폭발이라도 일어난 듯한 대회의실에는 사방에 진득한 피가 잔뜩 뿌려져 있었다.
“어찌 이리도 잔인할 수가.”
“미친 거 아니야? 99명이 동시에 자살하다니.”
믿을 수 없는 혈교인들의 수법에 혀를 내둘렀다.
혈교라는 이름에 이미 예상은 했었지만 설마 꼬리를 잡히자 이처럼 자살할 줄은 몰랐었다.
자신들이 혈교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은 아닌가 싶어 후회가 들었다.
“오빠, 어떻게 하죠? 모두 죽어버렸으니 뒤를 캐낼 방법이… 오빠?”
조민은 사태 파악을 위해 시후를 찾다가 입을 다물었다.
시후가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어서였다.
“팔 성의 제왕검벽으로도 이만한 충격을 받다니…. 이것 봐라?”
방금 시후는 검 없이 제왕검벽을 펼친 거였다.
그것으로 혈교인들의 동귀어진 수법을 막은 거였다.
이것으로 벌써 두 번째였다.
소교주라는 녀석과 만났던 날을 더해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친 게 말이다.
제 목숨은 귀중하게 여길 거라 생각했던 황 장로가 생사공에 적중당한 뒤에 무공을 사용할 줄이야.
시후야말로 자신의 안일함에 치를 떨었다.
그때였다.
“어? 저기.”
샤오롱이 단상 뒤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폭발에 의한 것이 아닌, 인위적으로 뜯겨 나간 환풍구가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시후가 훅하고 사라졌다.
* * *
타다다닥-
“헉, 헉헉.”
좁은 환풍기 통로에 황 장로의 거친 숨소리가 가득했다.
황 장로는 네발짐승처럼 빠르게 기어갔다.
지금 황 장로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빨리,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혈교를 적대시하는 세력이 나타났다고.’
비밀리에 무림을 장악하려던 혈교의 존재를 눈치챈 존재.
약선방과 우호적이며 J.K 제약회사와 접점이 있는 인물.
혈천수라강 오 성을 익힌 혈교인 98명의 혈폭공(血爆功)을 와해한 인물.
전에 없는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에 대한 정보를 혈교에 꼭 알려야 했다.
그렇게 좁고 어두운 미로 같은 환풍구를 기어가길 얼마, 저 멀리 빛이 보였다.
빛이 보이자 황 장로는 기어가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쾅-
“헉, 헉헉.”
환풍구를 부수며 빠져나온 황 장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대회의실의 환풍구는 약선방 뒤편 1층 외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황 장로는 빠르게 품속을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익숙하게 전화번호를 누른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한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사이 통화가 연결되었는지 상대방 목소리가 들렸다.
- 여보세요.
“헉, 헉헉. 나요. 이곳에 문제가 생겼소.”
- 황 장로? 이곳이라면… 약선방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입니까?
“헉, 헉헉. 그, 그렇소. 어서 접견 장소를 알려주시오. 내 상세히 설명하리다.”
- 숭산. 그분께서도 그리로 출발하셨으니 그곳으로 오시오.
“아, 알겠소. 내 빠르게 가리다.”
띠릭-
통화를 종료하고는 폰을 멀리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화려한 밤거리에서 몸을 숨기기 위해 좁은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벽에 몸을 밀착한 황 장로는 숨을 고르며 한쪽 손목을 움켜쥐었다.
“헉, 헉헉…. 미친. 벌써 160을 넘고 있다.”
환풍구에 숨어들기 위해서 아주 잠깐 운기한 후로는 오로지 신체 능력만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었다.
“도대체 생사공이라는 게 뭐길래….”
“궁금해?”
“으악!”
황 장로는 느닷없이 벽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비명을 질렀다.
후다닥 벽에서 떨어지자 그가 서 있던 벽에서 그림자가 꿀렁이며 밀려 나왔다.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것은 시후였다.
황 장로는 대회의실에 있어야 할 시후가 이곳에 나타나자 식은땀이 흘렀다.
다른 혈교인들이 동귀어진의 수법으로 만들어 준 시간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시후는 절망에 빠져든 황 장로의 표정을 보며 한 걸음 나아갔다.
“생사공이라는 것은 말이다. 마청우가 만든 무공이었다.”
“뭐?”
“너희들에게는 어떤 이름으로 계승되었는지 모르지만, 사람마다 가진 기의 흐름을 파악하여 그것을 아주 살짝 뒤흔들어 주는 무공이란 말이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으흠, 이해를 못 하나? 아! 너희 의원 녀석들에게는 사상인(四象人)이라는 말이 더 친숙하겠구나.”
“……!”
시후의 말에 황 장로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시후가 말한 그것이 바로 약선방 방주인 송하룡이 고독을 먹은 이유였다.
약선방 방주에게만 내려오는 비전인 사상지공(四象之功).
대쪽 같은 성격의 송하룡이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혈독까지 사용했다.
그런데 그 무공을 시후가 언급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네놈은 도대체 누구이기에 사상지공을 아는 것이냐.”
“지금은 사상지공이라고 불리는가 보구나.”
“헛소리 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커헉!”
쿵-
시후는 언성을 높이는 황 장로의 목을 움켜쥐고는 벽에 처박았다.
고통에 표정을 일그러진 황 장로의 얼굴에 바짝 다가간 시후는 낮게 속삭였다.
“질문은 네가 아니라 내가 하는 거다.”
“크윽.”
“첫 번째 질문. 네놈도 고독을 먹었나?”
“…….”
시후는 자신의 질문에 입을 꾹 닫은 황 장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요즘은 어떤 고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만.”
푹-
시후는 황 장로의 아혈과 마혈을 짚었다.
다시 한번 몸과 목소리의 자유를 잃은 황 장로는 점점 굳어지는 시후의 표정을 보았다.
“내가 하는 것은 좀 색다를 거야.”
치직-
시후는 검지를 세웠다.
그러자 검지에서 스파크가 번뜩였다.
검지에 천마뇌전공의 기운을 응집하고는 황 장로의 미간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
황 장로는 눈이 찢어지라 부릅뜨며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시후가 뇌전의 기운을 황 장로의 몸속에 집어넣은 거였다.
이 방법은 천마 시절 오로지 고통만을 선사하기 위해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물론, 혈교 녀석들에게만 사용했었지.’
대상의 몸에 들어간 뇌전의 기운은 흐름에 상관없이 사방팔방 날뛰었다.
피부, 근육, 혈관과 신경까지.
그것에 당한 이는 맑은 하늘에 날벼락으로 두들겨 맞는 듯했다.
그 결과는 게거품에 피눈물을 흘리는 황 장로와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