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제갈신길의 안내를 받아 돌팔이가 있다는 약방으로 향했다.
약방이 가까워질수록 진지춘의 기운이 느껴졌다.
확실히 평소답지 않은 기운이었다.
“뭔데 이리 우중충한 기운을 풍기는 거야? 야! 돌팔이!”
벌컥-
약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니 구석에 처박혀 있는 진지춘의 모습이 보였다.
당장 진지춘의 목덜미를 잡아끌고 나오려던 시후는 순간 손길을 멈췄다.
“뭐야? 너… 괜찮냐?”
시후가 진지춘에게 이렇게 안부를 물어온 적이 있나 싶을 정도의 다정한 말투였다.
평소의 진지춘이라면 벌떡 일어나 감격의 눈물을 흘릴 터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진지춘은 약방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그 자리만 먹구름이 드리운 것 같은 현상이었다.
시후의 등장에 진지춘은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고개를 돌렸다.
시후는 진지춘의 얼굴을 보고는 세상 당황스러웠다.
나이 오십을 넘어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가 눈이 팅팅 부어서는 눈물과 콧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울고 있는 모습이라니.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모습에 시후는 움찔했다.
“너, 우냐?”
“흑, 흑흑, 도련님!”
시후의 말에 진지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누가 보아도 시후의 품에 안기려는 모양새였다.
이대로 두면 자신의 품에 진지춘이 안길 것 같은 생각에 시후는 손을 썼다.
저렇게 울면서 달려오는 진지춘에게 무언가를 하기는 양심에 가책이 느껴져 다른 수단으로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제갈신길에게 손을 뻗었다.
빠르게 내공을 일으켜 제갈신길의 몸을 속박하고는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형환위의 수법으로 제갈신길의 자리로 옮겨갔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둘의 위치가 바뀌는 사이 제갈신길은 등골이 오싹했다.
‘도대체, 도련님의 내공이 어느 정도이시기에.’
제갈신길은 이번에 얻은 성취로 아주 조금은 시후의 발끝은 따라갔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만큼 현원진신공의 오의는 엄청났기에 내심 자신감에 찼었다.
그런데 몸을 속박해오는 시후의 수법은 전혀 거부할 수가 없었다.
내공을 일으키기도 전에 구속당했고 어느새 자리가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이해하고 시후에게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진지춘이 품에 안기고 있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반면, 진지춘은 자신이 안긴 품이 시후의 품이라 생각한 것인지 가슴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엉, 엉엉! 도련님! 어쩌면 좋습니까? 허어어엉!!!”
아주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제갈신길은 고개를 쭉 빼 시후를 돌아봤다.
어서 자신을 구해달라는 아주 간절한 눈빛으로 말이다.
하지만 시후는 둘의 그런 모습에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중년 남성들이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라니.
꿈에서라도 보기 싫은 장면이었다.
그래서 시후가 택한 것은 제갈신길에게 떠넘기는 거였다.
“제갈 가주, 그대가 수고 좀 해주게나. 잘 달래주고 나와.”
“도, 도련님?!”
덜컥-
시후는 제갈신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손을 휘저어 약방의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약방에 내공으로 막을 쳐버렸다.
보통은 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을 막는 역할이었지만 지금은 제갈신길이 도망쳐 나오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이었다.
“으으으!!”
시후는 밖으로 나와 몸을 부르르 떨며 마당에 자리했다.
제갈신길은 똑똑한 녀석이니 자신의 의중을 헤아려 최선을 다해 진지춘을 달래고 나올 거였다.
그렇지 않으면 제갈세가가 화를 당할 거라는 계산을 할 테니까 말이다.
역시나, 일각의 시간이 흐르자 제갈신길과 진지춘의 기가 갈무리되는 것이 느껴졌다.
제갈신길이 잘 달랜 것 같았다.
시후는 약방을 감싸고 있던 내공을 거두고는 손을 휘저어 약방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제갈신길과 진지춘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제갈신길은 진이 빠진 모양새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진지춘을 상대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할 수가 있었다.
진지춘은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시후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왔다.
그 모습에 시후는 그가 다시 달려들거나 하는 상황은 없을 거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왜 울고 있던 건데?”
“…….”
시후의 말에 진지춘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옆에 있던 제갈신길이 입을 열어왔다.
“약선방에 문제가 생겼다고 합니다.”
“돌팔이 문파?”
“네, 아무래도 약선방 방주의 상태가 좋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디가 아픈 거라면 녀석들 실력으로 치료가 가능할 텐데?”
