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시후는 정저우 신정 국제공항을 빠져나오며 기지개를 길게 켰다.
“으~! 퍼스트 클래스라고 해도 몸이 찌뿌둥하네.”
이코노미석을 이용한 누군가가 들었다면 재수 없다고 눈을 흘겼을 대사였다.
마치 옆에서 가자미눈을 뜨고 있는 진지춘처럼 말이다.
“너 눈깔 똑바로 안 뜨지?”
“이게 다 도련님 때문 아닙니까?”
“어쭈?”
“아니, 처음 경유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그 이후로도 마혈을 짚으시는 건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진지춘이 이렇게 역정을 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곳까지 오기 전 중간에 칭다오 국제공항에서 경유했다.
그곳까지 가는 2시간 동안 진지춘은 굳은 몸으로 퍼스트 클래스의 편안함을 전혀 누리지 못했다.
그래도 경유지인 칭다오에 도착하자 시후가 혈도를 풀어주어 자유로웠다.
하지만 정저우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진지춘은 다시 마혈과 아혈을 점혈당했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말이다.
“너무하기는. 네가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비행기에 오르는 꼴을 보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랬다. 왜?!”
“네?! 그게 무슨 억지이십니까?”
“그러길래 평소에 잘하지 그랬냐?”
“아니, 제가 또 평소에 못했으면 얼마나 못했다고 이러십니까?”
시후는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진지춘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자신에게 그렇게 당했으면 이제 좀 조용해질 만도 한데 어째서인지 이 자식은 그 반대였다.
이제는 침까지 튀기면서 대들고 있었다.
천마 시절에도 저렇게까지 자신에게 대드는 녀석은 없었기에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하지만 귀엽게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그만. 한 마디만 더 하면 약선방까지 가는 동안 입만 나불대게 해주겠어.”
“히익!”
진지춘은 시후의 엄포에 그제야 입을 닫았다.
그러고는 잽싸게 뒤로 물러나며 당소영의 뒤로 몸을 숨겼다.
시후는 그런 진지춘을 보며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당소영을 어찌 생각하고 어찌 대하는지 이미 눈치를 채고 있는 거였다.
당소영의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미는 진지춘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돌팔이. 그만 주접떨고, 약선방은 어디에 있냐?”
“약선방은 이 근처에 있어요.”
“근처?”
진지춘 대신 조민이 말했다.
약선방과 제갈세가는 이미 협력 관계였기에 조민이 잘 알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진지춘처럼 자세한 속사정까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어디에 있고 누가 요직에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전에 할 일이 있어요.”
“뭐?”
“얼굴이요.”
“아! 그렇지. 그럼 근처 호텔에 들어가 볼까?”
“네, 이미 예약해 뒀어요.”
시후와 일행은 이미 예약해 둔 근처 호텔로 향했다.
이들이 호텔로 향한 것은 조민의 말처럼 얼굴을 바꾸기 위함이었다.
시후야 천투변용술로 얼굴과 모습을 바꿀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은 전문 장비를 통해 변장해야 했다.
아직 미성년자의 신분인 시후와 태산, 인호, 조민은 옷부터 갈아입었다.
제갈세가에서 미리 준비해둔 대로 J.K 제약회사의 사원의 모습으로 변용한 시후는 나머지 일행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얼마 전 <불가능은 없다>라는 영화에서 나왔던 인피면구가 만들어지는 장면은 참으로 놀라웠다.
과학의 발전이 얼마나 대단한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는 시후는 변장한 태산과 인호, 그리고 제갈조민의 모습을 보았다.
“히이야, 그렇게 변장하니 제법 어른스러운데?”
“그치? 크으! 무공을 배워서 그런지 발육이 빨라지더라고.”
“맞아, 작년까지만 해도 강태산 몸집에 반만 했었는데 말이야.”
인호는 정장이 잘 어울리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며 흐뭇해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제갈조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소 교복이 잘 어울리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고, 웨이브가 들어간 갈색의 가발까지 쓰니 딱 회사에 처음 들어온 신입사원 같았다.
“오빠, 저는 어때요?”
“잘 어울리네.”
“그쵸? 그쵸?! 이 정도면 어른스러워 보이죠?!”
조민은 평소답지 않게 유난히 어른스러워 보이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조민은 한국에 있을 때보다 이곳 중국에서 더 활발해 보였다.
아마도 제갈세가에서 조민이 갖는 지위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이럴 때는 한마디 말보다는 한 번의 행동이 더 크게 다가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슥-슥-
시후는 조민의 앞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며 웃었다.
“그래, 여기서는 그래도 된다.”
