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짜증이었다.
천마 시절 눈앞에 거슬리는 것들은 무엇이든 힘으로 치워버렸다.
기관진식(機關陣式)의 대가로 불리던 제갈세가를 상대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땅거죽이 일어나고 쇠로 된 거대한 팔들이 공격해 오는 것을 보고 흥미를 느껴 시간을 끌었지만 결국에는 힘으로 눌러 버렸었다.
천의 요새라는 만마곡에 들어갈 때도 오감이 변하는 환영진이 있었지만, 그 또한 잠시 견학해준 후에 힘으로 찢어 버렸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강시후로 살아가기에는 그런 사고방식은 어울리지 않았기에 타협과 공존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런데 오랜만에 염력철암(念力撤巖)의 마음으로 눈앞에 저 녀석들을 치워버리고 싶었다.
“아앙~ 다주힐 님~! 이것 좀 드셔보세요~!”
“하, 하하, 어떤 것을 말이오? 아라크네 그대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열매인지 그 손이 열매인지 내 분간을 할 수가 없어 받아먹기가 힘듭니다~! 하, 하하하!”
저주가 풀린 아라크네는 진지춘의 입에 과일을 넣어주며 갖은 아양을 떨었다.
설상가상으로 진지춘은 한껏 너스레를 떨며 아라크네의 아양을 받아줬다.
그 꼴사나운 모습에 시후는 절로 눈살을 찌푸리며 고민에 빠졌다.
“죽일까? 그래도 되겠지? 여기는 Safety World이니까, 로그아웃되고 24시간 후에 접속하는 것뿐이잖아, 저 녀석이 없다고 해서 헤라 왕국까지 가는 데 큰 지장은 없을 거고….”
시후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무공 중 가장 잔인한 것을 골랐다.
천마면폭장으로 터트려 죽이기는 너무 싱겁고 천마압정으로 짓이겨 죽이기에는 뭔가 아쉬웠다.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조민이 깜짝 놀라며 말려왔다.
“오, 오빠! 뭘 하려고 그러시는 거예요?”
“왜? 뭘? 야! 이것 좀 놔봐. 내가 오늘 저 자식을 죽이지 않으면 화병이 날 것 같단 말이야.”
“오빠!”
조민은 시후가 손을 들어 올리자 그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했다.
솔직히 조민의 눈에도 아라크네와 진지춘의 애정 행각은 꼴불견이었다.
자신도 시후 같은 힘만 있었다면 당장 저 둘을 떨어트려 놓았을 거였다.
그래도 여기서 시후가 진지춘을 죽이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급히 화제를 돌렸다.
“누가 알았겠어요? 저주가 풀린 아라크네가 저런 아름다운 여인이 될 지를요?”
“쯧, 그러게 말이야. 저주가 풀리자마자 저 돌팔이에게 자신의 운명이니 어쩌고 하며 달라붙으니 어이가 없지만 말이다.”
“에이~ 그래도 덕분에 이렇게 일천 마리의 거미들까지 얻어서 이동수단으로 쓰고 있잖아요.”
“쯧, 야! 똑바로 안 걷냐? 흔들리잖아!”
- 끼에에엑.
시후를 등에 태우고 걷는 거미가 울부짖었다.
이 거미는 아라크네의 던전에서 타란에게 넘어오지 않았던 친위대 거미였다.
그때는 흉흉한 눈빛을 빛내며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살기를 내뿜던 녀석들이 이제는 시후 일행들을 태우고 이동 중이었다.
시후는 자신을 향해 울부짖는 거미를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생각에 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타란이 말려왔다.
“후 님, 그 아이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후 님께 말하고 있는 거예요.”
“진짜? 너 이 자식, 이게 진짜 최선이야?”
- 끼에엑.
시후는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은 녀석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 녀석은 친위대 거미 중에서도 가장 덩치가 큰 녀석이었다.
다른 거미들이 한 명씩 태우고 있는 반면에 이 녀석은 시후와 타란과 조민까지 태웠다.
그런데 말까지 알아들으니 쓸모가 있어 보였다.