진지춘의 실력으로 미루어 솔직히 약선방의 의술이 형편없지는 않았다.
장기를 꺼내어 직접 손을 대는 현대 의학의 영역이 아니라면 자가 치료가 가능할 정도의 실력 있는 녀석들이라는 게 시후의 평가였다.
약선방을 높게 평가하자 진지춘의 마음이 조금 풀렸는지 직접 입을 열었다.
“방주님께서 알 수 없는 독에 당하셨다고 합니다.”
“독? 마청우의 후인들이 독에 당해 쓰러져 있다고?”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마청우의 실력은 그때에도 당대에 따라올 자가 없었다.
독(毒)으로 시작해서 약(藥)으로 정점을 찍은 녀석이었기에, 그런 녀석의 지식을 가진 약선방이라면 웬만한 독에는 당할 리가 없었다.
시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진지춘은 단번에 알아듣고는 요점을 말했다.
“혈독(血毒)에 당하셨다고 합니다.”
“허? 그 자식들이 거기에까지 손을 뻗었단 말이지?”
시후는 혈독이라는 말에 바로 혈교를 떠올렸다.
혈독은 혈교가 주로 사용하는 독이자 중원에는 없는 독이었고, 그 독은 피를 이용한 독이었기에 마땅한 해독제가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에 대한 해독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혈독에 당한 사람이나 혈독이 있어야 하는데 이 또한 구할 수가 없었다.
혈독의 특별한 특성 중의 하나가 잠복기가 있는 독이라는 거였다.
내공을 흩어버리는 산공독이나 몸에 있는 일곱 개의 구멍에서 피를 뿜으며 죽어버리는 칠공독과는 전혀 달랐다.
평소와 똑같이 생활하거나 내공을 운용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가 어떤 신호로 인해 독이 발병했다.
그리고 발독이 되면 몇 시진 안에 몸이 녹아 사라져 버렸다.
그 때문에 천마 시절, 천마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많은 이들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적도 있었다.
“방주라는 녀석은 살아는 있는 거야?”
“네, 다행히 방주님께서 갖고 계시던 약들을 배합하여 겨우 숨은 붙어 있으신 모양이십니다. 하지만….”
말끝을 흐리는 진지춘의 모습에 시후는 제갈신길을 바라봤다.
뒷이야기는 네가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가사 상태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그럼, 죽은 것은 아니네?”
“네. 하지만, 해독 방법을 모르기에 다들 포기를 하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쯧, 그 독은 발독 신호를 내린 녀석부터 잡아야 하는데.”
“네?! 도련님, 혈독에 대해서 아시는 겁니까?”
시후의 말에 진지춘은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는 따지듯 물어왔다.
평소라면 지풍을 날려 마비혈을 눌렀겠지만, 지금은 내버려 두었다.
어째 진지춘의 표정을 보니 혈독의 발독 방법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그에 시후는 간단하게 혈독에 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제갈신길과 진지춘은 시후의 말을 들으며 입을 쩌억 벌린 채 놀라고 있었다.
도대체 시후가 가진 무공과 지식의 끝은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과 더불어, 혈독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한 가지 추리를 할 수가 있어서였다.
“그럼, 약선방 내부에 혈교의 빌어먹을 자식이 있다는 거군요?”
“그렇지, 혈독을 발독시키는 것은 그리 먼 거리에서는 불가능하거든.”
“그럼, 도련님! 어떻게 합니까? 약선방의 의원들을 한 명씩 잡아다가 심문이라도 해야 하는 겁니까?”
“아니, 조만간 중국에 갈 준비 좀 해라.”
“네?”
“내가 가서 도와줄게. 혈교 녀석들이 내뿜는 특유의 기운을 읽기만 하면 되니까 내가 같이 가줄게.”
“저, 정말이십니까?”
진지춘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의 빛을 만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런 표정의 진지춘을 보며 시후는 뜬금없는 말을 꺼내었다.
“대신 이번 퀘스트부터 마무리하고.”
“……! 네?!”
왜 지금 이 시점에서 퀘스트라는 말이 나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퀘스트라면 Safety World에서 헤라 여왕에게 받은 히든 퀘스트를 말하는 것일 텐데 말이다.
지금 방주가 죽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인데 게임을 하자고 하니 진지춘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살짝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시후는 아주 냉철하게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약선방에 혈교의 손이 미쳤다면 분명 혈교 녀석들과의 접전은 불가피할 거였다.
