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약선방 지하에 있는 대회의실은 그 규모가 상당했다.
300명이 넘는 인원이 모였는데도 전혀 비좁거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단상을 향해 부채꼴로 배열된 자리에 약선방 직원들이 자리했다.
그만한 인원의 시선이 닿는 단상에 오른 태산과 인호는 살짝 긴장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많은 인원의 시선을 받아본 기억이 없었기에 떨리는 거였다.
거기에 지금 이 자리는 상을 받는 다거나 친목을 도모하는 그런 자리가 아니기에 목이 타들어 갔다.
그런 긴장한 둘 사이에 진지춘이 끼어들었다.
“야! 쫄지 마. 너희 곁에는 내가 있잖아?”
“……! 풉!”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 진지춘 때문에 태산과 인호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시후 따라 하신 거 맞죠?”
“크, 크흠. 티 났냐?”
“네. 엄~청요.”
“아~ 잘 안 되네. 도련님이 하실 때는 장난스러우면서도 엄청 든든했는데 말이야.”
“아니에요. 어르신 덕분에 좀 풀렸어요.”
“키킥, 그러냐? 그럼 내가 주접을 좀 떠는 동안에 한 놈도 남김없이 골라내야 한다?”
“네. 맡겨주세요.”
둘의 호언장담에 진지춘은 불안한 마음을 떨치며 단상으로 올랐다.
저 둘의 실력이 자신보다 못한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후가 저 둘이 혈교인을 골라낼 수 있다고 말했으니 분명 그러할 거였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슨 능력이 저 둘에게 있다는 생각을 하며 진지춘은 마이크를 잡았다.
툭툭- 찌이잉-
“아! 아! 마이크 테스트, 하나, 둘, 하나, 둘. 체, 체크, 아! 아! 마이크 테스트, 원, 투. 원, 투.”
마이크 테스트부터 시간을 끌기 시작하는 진지춘이었다.
그의 행동에 약선방 직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장내가 조용해지며 시선이 집중되자 진지춘은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여러분. 제가 한국에 가 있는 동안 여러분께서 일을 참으로 잘해 주셨더군요.”
“…….”
“어찌나 잘해 주셨는지 방주님께서… 빠득!”
진지춘을 잠시 말을 끊고 이를 빠득 갈았다.
그 모습에 약선방 직원 몇몇은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진지춘은 몇 차례 심호흡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방주님께서는 말씀하셨었지요. 약선방은 방주인 자신의 것이 아니다. 약선방에서 일을 하는 직원 한 명 한 명의 것이다. 그리고 약선방은 약재가 있는 이곳이 아니다. 의학을 펼치는 약선방 의원이 있는 자리가 약선방이다.”
“…….”
모두 진지춘의 말에 언제나 선한 웃음으로 미소를 짓던 방주를 떠올리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의술(醫術)은 인술(仁術)이다.]
방주가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었다.
그리고 진지춘이 오른 단상 뒤에 커다랗게 쓰여 있는 글귀이기도 했다.
진지춘은 손을 들어 그 글귀를 가리켰다.
“하지만, 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의술을 배우는 데에는 큰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의술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 노력을 했으니 내가 가진 의술로 사람을 살리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자라는 게 제 모티프였습니다.”
갑자기 삼천포로 빠지는 진지춘의 말에 조민이 다가왔다.
“어르신. 시간이요.”
“알았어.”
진지춘은 조민의 말에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는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가 대었다.
“사설이 길었지만, 방주님이 없는 약선방은 더 이상 약선방이 아니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만약, 이번 일로 방주님께 어떤 사달이라도 나는 날에는 그 원인 제공자를 모두 색출하여 처단할 것입니다.”
진지춘의 엄포에 대회의실 분위기는 싸늘했다.
그때 그런 분위기를 깨며 누군가가 일어났다.
