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진지춘은 병상에 누워 있는 송하룡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시후가 치료라고 해준 믿기 힘든 장면이 아직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사람의 피를 뽑았다가 다시 넣다니.’
한평생을 의원으로 살면서 생각도 해보지 못한 방법이었다.
거기다가 이런 샘플까지 주다니.
찰랑-
진지춘은 손에 들려 있는 작은 유리병을 흔들었다.
안에는 아주 소량의 피가 들어 있었다.
그 피는 송하룡에게서 빼내었던 피에서 따로 분리한 혈독이었다.
얼핏 보면 일반적인 피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시후가 혈독이라며 건네주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거였다.
진지춘은 고개를 돌려 소파에 앉아 용정차를 음미하고 있는 시후를 바라봤다.
“도련님, 괜찮으신 거죠?”
“당연하지. 그동안 기가 허해져서 아직 눈을 뜨지 못하는 거야.”
“아니요, 도련님이요. 운기조식하신다더니 지금 용정차만 들고 계시잖아요.”
“그거라면 하고 있잖아. 이거 안 보이냐?”
시후는 검지를 들어 머리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처럼 흰색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후의 표정을 살피던 진지춘은 문득 번뜩였다.
“설마… 운기조식 중에 일상생활이 가능하신 겁니까?”
“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시후에 진지춘은 지난날을 떠올렸다.
태산과 인호의 임독양맥을 뚫어줄 때 어떻게 다른 심법을 동시에 다룰 수 있었는지.
송하룡의 몸에서 혈액을 빼내고 혈독을 나누는 엄청난 짓을 하면서도 말을 할 수 있었는지.
방금 시후의 대답으로 모든 게 이해되었다.
“도련님, 대단하십니다.”
“뭐, 내가 좀 대단하기는 하지.”
“허, 허허. 진짜 그 말이 그렇게 잘 어울리시는 분도 없을 겁니다.”
“알면 앞으로는 내가 하는 일에 토는 그만 달아라.”
“에이~. 나이 먹은 노파심에서 한 말이었는데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십니까.”
송하룡을 치료하기 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거론한 거였다.
시후는 멋쩍은 듯이 머리를 긁적이는 진지춘을 보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려 침상을 바라봤다.
혈독을 제거했지만,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는 송하룡.
그의 팔에는 혈액 팩이 찔러져 있었다.
부족한 피를 공급하는 거였다.
이것이 바로 혈독의 가장 무서운 점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독사가 물은 정도의 아주 적은 소량의 독이 몸에 들어가지만.
그 독은 점차 몸속의 피와 동화되어 버린다.
그래서 시후의 방법으로 혈독을 빼냈을 때는 저렇게 부족한 피를 채워 넣어줘야 했다.
송하룡의 몸에 들어가는 혈액을 바라보던 시후는 과거를 회상했다.
천마 시절, 혈교와의 전쟁에서 혈독에 의해 죽어간 교인들에게 저런 혈액 공급 방법을 사용했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살릴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봐야 부질없는 거였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아쉬운 마음은 혈교에 대한 분노의 마음으로 변했다.
다행이라면 이 더러운 기분을 해소할 방법이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끼익-
“어르신. 녀석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 놓았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샤오롱은 진지춘에게 말하면서도 시후의 눈치를 살폈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 이후 정신을 잃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입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었다.
가래침을 뱉듯 뱉어낸 것은 축 늘어진 흉측한 벌레였다.
샤오롱은 그것이 자신의 뇌 속에 자리하고 있던 혈고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그리고 운기조식을 통해 몸속에 정말 혈고가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저자는 누군데 약선방에서도 치료하지 못하는 혈고를 치료할 수 있단 말이냐.’
J.K 회사 직원으로 변용한 시후의 정체가 몹시도 궁금한 샤오롱이었다.
하지만 그의 정체를 물을 수는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후의 매서운 눈빛에 입을 열 수가 없는 거였다.
샤오롱이 추가적인 보고를 하지 않자 진지춘이 나섰다.
“도련님, 모두 모아 놨답니다.”
“알아. 들었어.”
“가보실 거죠?”
“당연하지. 뱀의 꼬리는 직접 잘라야 맛이니까.”
