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샤오롱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사장실이었다.
“장로님께서 모시고 오신 분들이신데 아무 곳에서나 대접할 수는 없어 이리로 모셨습니다. 괜찮으시죠?”
샤오롱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언제 준비했는지 비서들이 차를 내왔다.
진지춘은 차를 받아 들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줬다.
“허, 허허. 약선방의 약차 향은 언제 맡아도 향기롭구나.”
“평소 드시던 약차라 들어서 준비했습니다.”
“허, 허허. 고맙기도 해라.”
진지춘은 너스레를 떨며 차분한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솔직히 지금 당장이라도 시후에게 애걸복걸해 방주에게 가고 싶었다.
의식불명으로 쓰러져 있는 방주는 이곳 약선방 전각 꼭대기 층에 있었다.
시후라면 방주를 만나는 순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혈독을 치료해줄 거라는 기대감이 일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시후의 말대로라면 혈독을 발독(發毒)한 혈교인이 이곳에 숨어 있을 테니까 말이다.
방주를 치료한다는 소식이 이곳저곳에 퍼지게 되면 녀석들이 손을 쓸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샤오롱이 내주는 차를 마시며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그들의 이목을 속이고 시후가 방주에게 다가갈 순간을 말이다.
그래도 이제 곧, 시후가 방주를 치료해 주리라 생각하자 진지춘은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그 때문일까. 느긋해 보이는 진지춘의 모습이 샤오롱에게는 상당히 이질적인 모습처럼 보였다.
“장로님께서는 무슨 방도를 찾으셨나 봅니다?”
“방도?”
“네. 방주님을 치료하실 방도요. 그렇지 않고서야 방주님과 애틋한 사이셨던 장로님께서 이리 태평하게 차를 음미하고 계실 리가 없으실 테니까요.”
샤오롱의 날카로운 지적에 진지춘은 입으로 가져가던 찻잔을 멈추었다.
순간 자신이 실수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슬쩍 눈을 돌려 시후를 바라보았지만 다행이었다.
시후는 샤오롱이 내준 차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을 뿐 자신을 질책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여기서는 대충 둘러댄 후에 이곳을 나가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샤오롱의 말에 대답하려던 진지춘은 입을 닫아야만 했다.
찻잔을 내려놓는 시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띠어져 있는 것을 본 거였다.
시후가 무슨 짓을 벌일 때 짓는 미소였다.
아니나 다를까 시후는 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샤오롱 역시 시후를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시후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무, 무슨 일이시죠?”
[재미지는구나.]
“어?!”
시후의 말에 일행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시후를 알게 된 이후로 시후가 중국어를 하는 것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시후가 말하는 것은 약간 이질적이었지만 중국어가 분명했다.
그것도 대화가 가능할 정도의 언어구사력이었다.
반면 샤오롱은 이상한 말투라고 생각될 정도의 시후의 말을 듣고는 되물어갔다.
[네? 뭐가요?]
[아주 조금의 차이는 있는 듯하다만, 나는 너희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고 너희들도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듯하구나.]
샤오롱은 100세가 넘은 노인이 말하는 듯한 시후의 말투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J.K 제약회사의 일개 사원이 약선방의 사장 앞에서 저런 태도를 보이는데도 다른 이들은 전혀 말리지 않았다.
눈치가 빠른 샤오롱은 순간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스윽-
“어딜.”
“으윽!!”
시후는 샤오롱이 움직이려는 순간 천마기사(天魔氣絲)를 펼쳤다.
시후의 몸에서 뿜어져 나간 수백 가닥의 아주 얇은 기사(氣絲)가 샤오롱을 속박했다.
샤오롱은 딱히 마혈을 점혈당한 것도 아닌데 몸의 통제권을 잃자 당황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네게 물어볼 게 많은데 도망치려 하니 잡을 수밖에 없지 않나?”
“크윽, 진 장로님!”
샤오롱은 자신을 속박한 것이 시후인 것을 알자 진지춘을 불렀다.
네가 데리고 온 자가 이런 짓을 하니 어떻게 좀 해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진지춘을 바라보는 순간 샤오롱은 입을 닫아야만 했다.
언제나 밝고 어떻게 보면 한없이 가벼워 보이던 진지춘의 표정이 아니었다.
진지춘의 눈빛은 마치 당장이라도 자신을 찢어 죽일듯한 눈빛이었다.
샤오롱이 더는 입을 나불대지 않자 진지춘이 입을 열었다.
“네가 감히 방주님을 해하려 들어?!”
“무, 무슨 말씀입니까?”