“야, 너 나 따라다닐래?”
- 끼에엑?
“어두컴컴한 동굴에 갇혀 있는 것보다 더욱 빛나는 세상을 보여줄게. 어때?”
- ……!
시후는 자신의 말에 반응하던 거미가 말없이 더듬이를 움찔하는 것을 보고는 아라크네를 바라봤다.
지금까지 진지춘과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여주던 아라크네가 굳은 표정으로 시후 쪽을 응시했다.
정확히는 시후가 타고 있는 거미를 보는 거였다.
잠시 후 아라크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후 님, 그 아이가 마음에 드십니까?”
“뭐, 쫌?”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시후는 아라크네의 말에 이 녀석이 아라크네에게 허락을 구한 것을 깨달았다.
“쫘아식! 좋았어, 앞으로 네 이름은 ‘동글이’다.”
- 끼에엑!!
동글이라고 불리게 된 거미는 큰 울음소리로 시후의 말에 대답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시후는 타란을 바라봤다.
“기분이 좋다는 뜻이에요.”
“그래? 잘됐네. 타란, 앞으로 이 녀석 좀 부탁할게.”
“네, 동글이는 저 녀석들 대장으로 삼으면 되겠네요.”
타란은 자신들을 뒤따라오는 거미들을 가리켰다.
녀석들은 아라크네 던전을 들어갔을 때 처음 마주친 거미들로 타란의 페로몬을 맡고는 수하가 된 녀석들이었다.
동글이도 타란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더듬이를 흔들었다.
이 모든 것을 옆에서 보고 있던 조민은 조심스럽게 시후에게 물었다.
“그런데 오빠, 왜 저 녀석 이름이 동글이예요?”
“왜는, 동글동글하잖아. 몸도 동글, 머리도 동글, 눈도 동글….”
“자, 잠깐만요! 그런 이유로 이런 흉측한 녀석에게 그런 귀여운 이름을… 꺅!”
- 끼에에엑!!!!
갑자기 몸을 흔드는 동글이에 조민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마치 조민만 등에서 떨어트리려는 몸부림 같았다.
그 모습에 시후는 동글이를 다독였다.
“크큭, 조민아, 너 동글이한테 밉보인 것 같다?”
“하아…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요, 오빠는 이미 타란과 함께하는 순간 거미들을 포섭할 거라고 계획한 거였죠?”
“뭐, 그랬지?”
조민의 말대로 시후는 아라크네에 대한 설명을 한나미에게 듣고 타란을 퀘스트 클리어 키로 여겼다.
그래서 타란을 소환했고, 생각대로 큰 몫을 했다.
지금도 아라크네를 따르는 친위대 거미를 제외하고는 다른 거미들은 타란의 수하가 된 상태였다.
조민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시후에게 바짝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우리를 모두 모으신 거예요? 오빠가 던전에서 보여준 능력과 타란의 특성만 있었어도 클리어할 수 있는 건데요?”
시후는 정확하게 상황 파악을 한 조민에 고개를 끄덕였다.
태평하게 미인의 치마폭에서 헤헤거리는 녀석이나 그저 대형 거미를 타고 이동하는 것에 신난 녀석들과는 다르게 조민은 현재 상황을 다른 관점으로 보고 있었다.
“던전을 클리어하는 거랑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것은 다르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라크네를 던전에서 빼내오는 게 끝이 아니라 헤라 왕국까지 데리고 가는 게 히든 퀘스트 클리어 조건이라는 거지.”
“음. 무슨 말씀인 거예요?”
조민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지 안달 난 모습을 보였다.
아무래도 이곳 지괴는 아직 가르칠 게 많아 보였다.
“아라크네를 원하는 것은 헤라 왕국이야. 하지만 아라크네를 거미로 만든 것은 누구?”
“그거야 아테나… 설마?!”
“맞아. 그래서 너희들이 필요한 거였어.”
시후의 말이 끝나자 조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금 자신들이 걷는 곳은 일전에 시후와 지젤과 D.M 일행들이 헤라 신전 퀘스트를 진행한 사막이었다.