“그럼, 저는 방주님 곁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그래라.”
시후가 몸을 일으키자 진지춘이 샤오롱에게 눈치를 주어 안내를 하게 했다.
그 뒤를 따라 진지춘을 제외한 다른 일행들이 모두 따랐다.
그렇게 일을 이끌고 샤오롱이 향한 곳은 약선방 건물의 지하였다.
“여긴….”
“대회의실입니다.”
“그럼, 저 단상 위에 있는 녀석들이 그놈들이겠구나.”
몇 시간 전에 태산과 인호가 혈교인들을 구별해낸 대회의실에 들어온 시후는 단상으로 걸어갔다.
그 위에는 99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각기 다른 자세로 몸이 굳은 채로 말이다.
누구는 무언가를 마시는 자세로, 다른 누군가는 앉아 있는 자세로.
다들 얼음이라도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눈동자를 열심히 굴려 상황 파악을 하는 것뿐이었다.
시후는 단상 위로 올라가 그들을 주위를 맴돌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 제법 점혈을 잘했는데?”
“그치? 우리가 그 혈자리를 하루 이틀 본 게 아니라서 그런지 잘 되더라고.”
“맞아, 크큭. 나중에는 진지춘 어르신에게 감사한 마음까지 들었다니까.”
태산과 인호가 다가와 너스레를 떨었다.
시후는 그런 둘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혈자리를 짚어준 게 아니었는데 이 정도면 칭찬할 만했다.
“잘했어. 다음에는 시간을 조절하는 방법도 알려줄게.”
“진짜? 그게 진짜로 가능한 거야?”
“당연하지. 저기 봐. 내가 점혈한 녀석들은 슬슬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잖아.”
시후의 말대로 단상 위에 있는 녀석 중 반 정도가 서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대회의실에 들어선 모두가 긴장했다.
태산과 인호 역시 자세를 고쳐 잡으며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했다.
하지만 그런 모두의 우려와는 달리 녀석들은 마혈과 아혈이 풀렸음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잡혀 온 상태였음에도 다들 차라리 잘 되었다는 표정들이었다.
그 모습에 시후는 고개를 돌려 샤오롱을 바라봤다.
“너희들 약선방이 얼마나 얕잡아 보였는지 알겠구나.”
“…….”
샤오롱 역시 그 말이 무슨 뜻인 줄 알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다른 곳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흥! 무슨 사술을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쿵-
내기를 담은 발구르기로 이목을 집중시킨 황 장로였다.
황 장로가 나서자 다른 녀석들이 그의 뒤로 자리했다.
수적인 우세가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자신감이 있는 것인지.
황 장로는 대놓고 기를 흘리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핏빛 기운에 샤오롱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 기운이 닿은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비릿하면서도 역한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황 장로는 그런 샤오롱에게 눈길을 주었다.
“진 장로도 없이 겨우 이런 녀석들을 믿고 잠자던 호랑이의 수염을 건드린 것이냐?”
“지, 지금 그 말씀은 그대들 모두가 혈교라 인정하는 건가요?”
“하?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혈고에 죽기 싫으면 그저 시키는 일이나 하지 그랬느냐?”
“그걸 어떻게…. 설마 당신이?”
“흐흐흐, 눈치는 여전하구나. 그렇다! 내가 너에게 혈고를 직접 먹였다.”
황 장로의 입에서 나온 말에 샤오롱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
황 장로는 샤오롱이 자는 사이에 몰래 혈고를 먹였다고 했다.
무공을 익힌 샤오롱이 눈치채지 못하게 혈고를 먹였다는 것은 그만큼 둘의 격차가 상당하다는 거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황 장로에게 달려들어 뺨이라도 갈겨주고 싶었지만, 그 사실을 알기에 악만 쓰기 시작했다.
“방주께서 당신을 어떻게 대해 주었는데! 약선방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흥! 방주라는 작자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니 내가 나선 것이 아니냐.”
“뭐요?”
“세상의 흐름을 탈 줄 알아야지. 언제까지 약초나 주무르면서 살 거냐? 대륙을 호령할 만한 능력이 있음에도 쓰지 않으려 하니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그, 그게 무슨….”
