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지젤은 눈앞에 모인 유저들을 둘러보며 한숨이 절로 나왔다.
“허? 뭐지? 이 조합은?”
헤라 신전 신관으로서 신전을 찾는 유저들을 수도 없이 보았지만 이렇게 오합지졸처럼 모인 유저들은 처음이었다.
대부분은 파티라는 명목으로 조화롭게 모이는 게 기본이었다.
누군가 몬스터의 공격을 막으면 누군가는 공격하고 또 누군가는 그들을 보조하는 식으로 말이다.
아니면 한쪽 방향 특성으로 치우치거나.
그런데 지금 지젤의 눈앞에 있는 유저들은 이도 저도 아니었다.
대머리에 힘만 세 보이는 유저와 활을 들고 있는데 얍삽해 보이는 유저는 그렇다고 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가 보육원도 아닌데 막냇동생이라며 우쭈쭈 해주는 유저들이나, 신전에 오는데 어둠 특성을 풀풀 풍기는 무표정의 유저까지.
그나마 봐줄 만한 것은 신관인 자신보다 치유 스킬의 효과가 높은 금발의 미남 유저뿐이었다.
거기에 오늘 처음 만나는 것처럼 소개하고 있는 마법사 유저와 학자 유저는 더욱 가관이었다.
둘은 한눈에도 연인 관계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 만큼 딱 달라붙은 채 한시라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화룡점정으로 거미 여왕 타란도 있었다.
이 어이없는 조합은 ‘See 후’라는 괴물 같은 유저를 중심으로 뭉쳐 있었다.
지젤은 자기소개가 한창인 이들을 지나쳐 시후에게 다가갔다.
“후 님? 진짜 이 구성으로 이 던전을 공략하시려는 겁니까?”
“왜? 얘네들이 어때서?”
“아니, 시너지 효과라는 게 있잖습니까? 서로서로 보조해주고 그에 상응하는 효과를 낼 수 있는 조합. 그런데 이들은….”
시후는 지젤의 말을 듣고는 장내를 한 번 훑어보았다.
생긴 모습만으로 본다면 지젤의 말대로 보였다.
하지만 시후의 평가는 달랐다.
태산과 인호는 이미 개걸심법과 천투심법의 숙련도가 Lv. Max인 상태였기에 Lv. 300 이상의 몬스터들도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었다.
거기에 조민 역시 이번에 구입한 암흑 계열 아이템들을 풀세트로 장착한 상태이기에 기존보다 두 배는 능력치가 올라갔다.
비천대 역시 비천화벽진의 숙련도가 80%를 넘어섰기에 3천이 넘는 수의 오크들이 덤벼도 버틸 수 있는 녀석들이었다.
진지춘이야 이번에 받은 보상으로 뭘 그렇게 샀는지 몸에서 자체 발광이 일어나고 있어 걱정 없어 보였다.
조금 걱정되는 이들이라면 이번에 새롭게 참여한 덕칠과 한나미였다.
하지만 한나미의 레벨이 Lv. 298이었고, 덕칠 역시 Lv. 280이었다.
그리고 독안공으로 덕칠의 능력을 살펴본 시후는 새로운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히든 직업까지 가진 녀석도 있는데, 너는 뭐가 그리 걱정이냐?”
“네?! 히든 직업이요? 어느 분이요?!”
지젤은 시후의 말에 깜짝 놀라며 다른 이들을 둘러봤다.
히든 직업을 가진 유저는 그야말로 엄청난 이들이었다.
풍문으로 듣기로는 칼질 한 번에 산을 가르고 손짓 한 번에 땅을 꺼트리는 힘을 갖고 있다고 들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누구에게나 인정을 받았고 어느 곳에 가도 환대를 받았다.
일전에 헤라 신전을 찾아왔던 히든 직업의 유저를 안내한 사제가 있었는데 그 유저와 친분을 쌓더니 고속 승진을 한 예도 있었다.
“후 님! 도대체 어느 분이 히든 직업을 갖고 계신 겁니까?!”
“음….”
시후는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물어오는 지젤을 보며 눈을 흘기었다.
“안알랴줌.”
“네?! 그게 무슨?”
“알려주기 싫다고. 내가 왜 너에게 그걸 알려줘야 하는데?”
시후는 벙찐 지젤의 표정을 보며 그녀를 지나쳤다.
히든 직업이라는 말이 나올 때부터 지젤의 눈에서 처음으로 욕심이 일렁였다.
사제라는 직업을 가진 이였기에 이곳에서 신성력을 그렇게 올리면서도 보이지 않던 욕심이 눈에 보인 거였다.
천마 시절을 생각하면 대체로 저렇게 욕심에 처음으로 눈을 뜬 녀석들은 초장에 잡아주지 않으면 후에 골치가 아파지는 일들이 생겼었다.