좀비들이 득실거리던 이곳을 시후는 모든 신전을 가동함으로써 좀비의 흔적을 싹 다 지워버렸다.
하지만, 이미 부서진 신전의 건물들과 잔해들은 길가에 즐비했고, 그 위에 세월의 흔적처럼 모래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지형을 파악한 조민은 목소리를 높여 소리를 질렀다.
“모두 준비!”
차라라락-
조민의 말에 진지춘과 비천대는 표정을 확 바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저마다의 무기를 들어 올리며 주위를 경계했다.
시후는 자신이 없는 동안에도 조민이 이들을 훈련시켰다는 생각에 흐뭇했다.
한편, 이번에 새롭게 비천대에 넣게 될 D.M 일행들은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였다.
“너희 그러고 있다가는 죽는다?”
“네? 죽다니요? 으악!”
피슝- 캉-
D.M은 시후의 말에 대답하다가 갑자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미처 대처할 준비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날아온 것은 날이 시퍼런 창이었다.
미리 경계하지 못한 D.M이 창에 꿰뚫리려는 그때, 무언가가 날아와 창을 쳐냈다.
D.M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시후를 봤다.
역시나 시후의 손가락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D.M이 죽을 것 같아 시후가 지풍을 날려 창을 떨군 거였다.
“너희도 유라의 말을 듣고 움직여라.”
“네!!”
방금 전의 일로 D.M 일행들은 단검을 일제히 꺼내 들며 자세를 낮추었다.
갑자기 벌어진 일로 거미들의 걸음이 멈추자 조민이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라!”
“크크, 크큭!!”
모래 언덕 위에서 여러 명의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무언가가 나타났다.
시후 일행들이 타고 있는 거미와 비슷한 크기의 전갈들이었다.
그 위에는 황동 갑옷에 붉은 깃털 장식을 머리에 단 녀석들이 타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큰 붉은 깃털 장식을 달고 가장 거대한 전갈 위에 타고 있는 녀석이 창을 겨누며 입을 열었다.
“왜 이제야 오는 것이냐? 한참을 기다렸지 않느냐?”
매복하고 있었다며 당당하게 말하는 녀석의 모습에 조민은 낮은 어조로 말했다.
“우리를 왜 기다렸지? 너희 누구야?”
“크큭. 그런 건 알 거 없고, 너희는 그냥 여기서 죽어주면 된다.”
스윽-
큰 붉은 깃털 장식을 단 남자가 손을 들어 올리자 다른 모래 언덕에서도 전갈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어진 신호에 언덕을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 수가 결코 시후 일행들이 대동하고 있는 거미들 수에 뒤지지 않았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수천에 달하는 거미와 전갈 몬스터들이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후는 전갈 vs 거미라는 빅 매치를 볼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에 아라크네를 쳐다보았다가 인상을 확 구겼다.
아라크네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진지춘의 품에 안겨 있었다.
“어머머머!! 다주힐 님! 너무 무서워요.”
“허, 허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지켜드릴 테니까요.”
“어머?! 진짜요?! 전 다주힐 님만 믿어요!”
“허, 허허! 허허!!”
진지춘은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아라크네를 껴안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시후는 저도 모르게 이가 빠득 갈렸다.
“아주 꼴값들을…. 넌 나가서 보자.”
진지춘의 저 꼬라지에 대한 분풀이는 이곳이 아닌 현실에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시후는 조민의 어깨를 잡았다.
“어디, 지괴의 실력 좀 볼까?”
“지괴요?”
“어.”
“누가요?”
“너.”
“저요? 제가 지괴예요?”
“어, 앞으로 네 별명은 지괴야. 그게 싫으면 꾀돌이라는 별명도 있는데….”
“돼, 됐어요! 비천대, 선두로 달려 나가세요!”
조민은 동글이처럼 불리게 될까 싶은 걱정에 바로 비천대에게 지시를 내렸다.
비천대는 거미에서 뛰어내리며 앞으로 내달렸다.
전갈들과 가까워져 오자 일비가 소리쳤다.
“비천화벽진, 일 초식.”