시후의 짧은 말이었지만 조민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럼, 어리광 좀 피워도 되는 거예요?”
“적당한 선에서는?”
조민의 말에 시후는 어깨를 으쓱이며 허락했다.
조민이 어리광을 피워봐야 뭘 얼마나 피겠냐는 생각이었지만 시후는 금방 후회를 했다.
스윽-
“뭐 하냐?”
“왜요? 어리광 피워도 된다면서요? 팔짱 한번 못 껴요?”
“……! 그래. 껴라.”
자신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팔짱을 낀 조민을 보며 시후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도 자기 입으로 꺼낸 말이라 무르기도 뭐하니 그냥 두기로 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조민이 팔짱을 낀 이후로 뒤통수가 계속 따가웠다.
평소라면 고개를 돌려 누구냐고 묻거나 그러지 말라고 말할 테지만 그 시선이 당소영에게서 쏘아져 오는 것을 알았기에 모른 척했다.
그런 셋의 오묘한 분위기가 방 안에 흐르자 태산과 인호의 곁으로 진지춘이 다가갔다.
“거봐라, 챙기긴 누가 누구를 챙겨. 이번 여행에서 저 둘은 도련님 곁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걸? 두고 봐라!”
“어르신이 그걸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진지춘의 말에 태산이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진지춘은 태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독였다.
“내가 달리 어르신이겠냐? 나이를 허투루 먹은 게 아니란 말이지. 자고로 남녀의 그런 핑크빛 감정은 말이다? 아이고… 이 덩치만 큰 어린 양을 어찌할꼬….”
진지춘은 태산을 보며 네가 뭘 알겠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입을 닫았다.
“……! 어르신!”
“뭐, 뭐야?”
덥석-
태산은 갑자기 진지춘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진지춘은 갑작스러운 태산의 행동에 피할 엄두도 못 내고 손을 잡혔다.
방금 태산의 움직임은 웬만한 금나수보다도 빨랐다.
그렇게 당황하는 진지춘에게 태산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르신,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뭐를… 오호라? 이 녀석 마음에 품고 있는 여자가 있는 게로구나?”
“네!!”
진지춘의 질문에 태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태산이 지금 생각하는 여인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여인이었다.
그것도 자신에게 산공독을 먹인 여인. 당소영의 첫째 언니인 당나영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거였다.
당소영이 수선화 같은 이미지의 미인이라면 당나영은 아침 이슬을 머금은 붉은 장미와 같은 미인이었다.
태산은 하필 나쁜 여자에게 마음을 뺏긴 거였다.
그때 이후로 딱히 찾아가거나 연락을 주고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볼 심산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호도 마찬가지였다.
인호 역시 당 자매 중 둘째를 마음에 담고 있었다.
다만, 태산과는 다른 이유로 고백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시후였다.
시후가 당가에서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알고 있기에 망설이는 거였다.
아직 태산과 인호는 당성치가 시후를 주군으로 모시겠다고 맹세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진지춘은 역시나 눈치가 빠르게 태산과 인호의 눈빛을 읽고는 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너희들을 내가 희대의 난봉꾼으로 만들어주마!”
“네? 아, 아니.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그저 여자를 대하는 방법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어허~ 자고로 여자란 알다가도 모르는 존재. 그런 존재를 대하는 방법에 정석이라는 것은 없다.”
“그러면….”
“자고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노. 하. 우. 그걸 차근차근 너희들에게 알려주마.”
꿀꺽-
태산과 인호는 진지춘의 말을 들으며 아주 작은 망상을 떠올렸다.
자신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여인에게 당당한 모습으로 고백을 하고 그녀들과 함께 나란히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제갈조민이 시후에게 매달려 있는 지금 저 모습처럼 말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허, 허허, 그래그래. 그럼~ 우리는 약선방까지 가는 길까지 착 달라붙어 있어 볼까?”
진지춘은 너스레를 떨며 둘의 등을 다독였다.
시후는 그런 진지춘을 보며 콧방귀를 꼈다.
하지만 뭐라 하지는 않았다.
진지춘의 말 중에서 ‘여자란 알다가도 모르는 존재’라는 것은 시후도 동감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후였다.
‘사람’에서 ‘여자’로 말이다.
“그건 독안공으로도 알아내기 힘들지.”
“독안공이요? 그건 뭐예요?”
“넌 몰라야 하는 거다. 이제 나가자.”
“아아! 독안공이 뭔데요? 오빠?!”
시후는 독안공에 관해서 물어오는 조민을 뿌리치며 앞장서서 호텔을 나섰다.