“하? 이 상황에서도 발뺌하려 한단 말인가? 간사한 혈교인 같으니라고.”
“네? 혀, 혈교요?”
진지춘은 끝까지 발뺌하는 샤오롱을 보며 이를 빠득 갈았다.
더는 방주를 해하려 했던 녀석의 목소리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진지춘은 손바닥에 기를 응집시키며 샤오롱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번쩍 들어 머리를 짓이기려는 순간.
“……! 도련님?”
어째서인지 샤오롱과 마찬가지로 진지춘 역시 천마기사에 몸을 제압당했다.
시후는 그런 둘을 보며 내려놓았던 찻잔을 다시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너는 그 나이 먹고도 성급하구나, 누가 쟤 보고 혈교인이라고 했더냐?”
“네? 그럼,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어, 쟤는 혈교인이 아니다.”
“그럼, 왜 속박하신 겁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물어볼 게 있는데 도망치려 하길래 잡은 것이라고.”
방 안에 있는 모두가 시후의 말에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진지춘은 손바닥에 모았던 기를 흩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말씀을 해주셨어야죠. 미안하다, 샤오롱.”
“아!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제가 방주에게 혈독을 먹인 것은 맞으니까.”
“헉!”
샤오롱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방금까지 이야기의 흐름상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뒤바뀌다니.
거기에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이 방주에게 혈독을 먹인 것까지 알고 있어 보였다.
진지춘은 오락가락하는 시후의 말에 샤오롱이 반응하자 안색을 급변했다.
“정녕 네년이!!!”
“사, 살려 주십시오. 저도 제 목숨을 부지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뭐라? 그게 무슨 개소리더냐?!”
진지춘은 헛소리하지 말라며 샤오롱의 말에 일갈했다.
하지만 시후의 생각은 달랐다.
샤오롱의 말대로 샤오롱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 방주에게 혈독을 먹인 거였다.
물론 발독한 이는 다른 이였겠지만, 샤오롱이 아니었다면 약선방의 방주가 스스로 독을 먹지는 않았을 거였다.
일행들은 이야기의 흐름이 어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끼어들지 못했다.
결국, 참다못한 조민이 시후에게 물었다.
“오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저 녀석, 혈고(血蠱)에 당했어. 그래서 혈교가 시키는 일을 했을 거야.”
“혈고요? 그 독충 말씀하시는 거예요?”
여기 있는 모두가 혈고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다.
태산과 인호는 무협지에서 읽어본 기억이 있었고 다른 이들은 독에 대해서 배울 때 조심해야 하는 벌레로 배웠다.
암수 한 쌍으로, 일단 사람의 뇌로 한 마리가 파고든다면 다른 한 마리로 그에게 고통을 주거나 죽음을 줄 수 있다고 알려진 독충.
혈고라는 말에 진지춘은 샤오롱을 다그쳤다.
“정녕 혈고에 당한 것이냐?!”
“흑, 흑흑, 네. 죄송합니다.”
샤오롱은 그동안 가슴 깊이 숨겨두었던 혈고의 존재를 밝히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만큼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거였다.
진지춘은 약선방의 장로로서 혈고가 어떤 고통을 주는지 알고 있었다.
사람이 죽는 방법 중에 가장 큰 고통이 불에 타 죽는 거라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혈고는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방주에게 독을 쓴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시후는 진지춘이 고민을 하는 것을 보고는 천마기사를 풀었다.
하지만 샤오롱에게는 더욱 강한 천마기사를 펼치며 끌어당겼다.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허공에 떠오르며 시후에게 날아가는 샤오롱은 울음을 뚝 그쳤다.
지금까지 자신이 보아온 그 어떤 이들보다 지금 시후가 보여주는 무위가 엄청났다.
샤오롱이 그렇게 놀란 토끼 눈을 뜨며 지척에 다가오자 시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혈고 없애 줄까?”
“네?! 그, 그게 가능합니까?”
“뭐, 나는 가능해.”
샤오롱은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은 혈고를 없앨 수 있다는 시후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 하나를 속박한 후에 허공에 둥둥 띄울 수 있는 허공섭물의 경지를 펼치는 무인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자 샤오롱은 그 특유의 눈치 빠름을 시전했다.
“제가 도울 일이 무엇입니까?”
“좋아, 눈치가 빠르니 이야기 진행이 쉽겠어. 여기 전각에 있는 인원 모두가 모일 만한 장소가 있을까?”
“지하에 대회의실이 있습니다만….”
“그럼, 모이라고 해.”
“무엇을 하시려고요?”