대회의실 조명을 반사할 정도로 빤질빤질한 대머리에 메기수염을 쓰다듬는 노인은 상당히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진 장로, 급한 일이라고 해서 이렇게 모였더니 웬 협박입니까?”
“황 장로…. 따지고 보면 당신의 책임이 제일 크군요?”
“허허, 방주님을 24시간 돌보지 못한 것이 책임이라면 책임이겠지요, 하지만! 한국에서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게임질이나 하던 진 장로의 입에서 나올 대사는 아닌 듯합니다.”
“그래 보입니까?!”
황 장로의 말에 진지춘은 기를 끌어올렸다.
황 장로는 방주를 돌보는 호선단(虎膳團)의 단주였다.
고문서에서나 보던 혈독에 당했다는 것은 누군가가 작정을 하고 독살하려 했다는 것이기에 딱 꼬집어 누군가가 잘못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단주의 건강과 안전을 책임지는 자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너무 무책임했다.
그 때문일까. 진지춘은 황 장로가 혈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 장로, 혹시나 하는 염려에 하는 말입니다만, 그대는 이 일과 무관하겠죠?”
“진 장로! 말이 지나칩니다!”
“지나친지 아닌지는 후에 알게 되겠지요.”
진지춘은 격노하는 황 장로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태산과 인호를 힐끗거렸다.
자신이 마이크를 잡을 때부터 태산과 인호가 그들만의 심법으로 기를 운용하는 것을 느꼈다.
시후의 말대로 개걸심법과 천투심법이 구양진경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혈교인을 찾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아직 모르지만, 둘의 모습을 보니 시후의 말이 들어맞는 것 같았다.
태산과 인호는 약선방 직원들에게서 눈을 떼고는 서로 마주 봤다.
“99명.”
“맞아, 99명. 이거 정말로 되네?”
“그러게 말이야. 심법대로 기를 운용하니까 바로 보이네. 내가 ‘혈교인이요’라고 말하듯 말이야.”
“시후도 우리처럼 혈교인들의 기가 보이는 건가?”
둘은 시호가 알려준 대로 심법을 운용하여 두 눈에 집중했다.
그러자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끈적이는 핏빛의 기를 두르고 있는 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수가 99명. 그중에는 진지춘과 말다툼하던 황 장로라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태산과 인호는 자신들을 바라보는 진지춘의 시선을 느끼고는 애써 외면했다.
시후가 천잠음영술로 사라지며 남긴 전음이 떠올라서였다.
- 혈교 녀석들을 발견한 것은 나를 만날 때까지 발설하지 마.
왜 그런 말을 남겼는지 지금의 상황을 보니 알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들의 긴장감을 녹여주기 위해 장난스러운 모습을 보이던 진지춘이 문제였다.
지금 그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할 것 같은 시한폭탄 같았다.
여기서 황 장로가 혈교인이라고 말하는 순간 진지춘은 살수를 펼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이곳은 난장판이 될 것이었고, 시후의 계획은 물거품이 될 터였다.
반면, 진지춘은 태산과 인호가 자신의 눈짓을 외면하는 것을 보고는 짜증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반색했다.
“찾았구나.”
“뭐요?”
“당신한테 한 말이 아닙니다. 오늘은 이만하면 되었으니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돌아가라는 진지춘의 말에 모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럴 만도 한 게 열심히 일하다가 갑자기 모이라 해서 모였더니 이제는 돌아가라 한다.
똥개 훈련 시키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장로라 하지만 이건 갑질로 보였다.
“사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사장님께서도 저희에게 볼일이 있으신 거 아니었습니까?”
“맞습니다. 사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웅성거리던 이들 중에 몇몇이 샤오롱을 찾기 시작했다.
“샤오롱 사장과 저의 볼일이 같았으니 이제 되었습니다. 제자리로 돌아가 주세요.”
이번에도 정확한 대답 없이 돌아가라고 말하는 진지춘에 모두 발끈하기 시작했다.