뭐, 뒷수습이야 언제나 지괴의 몫이었지만 그래도 보고를 받을 때마다 신경이 쓰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도 문제가 생기면 저 녀석이 해결하려나?”
시후는 천마 시절 지괴를 떠올리다가 이곳에서의 지괴로 점찍은 조민을 바라봤다.
약관의 나이인 것만 빼고는 솔직히 이곳에 있는 녀석 중에서 가장 믿음직해 보였다.
지금도 알아서 척척 일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이번 퀘스트의 중요한 맥락은 헤라 여신과 베틀 짜기를 했다는 ‘아라크네’를 찾는 거였다.
찾기만 하면 납치라도 해서 이번 퀘스트를 클리어할 생각이었다.
시후가 현실에서 혈교 녀석들과 드잡이질하는 동안 조민은 이번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는 계획을 짜두었다.
거기에 그리스 신화에 빠삭한 한나미까지 합류하니 던전 공략에 필요한 정보가 넘쳐났다.
시후는 내공을 일으켜 귀에 둘러 청력을 강화하고는 조민과 한나미의 대화를 엿들었다.
“확실히 이 던전에 아라크네가 있다는 거네요?”
“그럴 거예요. 아라크네는 헤라의 저주를 받아 자신의 둥지를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이곳 생김새를 보니 그것과 흡사해요.”
“그럼, 들어가는 곳은 저곳 하나뿐이라는 건데….”
이미 들어가는 곳까지 찾은 조민의 성과에 시후를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가 지괴 하나는 잘 두었… 응?”
조민을 칭찬하던 시후는 조민이 한나미와의 대화를 중단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의아하게 생각했다.
왜 자신을 쳐다보는지 몰라 어깨를 으쓱거리자 조민이 한숨을 내쉬고는 다가왔다.
“오빠, 여기 정말 오늘 안에 클리어할 생각이신 거죠?”
“그렇다니까?”
“지금까지 한 명도 성공한 적 없는 히든 퀘스트를 꼭 오늘 안에 클리어할 생각이시라는 거죠?”
“왜 같은 말을 두 번이나 해서 강조하는 건데? 문제가 있는 거야?”
“있죠! 그것도 아주 큰!”
시후는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는 조민의 모습에 움찔거렸다.
순간 사자후라도 터트린 것 같아 기세에서 밀린 거였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조민은 현실과 Safety World에서의 성격이 전혀 달랐다.
현실에서는 차분하면서도 냉철한 현실주의자라면 Safety World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는 다혈질 같았다.
하지만 시후는 이런 조민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되레 이런 모습이 조민의 본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피식 웃으며 달랬다.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누가 들으면 나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생각하겠네.”
시후의 말에 조민은 미간을 더욱 좁히며 입을 열었다.
“오빠 때문에 맞거든요? 누구도 해내지 못한 것을 몇 시간 만에 해내겠다고 하는데 허무맹랑하죠. 누가 보면 프로게이머인 줄 알겠어요!”
조민의 말에 시후는 그제야 상황 파악을 했다.
이제 보니 자신 때문에 쉬지 못하고 Safety World에 접속한 게 불만인 거였다.
그리고 그 불만은 조민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불만이었다.
그것을 조민이 대표로 말하는 것뿐이었다.
다행이라면 태산과 인호만은 불만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저 시후가 하는 일이니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믿는 눈치였다.
시후는 이 상태로 던전에 진입해봤자 클리어하는 데 더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동적인 꼭두각시는 필요 없다.”
“네?”
“모두 모여 봐라.”
시후는 자신의 말에 궁금해하는 조민을 뒤로 물리고 모두를 모았다.
지젤과 D.M 일행까지 포함하여 모두가 모이자 시후는 낮은 어조로 말했다.
“오늘이 지나면 나는 당분간 Safety World에 접속하지 않을 것이다.”
“네?”
“돌아올 시간을 장담할 수 없는 곳에 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번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다녀오려는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이곳 Safety World를 그저 게임을 하기 위한 가상의 공간이라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시후의 말에 다들 놀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도 숨을 쉴 수 있고,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인연을 맺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맺어진 너희와의 인연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 후의 일이 되겠지만 이곳에서의 인연은 현실에서의 인연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 말씀은?”
“조만간 현실에서도 보자는 말이다.”
사비(四飛)는 시후의 말에 놀란 토끼 눈을 뜨며 가슴을 어루만졌다.
이곳에서 시후가 보여준 놀라운 일들은 언제나 자신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일들뿐이었다.
그런 사람을 현실에서도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 상상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시후의 말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거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형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반면, 시후의 말은 들은 다른 이들은 다른 의미로 놀라고 있었다.
시후가 비천대를 현실에서도 만나고 싶다는 말은 무림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할 생각이라는 말이었다.
