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진지춘은 근래 들어 자신이 한 말 중에 오늘 한 말을 가장 후회했다.
“우웨에엑!!!”
남자 화장실의 변기를 부여잡고 연신 속에 있는 것들을 게워내는 진지춘.
그런 진지춘의 등을 두드려주는 태산과 인호는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저희는 은신술 가르쳐 준다며 오감을 닫았었습니다.”
“허억, 허억! 오, 오감을 말이냐?”
“네. 그 상태에서 오감을 되찾으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만 하면 은신술을 익힐 수 있었고?”
“에이, 설마요. 그다음으로는 땅속에 묻혔었죠.”
“헉! 땅속에?!”
“네. 그러고는 기감에서 벗어나 보라고 하더라고요.”
진지춘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시후 같은 고수의 기감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알고 있는데 거기에 땅속에 묻혀서라니.
그거에 비하면 자신이 겪은 일은 새 발의 피였다.
“하아…. 포기해야 하나?”
“포기하시게요? 그러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으세요?”
“하지만 목덜미를 잡힌 채로 그림자 사이를 돌아다니는 것은 너무 끔찍하단 말이다.”
그 칭얼거림처럼 진지춘은 시후에게 잡혀 돌아다녔다.
속이 울렁거리다 못해 토를 할 정도로 말이다.
대회의실에서 시후가 비천잠행술을 가르쳐 준다고 했을 때만 해도 진지춘은 큰 기대감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진지춘은 일생 중에 가장 끔찍한 경험을 했다.
마치 세상의 이면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어둠과 어둠으로, 그림자에서 그림자를 이동해 다녔다.
한편 시후는 진지춘에게 속성 과외를 해주며 본격적으로 혈교인들을 색출했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을 진행해야 했기에 태산과 인호에게도 비천잠행술을 통해 혈교인들을 제압하라고 했다.
다만, 죽이지는 말고 마혈과 아혈을 짚어서 말이다.
제갈세가와 당가의 가주들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실력이기에 믿고 맡겼다.
태산과 인호 역시, 그동안 시후가 진지춘의 마혈과 아혈을 짚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았기에 이미 그 혈자리에 익숙했다.
그렇게 시후는 꼭대기 층에서부터 아래로, 태산과 인호는 지하에서부터 위로.
빠르게 이동하며 혈교인들의 마혈과 아혈을 짚었다.
30층에 달하는 전각에서 시후가 25층을, 나머지 5층은 태산과 인호가 소화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멀쩡히 일하던 동료가 갑자기 움직이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혈교인 몇몇이 다른 곳에 연락을 취하려 할 때 샤오롱이 사내 방송을 했다.
- 긴급 상황. 긴급 상황. 현 시간부로 약선방의 모든 통신 시설을 차단했으며, 출입구를 봉쇄합니다.
그 짧은 말로 창문부터 시작해 모든 문에 철문이 내려졌으며, 약선방 전체에 전자파 차단기가 작동했다.
그렇게 완전히 외부와 고립된 상태에서 시후 일행은 99명의 혈교인을 찾았다.
시후는 천잠음영술을 펼치는 동안 동반했던 진지춘을 30층 입구에서 놓아주었다.
그것도 어서 토하고 오라는 듯이 화장실 앞에서 말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게워내고 나온 진지춘은 태산과 인호의 부축을 받으며 화장실을 나올 수 있었다.
파김치가 된 진지춘의 모습에 시후는 혀를 찼다.
“쯧, 쯧쯧. 그렇게 허약해서야.”
“하아…. 도련님. 이렇게 하면 정말 그 은신술을 익힐 수 있는 겁니까?”
“뭐야, 돌팔이. 지금 나 의심하는 거야?”
“아니. 그런 것은 아닌데요. 태산과 인호에게 가르쳐 주시던 방법과는 다른 듯해서 말입니다.”
“당연한 거 아니냐? 쟤들은 무공의 기초를 다지던 초짜였고 너는 이미 삼 갑자의 내공을 지닌 고수인데?”
시후의 말에 진지춘은 깜짝 놀라며 발끈했다.
“제가 또 내공이 삼 갑자가 된 건 어찌 아셨습니까?!”
“그냥 딱 보면 알아.”
“그래서 그렇게 하신 겁니까? 부러우셔서?!”
“뭐?”
“제가 신명단과 소명단을 만들어 먹고 내공을 일 갑자나 올리니까 약이 올라 그러신 거냐고요.”
“하? 너 오늘 아주 작정했구나?”