“진 장로님께서 해외에 오래 계시더니 감이 없어지셨나 봅니다?”
“뭐요?”
“저희가 아무리 약선방의 직원들이라 하지만 진 장로님께서 부르면 오고 가라면 가는 똥개가 아니란 말입니다.”
“하?”
진지춘은 자신의 말에 따박따박 말대답하는 이들을 보며 황 장로를 힐끔 보았다.
역시나 이들 모두가 황 장로의 측근들이었다.
황 장로의 입가에 맺혀 있는 옅은 미소가 증거였다.
진지춘은 가뜩이나 신경이 날카로운데 이런 드잡이질이나 하고 있자니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제가 한국에서 기연을 만났는데 이번에 확인시켜 드리게 되었네요.”
후웅-
진지춘은 내공을 끌어올리며 주위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본래 이 갑자의 내공을 가지고 있던 진지춘이었지만, 이번에 시후를 만나면서 발전이 있었다.
신명단의 제조법을 받아 직접 복용도 했고, 양산형인 소명단은 입이 심심할 때마다 씹어 먹었다.
그 결과 차근차근 쌓이던 내공은 어느덧 삼 갑자에 이르렀다.
의원으로 살아가기에 살생을 위한 내공심법을 익히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내공을 허공에 흩뿌려 상대방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 결과는 확실했다.
모두가 자신의 피부를 따갑게 찌르는 진지춘의 내공을 느꼈다.
그렇게 웅성웅성 이던 소리도 어느덧 낮은 신음으로 바뀌고 있었다.
내공이 부족한 이들이 피부 속을 파고드는 고통에 신음을 흘리는 거였다.
황 장로 또한 놀란 토끼 눈을 뜨고 있었다.
진지춘이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는 자신과 내공 수위가 비슷했었다.
비꼬는 말투로 한국에 오래 있었다고 했지만, 그리 오래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에 어떻게 이만큼의 내공을 얻었는지 믿을 수 없었다.
“지, 진 장로, 진정하시지요. 다들 힘들어하지 않습니까?”
“진정은 여러분들이 하셔야지요. 다들 진정은 되셨습니까?”
끄덕-끄덕-
진지춘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진지춘이 기를 거두자 서둘러 대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마지막까지 있던 황 장로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진지춘은 태산과 인호에게 다가갔다.
“찾았느냐?”
“네.”
“후…. 정말로 있었구나.”
진지춘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집에 벌레가 들끓는 것을 본 것처럼 더러운 기분이었다.
“하아…!”
“기분 더럽지?”
“깜짝이야! 도련님?”
진지춘은 자신의 그림자에서 훅하고 올라온 시후에 깜짝 놀랐다.
몇 번을 봤어도 시후의 은신술은 참으로 부러웠다.
저런 은신술을 자신이 익히고 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방주를 저렇게 만든 놈들을 처단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호~ 그래?”
“네? 뭐가요?”
“은신술 배워볼래?”
“진짜요?”
“응. 진짜로.”
진지춘은 자기 생각을 어떻게 읽었는지보다 은신술을 배울 수 있다는 것에 정신이 팔렸다.
뒤에 있는 태산과 인호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세차게 젓는 것도 못 볼 정도로 말이다.
* * *
“끼야아아악!!!!”
벌써 한 시진 동안이나 비명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홍콩 구룡의 낡은 건물이 들썩일 정도의 비명이었다.
그 건물 옥상에서 진류강은 입을 꾹 다문 채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잠시 후 끊이지 않을 것 같던 비명이 멈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인 한 명이 옥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꼽추여서 허리를 숙이지 않아도 인사를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진류강에게 허리를 숙여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진류강은 그 상자를 보며 낮은 침음성을 내뱉었다.
“준비해라. 그 상자를 보관할 장소는 소림이다.”
“네.”
꼽추 노인이 사라지자 진류강은 달빛 한 줌 없는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반드시 죽이리라! 남궁정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