그저 영화나 책으로만 보았던 무림 세계를 직접 보여주고 그곳에서 살아가게 한다는 말이었으니 나름대로 저들을 인정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이것이 과연 축하해줘야 할지 걱정을 해줘야 할지 알쏭달쏭하여 다들 지켜보고만 있었다.
다만, 타란만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후가 당분간 Safety World에 접속하지 않는다는 말은 또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말이었기에 충격에 빠져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것은 시후가 아닌 조민이었다.
조민은 시후에게 슬쩍 다가가 옆구리를 쿡 찌르며 곁눈질로 타란을 가리켰다.
시후는 조민의 행동에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는 타란에게로 다가갔다.
“타란, 나를 기다리는 시간이 매우 힘든가 보구나?”
“…네.”
기어들어 가는 타란의 목소리에 그 상심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시후는 그런 타란을 향해 위로의 말이 아닌 다른 말을 건네었다.
“이번에는 그런 생각을 할 시간도 없을 거야.”
“제가요?”
“응, 아마 내가 돌아올 때까지 타란, 너는 엄청 바쁠 거거든.”
“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는 시후의 말이었지만 왜인지 저 말을 믿고 싶어지는 타란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도저히 자신은 케냔 협곡의 차가운 암석에 둘러싸여 하염없이 시후를 기다릴 자신이 없었다.
시후는 대충 다들 지금의 상황을 이해한 것 같자, 던전 입구로 향했다.
그러자 시후와 파티를 맺은 모두에게 알림 메시지가 나타났다.
띠링-
[아라크네의 던전을 발견했습니다.]
[던전 입장에 신중을 기해 주십시오.]
[던전 내에서 사망 및 로그아웃 시 페널티가 부가됩니다.]
페널티라는 말에 다들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Safety World에서 페널티가 부여되는 던전은 극악의 난도를 자랑했다.
메시지가 나타나자 조민이 앞장을 서기 시작했다.
조민은 비천대를 선두로 하여 진형을 짰다.
“비천대를 선두로 하여 던전을 들어갈 거예요. 메시지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번 던전은 난도가 헬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이 던전을 최소한의 시간으로 클리어할 테니 모두 각오를 다져주시길 바라요.”
조민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민이 배치한 진형대로 던전의 입구로 들어갔다.
던전 내부는 한 치 앞만 보이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 때문인지 다들 잔걸음으로 전진했다.
주변에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뿐이었다.
그것으로 이곳이 동굴형 던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시후는 가장 후미에서 타란의 다리에 앉아 조민의 지휘를 지켜보며 뒤따랐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일각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들 긴장감이 고조된 상태를 유지하느라 걷기만 해도 체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시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쯧, 아무래도 실전 경험이 부족해서인지 상황 파악이 느리구나.”
시후는 조민의 지휘에 단점을 찾아냈다.
던전에 들어왔음에도 아직까지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은 함정에 빠졌다는 것인데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조민의 실전 경험을 탓하는 거였다.
아무래도 좀 더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열었다.
“모두, 정지.”
시후의 말에 모두 걸음을 멈췄다.
조민 역시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자 시후는 조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적을 얕잡아보는 것보다 어리석은 짓은 없지만, 과신하는 것 또한 불필요한 짓이다.”
“……!”
시후의 말에 조민은 무엇을 지적하는지 단번에 알아채고는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아군의 전력을 믿고 써먹을 수 있는 것은 아끼지 않고 써먹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시후는 말을 마치고 타란을 바라봤다.
“준비되었어요.”
“잘했어. 그럼 탐색 좀 해볼까?”
이곳까지 오면서 시후는 타란에게 따로 지시를 내렸었다.
타란의 탐색 스킬은 땅속에 거미줄을 박아 넣고 사용할 수 있었기에 미리 지시를 내려놓은 거였다.
일각의 시간 동안 타란이 펼쳐 놓은 거미줄은 상당한 양이었기에 타란은 시후의 신호와 함께 즉각 탐색 스킬을 가동했다.
그런데 타란은 탐색 스킬을 가동과 동시에 눈을 번쩍 뜨며 소리를 질렀다.
“포위당했어요!”
그 말에 다들 자신의 무기들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후는 그 상황에 피식 웃었다.
“이것 봐라? 제법 사냥꾼 흉내를 낸단 말이지? 덕칠아, 여기가 매우 어둡구나.”
“네! 라이트!”
번쩍-
시후의 신호로 덕칠은 마법 스킬 중 하나인 라이트를 펼쳤다.
그러자 손에서 커다란 구체가 나타나더니 하늘로 둥둥 떠오르고는 번쩍하며 주위를 밝혔다.
그리고 모두가 보았다.
시후의 말대로 어둠 속에서 사냥꾼 흉내를 내며 숨어 있는 황소 같은 몸집의 거미들을 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