호텔 밖으로 나가자 조민이 미리 불러 놓은 택시 두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후는 두 대의 택시를 보며 진지춘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서 돌팔이가 그렇게 말했었구나?”
아니나 다를까. 진지춘은 택시 앞에서 망설이는 시후를 보고는 후다닥 달려갔다.
태산과 인호를 양쪽에 끼고 말이다.
그렇게 셋이 앞쪽 택시에 오르자 시후는 고개를 저으며 뒤쪽 택시에 올랐다.
미리 목적지를 기사에게 말해 놓았기에 택시는 모두를 태우고 곧장 출발했다.
주변 경관을 잠시 구경하던 그때 택시가 멈춰 섰다.
택시에서 내린 시후는 눈앞의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여기가 약선방이라고?”
“네, 참으로 웅장하지 않습니까?”
“웅장이라… 그러게. 그 표현이 딱 어울리기는 하네.”
눈앞에 보이는 약선방의 모습은 시후가 상상하던 그곳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마청우의 성격으로 미루어 깔끔한 외관의 빌딩 정도를 기대하던 시후의 눈에는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있는 전각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지은 20층짜리의 전각이 말이다.
“돌팔이, 정말 이곳이 약선방의 거처인 것이냐?”
“네!”
“음… 내가 생각한 거랑 매우 다르구나? 너희 약선방의 시조의 취향과는 멀어 보인다만?”
“아~ 본래 시조님 때는 숭산 근처에 자리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전란을 겪으면서 표면적으로 나서야 할 이유가 있어서 이곳에 자리했다고 합니다.”
“아니, 내 말은 이곳에 건물을 지은 것을 말하는 게 아니잖냐. 무슨 건물 주제가 무지개야, 클럽이야? 뭐가 저리 화려해?”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있는 전각의 형태를 대놓고 지적하자 진지춘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런 게 다~ 마케팅입니다. 마케팅! 자고로 현대 사회에서 한의학이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의 외관은 갖고 있어야….”
시후는 진지춘이 떠벌리는 이유를 들으며 대충 짐작했다.
“저거, 네 아이디어지.”
“헙! 어떻게 아셨습니까?”
탁-
“아야! 아픕니다! 도련님!”
시후는 진지춘의 뒤통수에 지풍을 날렸다.
주위에 거니는 사람들도 많았기에 대놓고 뒤통수를 후려칠 수 없어서 지풍으로 대신한 거였다.
물론, 손바닥으로 친 것과 같은 강도로 날렸지만 말이다.
“아… 벌써 피곤한 것 같다.”
“그러십니까? 그럼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안에 들어가면 피로가 확 풀리실 겁니다.”
진지춘은 서둘러 전각의 입구로 달려가며 시후를 맞이했다.
진지춘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확실히 내부는 외관과는 다른 이미지였다.
보통의 건물 내부의 모습이었다.
안내 데스크에 카드키를 찍고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에 산소가 뿜어져 나오는 장치들까지.
진지춘은 주변을 둘러보는 시후를 보며 이것 보라는 듯이 양팔을 펼쳐 보였다.
“그래그래. 알았다. 어서 올라가기나 하자.”
“헤헤, 네.”
“어머? 진지춘 장로님?!”
시후를 향해 굽신거리던 진지춘을 누군가가 불렀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검은색 치파오를 입은 여성이 인사를 해왔다.
진지춘이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샤오롱 아니냐? 이 시간에 여긴 어인 일이냐?”
“방주님의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하셔서 당분간 제가 이곳에 와 있게 되었습니다.”
“그랬구나, 네가 고생이 많다.”
“그런데 이분들은….”
“아, 이분들은 J.K 제약회사에서 오신 분들인데 이번에 새로운 신약에 대해 의논할 게 있어 같이 오게 되었다.”
“아….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샤오롱이라고 합니다. 이곳 약선방 본사의 사장입니다.”
샤오롱의 인사에 조민이 나서서 인사를 받았다.
서로의 소개가 이어지는 동안 조민은 능숙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시후가 눈빛을 번뜩였다.
샤오롱에게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에 독안공을 펼친 거였다.
간단한 인사가 오간 뒤에 일행들에게 임시 출입증이 발급되어 출입문으로 들어섰다.
시후는 슬쩍 진지춘의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여기 직원이 몇 명이나 있냐?”
“평일이니까 아마도 300명은 있을 겁니다. 왜 그러십니까?”
“그래? 이거 추억이 돋는데? 첫날부터 바빠지겠어.”
시후는 아스라한 미소를 지으며 가장 뒤에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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