시후는 이제는 대놓고 대드는 진지춘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사실 시후가 진지춘에게 비천잠행술을 가르쳐주는 데는 이 방법이 아니어도 다른 방법들이 열 가지는 있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빠른 방법은 비천잠행술의 운기 방식을 직접 몸에 새겨 넣어주는 거였다.
거기에 직접 체험까지 해본다면 더할 나위 없는 배움의 장이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비천잠행술을 대충 흉내는 낼 수 있을 거였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노고도 몰라주고 저리 헛소리를 하니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너 요즘 아주 많이 기어오르는 거 아냐?”
“와~! 이제 말도 못 합니까? 왜요? 또 마혈과 아혈을 짚으시려고요? 해보십시오~ 자요!”
배까지 내밀며 당장 해보라는 진지춘을 보며 시후는 손을 뻗었다.
푹-
실로 오랜만에 뻗어보는 손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진지춘은 별다른 통증조차 느끼지 못했다.
몸도 움직이고 말도 할 수 있었다.
“뭐 하신 겁니까?”
진지춘은 자신의 어깻죽지를 검지로 찌른 시후를 보며 의아해했다.
약선방에서 수많은 환자를 돌보며 익힌 혈자리는 모두 외우고 있었다.
혈을 찌른 것이 분명했는데 이곳에 있는 혈자리가 무엇에 쓰는지 알지 못하는 거였다.
하지만, 생전 처음 찔려본 혈자리의 효능을 알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꾸루룩-
“헉! 도, 도련님? 이, 이게 무슨… 으헉!!”
진지춘은 비명을 지르며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오토바이가 지나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진지춘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흥, 짜식이 까불고 있어.”
“와…. 저걸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그러게? 저거 사람한테 쓰는 건 재민이네한테 써먹을 때 보고 처음 보는 거지?”
“맞아. 그때 봉인했던 통한의 한방을 돌팔이에게 써먹을 줄이야. 훅!”
시후는 치켜든 검지에 입김을 한 번 불어주고는 피식 웃었다.
아마도 진지춘은 앞으로 일각 정도는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어야 할 거였다.
‘괄약근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말이지.’
똥싸개 패거리 때보다 배는 쏟아져 나오게 손을 썼으니 말이다.
실로 오랜만에 후련한 기분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그 앞에는 실내인데도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이들이 있었다.
“여기는 외부인 출입 금지인 곳입니다. 돌아가십시오.”
“뭐야, 아직 이야기가 다 된 게 아니었어?”
시후는 자신을 막아서는 이들을 보며 검지를 튕겼다.
지풍을 날려 경호원들을 모두 기절시킨 시후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폐 속까지 상쾌해지는 향이 맡아졌다.
“이것 봐라? 이런 곳에 신선로가 있어?”
시후는 방안 중앙에 있는 향로로 다가갔다.
농구공만 한 크기의 향로는 연기를 피워내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봤다면 좀 오래된 향로라고 생각했겠지만 시후는 그 향로를 본 기억이 있었다.
천마 시절, 마청우가 자신에게 선물로 준 거였다.
잠이 들기 전에 향을 피우면 숙면에 취할 수 있다며 말이다.
강시후로 살아가면서 천마 시절의 유물을 보게 되자 감회가 새로웠다.
그 때문일까,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진지춘을 보면서도 화를 내지 않았다.
“헉, 헉헉, 도련님….”
“적당히 대들어라, 알았냐?”
진지춘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후는 되었다며 대충 손을 휘휘 젓고는 병상을 바라봤다.
“신선로까지 있는 곳이니 저기 누워 있는 늙은이가 약선방 방주가 맞겠구나?”
그곳에는 진지춘이 떠나기 전에 봤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핼쑥한 모습의 약선방 방주 송하룡이 누워 있었다.
진지춘은 떨리는 손으로 송하룡에게 다가가 살며시 맥을 짚어보았다.
“크윽, 방주. 이게 무슨 일입니까.”
진지춘은 다 죽어가는 송하룡의 맥을 느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 맥이면 식물인간이나 다름없었다.
이 모든 게 혈독 탓이라는 생각이 들자 진지춘은 벌떡 일어났다.
“내 이 자식들을 당장….”
“앉아. 어차피 그 녀석들은 샤오롱이 모아 올 테니까.”
“크윽.”
진지춘은 쓴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 앉았다.
본래라면 몸이 썩어 문드러지고 한 줌의 핏물이 되어 죽어야 하는 혈독이었지만, 송하룡은 약선방의 모든 의술과 약재들을 이용하여 버티는 중이었다.
만약 시후가 혈독을 해독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다면 진지춘은 지금 송하룡의 모습을 보는 순간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도련님. 정말 해독할 수 있는 겁니까?”