스팡-
일비의 외침과 함께 비천대 네 명은 순식간에 네 방향으로 쏘아져 나갔다.
넷의 움직임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기에 전갈들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꼬리를 잘렸다.
- 꾸에에엑!
전갈들의 비명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비천대는 언제 공격했냐는 듯이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순식간에 공격당한 것에 큰 붉은 깃털의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뭣들 하는 거야? 창을 던져!”
촤르르륵-
그의 외침과 동시에 사방에서 창이 날아들었다.
D.M에게 날아오던 속도와 비슷하게 엄청난 빠르기였다.
하지만, 비천대는 그 창들이 지척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리더니 동시에 움직였다.
“비천화벽진, 삼 초식.”
카카카강-
넷이 동시에 회전하자 사방에서 날아드는 창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더는 날아오는 창이 없자 비천대는 회전을 멈추었다.
자신들의 공격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막히자 녀석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순간 조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D.M 일행 공격.”
훅-
D.M 일행이 움직이는 순간 들리는 소리라고는 옷깃이 스치는 소리 정도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 들리는 소리는 적들의 비명이었다.
- 끄아아악!!
어느새 D.M 일행들이 전갈 등으로 이동하여 그 위에 타고 있는 병사들의 목을 잘랐다.
시후는 그 모습에 역시 굴리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의 병사들이 목이 잘리며 쓰러지는 것에 큰 붉은 깃털 장식의 남자는 당황했다.
“뭐, 뭐야? 이건 듣던 거랑 다르잖아?”
“누구한테 무엇을 들었는데요?”
“헉!”
“움직이면 목이 떨어져요.”
척-
큰 붉은 깃털이 병사들의 죽음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조민이 움직인 거였다.
너무나도 쉽게 큰 붉은 깃털의 목에 칼을 겨눈 조민은 만족스러웠다.
시후가 골라준 액세서리의 세트 옵션 스킬이 상당히 쓸모가 있었다.
[그림자 이동술]
시후가 펼치는 천잠음영술에 비견될 만한 스킬이었다.
이제 녀석들의 배후를 캐낼 차례였다.
“말해요, 누가 시켜서….”
배후를 캐내려고 질문을 하려는데 녀석의 몸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았다.
순간 싸한 느낌에 조민이 소리를 질렀다.
“모두 원래 자리로 돌아가요!”
이번에는 D.M 일행까지 조민의 지시에 즉각 반응했다.
빠르게 시후 앞으로 모인 일행들은 보았다.
전갈들과 그 위에 있던 병사들의 몸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말이다.
그 모습에 조민은 등골이 오싹했다.
“오, 오빠, 저거… 자폭 같은데요?”
“그치?”
조민은 몇천에 달하는 녀석들이 동시에 터지면 엄청난 폭발이 일어날 것이고, 자신들도 그것에 휩싸일 거라는 걱정에 물은 거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시후는 강 건너 불 보듯했다.
그때 시후를 안고 있던 타란이 손을 들어 올렸다.
“아가들아?”
촤라라락-
타란의 신호와 함께 이천에 달하는 거미들이 동시에 거미줄을 뿜어냈다.
그 거미줄은 부풀어 오르는 전갈들과 병사들을 순식간에 감싸버렸다.
그와 동시에 아주 미약한 소리가 들렸다.
폭-폭-폭폭
아주 작은 풍선이 터지는 듯한 소리였다.
그것에 조민은 거미줄의 위력이 자신이 상상하던 것 이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앞으로 그 거미줄을 어떻게 사용해야 효율적인지 계산했다.
시후는 그런 조민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는 거다. 그렇게 하나하나 배우고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지괴가 되어 있을 거야.”
“아! 오빠, 말 시키지 말아요. 지금 엄청 바빠요.”
조민은 생각을 방해하는 시후의 말에 버럭했다.
하지만 시후는 그런 조민을 보며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생각은 저 녀석들을 마저 상대하고 하지?”
“……! 헐?”
시후가 가리키는 방향에서 조금 전과 똑같은 전갈 부대가 나타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