샤오롱은 말도 안 되는 황 장로의 말에 치를 떨었다.
황 장로는 그런 샤오롱에게서 시선을 떼 시후 일행을 바라봤다.
“한국에서 왔다고? 굳이 이 먼 곳까지 와서 죽게 생겼구나. 어쩌겠느냐, 너희의 운명을 탓해야지.”
그 말을 끝으로 황 장로가 손을 들어 올리자 뒤에 있던 이들이 걸어 나왔다.
다들 황 장로와 비슷한 핏빛 기운을 피워냈다.
샤오롱은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님을 눈치채고는 식은땀을 흘렸다.
‘진지춘 어르신이라도 모셔왔어야 하는데, 어르신은 왜 저자만… 응?’
진지춘이 가벼운 성격이기는 해도 그나마 약선방에서는 알아주는 내공의 소유자였기에 그의 부재가 아쉬웠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주변에 당황하는 이는 자신 혼자였다.
그 이유를 찾으려는 찰나 태산과 인호가 앞으로 걸어갔다.
“여기는 우리가 맡아볼게.”
“으흠….”
둘이 의지를 보이자 시후를 잠시 고민했다.
다른 녀석들이야 어떨지 모르지만 황 장로라는 녀석은 태산과 인호에게 버거운 상태였다.
혈천수라강 6성의 경지를 보이는 황 장로만 없다면 5성의 경지에도 못 미치는 녀석들은 태산과 인호가 충분히 요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후는 황 장로를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단상 뒤에 있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의술은 인술이다’라…. 녀석이 자주 하던 말인데…. 아, 그러면 되겠구나!”
시후는 마청우가 남긴 글귀를 보며 황 장로를 어찌할지 정했다.
아무리 죽을죄를 지었다 한들 생명은 소중하다고 말했던 마청우.
독과 약의 조화를 이루어낸 약선방의 시조.
시후는 그런 마청우에게 천마로서 하사한 무공을 떠올렸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네놈이 직접 헤쳐나오는 것도 재미있겠구나. 생사공(生死功).”
“뭐? 커헉!”
쉬이잉-
시후가 땅을 박차며 순간적으로 황 장로의 앞에 다다랐다가 뒤로 물러났다.
황 장로가 느낀 거라고는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가슴을 훑고 지나간 느낌뿐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바람이 지나간 후부터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있다는 거였다.
“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삶과 죽음을 네가 선택하도록 도와준 것이다.”
“뭐라?”
“조금 전 네놈 가슴에 생사공의 기운을 흘려 놓았다. 시간이 갈수록 네놈의 심박수가 조금씩 조금씩 빨라질 게다.”
“……!”
시후의 말에 황 장로는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 말대로였다.
황 장로도 의원이었기에 자기 몸 상태는 빠르게 확인했다.
평소 분당 70회로 뛰던 심장이 조금씩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점점 빨라지는 심장의 끝이 무엇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 전 시후가 보여준 무위가 결코 하수가 아님을 눈치챘다.
시후는 빠르게 상황 판단을 하는 황 장로를 보며 피식 웃었다.
“녀석, 눈치는 제법이구나. 그럼 내 넓은 아량으로 살 방법을 알려주랴?”
“…….”
“혈천수라강을 거두거라. 운기를 멈추면 죽지는 않을 게다.”
“그, 그걸 네놈이 어떻게?!”
무공을 익힌 이에게 무공을 사용하지 말라니.
그보다 더 끔찍한 말은 없을 거였다.
하지만 지금 황 장로의 귀에는 그 말은 들어오지 않았다.
“네놈이 혈천수라강을 어찌 아는 것이냐?!”
혈교인에게만 전해지는 그 비밀을 시후가 거론하자 놀란 거였다.
이는 걸어 나가던 다른 혈교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놀란 토끼 눈으로 어찌해야 할지 몰라 황 장로를 바라봤다.
황 장로는 명령을 기다리는 시선에 이를 악물었다.
모두 죽여 입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시후를 상대하기 위해 자신이 나서야 했다.
그렇다고 생사공인가 뭐인가를 무시하고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놈만 빼고 모두 죽여!”
황 장로의 명령이 떨어지자 혈교인들이 달려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