“너, 그거 몹시 나쁜 버릇이야. 내가 한다면 하는 것이고 된다면 되는 것이라 생각하란 말이야.”
시후를 모르는 누군가가 들었다면 안하무인(眼下無人)이라고 말했겠지만, 이 안에 있는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저런 안하무인의 발언이 찰떡인 사람은 다시 없을 거라 생각했다.
진지춘은 눈물을 글썽이며 한쪽으로 물러났다.
어서 방주를 치료해 달라는 표현이었다.
그 모습에 시후는 진지춘의 옆으로 다가가 어깨를 다독이고는 송하룡의 인중과 단전에 손을 얹었다.
“모두 내 주위에서 물러서.”
시후가 물러서라고 하자 진지춘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다.
시후가 내공을 이용하여 치료하는 거라 생각하여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는 거였다.
천마분심공을 펼치고 있어 시후는 내공 치료를 하는 도중에도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런 자세들은 후에 큰 도움이 될 것이기에 내버려 두었다.
반면 아직도 옆에 자리하고 있는 진지춘이 눈에 들어왔다.
“너도 비켜.”
“아닙니다. 저는 혈독이 무엇인지 꼭 가까이서 보고야 말겠습니다.”
“왜?”
“처음 보는 독이 아닙니까. 분명 앞으로 무슨 일이 있든 혈독이 나타날 것인데 그것에 대해 대비를 해야지요.”
의원이기 때문일까. 혈독을 연구하려는 진지춘을 보며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알아서 피해라.”
“네?”
“혈독이 빠져나오면 내 주위로 뿌려질 거야. 그렇게 되면 혈독이 닿는 모든 것이 타들어 갈 거고. 그러니 알아서 피하라고.”
“알겠습니다.”
혈독의 위험성을 다시 한번 자각한 진지춘은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제 자기 사람들의 안전에 대한 것은 대비했으니 마음 놓고 치료를 시작하는 시후였다.
두 손에 내공을 응집하고는 천천히 송하룡의 몸속으로 흘려 넣었다.
혈독을 치료하는 방법으로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독에 대한 일반적인 치료법으로 약재를 이용하는 거였다.
피를 이용한 독이었기에 그에 상응하는 약재들을 사용하면 되었다.
천마 시절 마청우가 썼던 대표적인 악재는 독각룡의 피였다.
이곳에서 그것을 구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에 시후는 두 번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이 녀석의 몸속에 있는 피 전부를 뽑아내는 것.’
피는 그 사람 몸무게의 약 8%를 차지하고 있다.
몸무게가 60kg인 사람이라면 약 4.8L의 피가 몸속에 있다.
몸속 구석구석 산소와 영양분을 실어다 주는 역할을 하는 피를 뽑아버리면 생명을 잃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내가 손을 쓴다면 다르지.’
시후는 송하룡의 몸속에 흘려 넣은 기를 혈맥이 아닌 혈관에 흘려 넣었다.
그 때문에 송하룡의 온몸에 혈관들이 팽창하며 울뚝불뚝 솟아올랐다.
진지춘은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시후를 믿고 있기에 두 주먹을 말아쥐며 기다렸다.
그러자 점차 솟아올랐던 혈관들이 다시 가라앉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온몸의 모공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피는 곧 방울방울 맺히더니 시후 주변으로 떠올랐다.
그 양이 어마어마한 것에 다들 송하룡의 몸속에 있던 피가 모두 빠져나온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실제로 송하룡의 몸속에 있던 모든 피를 뽑아낸 시후였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대신 단전에 대고 있던 손을 떼 허공에 떠 있는 핏방울을 향해 뻗었다.
그러자 핏방울들이 스스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점점 빠르게 회전하던 그때.
핏방울에서 무언가 이질적인 것들이 떨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병상 주변으로 떨어져 내리자.
치이익-
“뭐, 뭐야?!”
“윽! 냄새!”
단단한 콘크리트를 단숨에 녹여내며 악취를 뿜어냈다.
다들 그 악취에 코를 막으며 걱정되는 눈빛으로 시후를 바라봤다.
다행히 시후는 어느새 기막을 펼쳐 그것들의 피해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시후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하? 이것들 봐라? 혈독을 쓴 것도 모자라 혈고까지 썼어?”
“혈고요?!”
진지춘은 혈고라는 말에 샤오롱의 머릿속에 들어가 있었던 벌레를 떠올렸다.
이쯤 되자 시후는 호기심이 일었다.
“이 녀석이 깨어나면 물어볼 게 많아졌어.”
도대체 이 녀석이 뭐길래 혈독도 모자라 혈고까지 썼는지.
약선방 방주 송하룡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