“썩은 사과 골라내야지.”
시후의 말에 진지춘이 바짝 다가왔다.
“도련님, 이렇게 갑자기요? 혹여 녀석들을 색출하다 일이라도 틀어지면 어쩌시려고요.”
시후는 진지춘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혹여, 일이 틀어지기라도 하면 방주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였다.
시후는 진지춘의 어깨를 다독였다.
“방주한테는 내가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럼, 대회의실에는 누가 갑니까?”
“거기는 태산과 인호가 갈 거야.”
“쟤들이요? 쟤들이 가서 뭘 어찌합니까?”
“뭘 어찌하라는 게 아니야, 그 안에 있는 혈교 녀석들의 얼굴을 익혀서만 오면 돼.”
진지춘은 시후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알 수 없는 미로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더 캐묻고 싶었지만 시후는 귀찮다며 손을 휘휘 젓고는 샤오롱을 바라봤다.
“연락해. 대회의실에 모두 모이라고.”
“네. 그런데 연락하려면 비서에게 말을 해야 하는데….”
샤오롱의 말에 시후는 천마기사를 움직여 인터폰이 있는 곳으로 샤오롱을 움직였다.
그러자 샤오롱은 비서에게 연락하여 사내 방송을 하라고 전달했다.
잠시 후.
- 알려드립니다. 긴급회의가 있으니 모든 직원들은 대회의실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긴급회의가 있으니 빠지는 인원 없이 모든 직원들은 대회의실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은 진 장로님과 샤오롱 사장님의 지시임을 말씀드립니다. 이상입니다.
사내 방송이 흘러나가자 시후는 일행들에게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
“대회의실에 가면 진지춘 네가 대충 아무 말이나 해. 그사이 태산과 인호는 혈교 녀석들이 누구인지 얼굴을 익혀놓고. 알았지?”
“아니, 우리보고 어떻게 혈교인을 알아내라는 거야?”
“맞아, 그건 너만 가능한 거 아니었어?”
태산과 인호는 자신들에게 일을 떠넘기는 시후에게 무슨 방법이 있냐고 묻는 거였다.
시후는 그런 태산과 인호를 보며 되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너희 정말 모르는 거야?”
“뭐?”
“아… 큰일이네. 왜 모르지? 너희 정도면 알 텐데.”
“무슨 소리야, 그게?”
“너희가 익힌 개걸심법과 천투심법 말이야. 너희 그거 10성 익혔잖아.”
태산과 인호는 시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자신들이 익힌 심법과 혈교인을 알아보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는 눈빛이었다.
시후는 그런 둘의 눈빛에 하는 수 없다며 입을 열었다.
“개걸심법과 천투심법은 구양진경(九陽眞經)에서 비롯된 거야.”
“뭐? 진짜?”
“어. 그러니 대회의실에 가보면 단번에 녀석들을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알았어.”
태산과 인호는 시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진지춘과 당소영, 조민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더는 설명하기 싫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짓고 있는 시후에게 물을 수는 없어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시후는 이제 준비가 끝나가는 것 같자 천마기사를 움직여 샤오롱을 끌어왔다.
그에 샤오롱은 눈을 크게 뜨고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저, 저도 가서 돕겠습니다. 그러니 어서 혈고를 없애 주십시오!”
“그러지.”
진지춘은 샤오롱을 향해 검지를 치켜드는 시후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혈고를 어떻게 없애겠다는 것인지 궁금한 거였다.
그때 시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팔이.”
“네?”
“얘는 같이 못 갈 테니까 네가 시간을 잘 벌어야 한다?”
태산과 인호가 혈교인들의 얼굴을 파악하는 데까지 필요한 시간을 벌라는 시후의 말에 진지춘은 눈을 껌뻑였다.
왜 그것을 자신 혼자서 하느냐는 의문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파지직-
샤오롱을 향해 치켜든 검지에서 순간 스파크가 일어난 거였다.
샤오롱과 진지춘은 스파크를 보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시후는 그런 둘의 반응 따위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검지를 샤오롱의 이마 앞에서 멈추었다.
“좀 아플 거야. 네가 했던 일에 대한 인과응보라 생각해라.”
파지지직-
“꺄아아악!!!”
스파크가 번쩍이는 순간 샤오롱의 끔찍한 비명이 사장실을 가득 채웠다.
잠시 후 빛이 사그라지자, 눈을 뒤집어 까고는 입과 귀에서 연기를 피워내는 샤오롱이 보였다.
시후는 아무렇지 않게 샤오롱을 소파에 눕히고는 훅하고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