그렇다면 이번에 소교주라는 녀석이 한국에 데리고 온 녀석들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일 것이고, 자신이야 괜찮지만 다른 녀석들은 큰 화를 입을 수도 있었다.
“타초경사(打草驚蛇)라는 말 알지?”
“네, 그런데 그게 지금과 무슨 상관입니까?”
“풀을 건드려 뱀이 뛰쳐나오면 때려잡아야 할 거 아냐?”
“아니, 그게 퀘스트와 무슨 상관이냐고요.”
도무지 시후의 말을 이해 못 하는 진지춘이었다.
반면 제갈신길은 시후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그 말씀은 더 많은 혈교인들이 있을 수 있기에 단번에 잡을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그 준비가 시후 본인의 내공을 더욱 증진하여 화를 입을 수도 있는 다른 녀석들까지 챙길 만한 힘을 가지려는 것임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대신 녀석들을 상대하는 데 진심을 다하여야 하기에 이번 퀘스트처럼 신경 쓰이는 것들은 해결해두고 떠나자는 말을 해주었다.
그 말에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어서 접속하시지요! 하루라도 빨리 퀘스트를 깨야죠!”
아주 단호한 표정과 굳은 의지를 보이는 진지춘의 말에 시후는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진지춘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하나가 있어 뒤집어 주었다.
“하루라도 빨리 퀘스트를 깨는 게 아니야.”
“네?”
“내일 해가 뜨기 전에 퀘스트를 끝낼 거라는 말이지.”
“……! 네?”
“그러니 다른 녀석들에게 연락해서 당장 접속하라고 하고. 제갈 가주.”
“중국으로 떠나실 준비는 제가 해 놓겠습니다.”
역시나 똑똑한 제갈신길이었기에 이야기의 흐름상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
시후는 그런 제갈신길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진지춘을 바라봤다.
진지춘은 시후의 말에 상당히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그런 표정이었다.
아마도 하루라도 빨리 약선방에 갈 수 있다는 기쁨과 오늘 밤에는 다시 없을 정도로 혹사를 당할 거란 슬픔에 그런 것이 분명했다.
어찌나 저리도 표정을 감출 줄 모르는지.
시후는 피식 웃고는 진지춘의 목덜미를 잡아갔다.
“그러면 제갈 가주, 준비 좀 부탁하지. 가자.”
훅-
그 말을 끝으로 시후는 진지춘과 함께 그림자 속으로 훅하고 꺼졌다.
천잠음영술을 펼쳐 진지춘을 끌고 이동하는 거였다.
경공을 펼쳐 날아가기에는 진지춘이 따라오지 못할 것 같아 1분 1초를 아끼려는 방법이었다.
덕분에 아주 빠르게 시후의 아파트에 도착한 둘이었다.
시후는 속이 울렁거려 토하려는 진지춘을 그의 방에 던져 주고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때맞추어 단톡방에 원성이 자자한 톡이 올라왔지만 시후는 대수롭지 않게 스마트폰을 캡슐 옆에 던져 놓고는 Safety World에 접속했다.
언제나처럼 환한 빛에 눈부심을 느낀 후에 시력이 돌아오자, 시후의 앞에는 자신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시후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원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활짝 웃어줬다.
“그만 투덜대라. 설명은 대략 들었겠지만, 돌팔이를 도와줘야 하기에 오늘 좀 무리를 해야 할 것 같으니까.”
다들 제갈신길에게 어느 정도 사정을 들어서인지 진지춘을 거론하자 표정이 풀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진지춘은 일일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시후는 그런 이들의 모습을 보다가 문득 누군가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제갈조민을 바라보았다.
“뭐야? 아킬라이는?”
“연락을 해봤는데 당분간 게임에 접속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왜?”
“집에 누군가가 돌아가셨다고….”
“아, 그럼 어쩔 수 없지. 대신 조민 네가 이번에 얻게 되는 보상들을 일정량 챙겨놨다가 주어라.”
“네.”
아킬라이의 상(喪) 소식에 시후는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돌아오면 위로 차원에서 좋은 아이템을 주어야겠다 싶었다.
“자, 그럼 이번 히든 퀘스트를 마무리 지어보러 가볼까?”
“네!!”
시후의 말에 다들 눈빛을 빛내며 의지를 다지는 것을 본 시후는 다인 이동 스크롤을 찢었다.
“모두 타란이 있는 곳으로 이동.”
스크롤이 찢어지며 뿜어져 나온 빛에 모두가 휩싸이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