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정령의 가호.
시후가 정령의 가호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월영검을 받기 위해 투산에게 들렀을 때 처음 알게 되었다.
월영검에 정령의 축복이 필요했는데 그것을 타란이 불어넣어 주는 과정에서 투산이 뜻하지 않은 득을 봤다는 거였다.
‘그때 헤벌쭉거리는 영감의 표정이 어찌나 꼴 보기 싫던지.’
시후는 그때 투산의 기뻐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지젤을 바라봤다.
지젤은 멍한 표정으로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를 읽고 있었다.
[정령의 가호를 받은 자.]
[자연의 축복을 받는 정령으로부터 축복을 받았습니다.]
[직업 특성에 맞게 정령의 축복이 신성력에 반영됩니다.]
[신성력 +10%]
[가호를 내려준 정령과 함께 활동 시 +10%]
시후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지젤에게 말했다.
“어때? 쓸 만하지?”
“…….”
시후의 말에 지젤은 대답할 수 없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신성력 +10%’는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헤라 신전에서는 NPC건 유저이건 신성력의 크기로 사제의 지위가 결정된다.
신성력을 키우는 일은 당연히 퀘스트를 통해서만 가능했고, NPC는 유저와 함께 활동해야만 퀘스트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NPC 사제가 승급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번에 시후를 따라 이곳에서 죽을 만큼 고생해서 받은 보상도 고작 3%였다.
그런데 저 거미 여왕의 이마 키스에 신성력이 무려 +10%나 올랐다.
거기에 앞으로 저 거미 여왕과 함께라면 추가로 +10%를 더 얻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고위성직자(Monsignor)의 자리에 오를 만한 신성력이야.’
그 어렵다는 진급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헤헤거리면서 좋아할 수는 없었다.
자신에게 정령의 가호를 내려준 것이 파렴치한 짓을 일삼는 저 거미 여왕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시후는 깊은 고민에 빠진 지젤을 보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사제라 그래선지 표정에 거짓이 없었다.
딱히 독안공을 사용하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에 역력히 드러났다.
정령의 가호를 받은 기쁨과 그 정령이 타란이라는 것에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모습이었다.
이만하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는 생각에 시후는 지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주 큰 선물을 받았어, 그치?”
“…….”
“신전 퀘스트와는 비교도 안 되는 보상을 받았는데 앞으로는 어쩔 거나?”
“…악!”
지젤은 시후의 말에 묵비권을 행사하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와 함께 엄습하는 싸늘함에 고개를 홱 들어 시후를 바라보았다.
“히익!”
시후의 싸늘한 시선을 발견한 지젤은 비명과 함께 뒷걸음을 치려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느낌은 좀 전에 이마에 키스당할 때 몸을 속박당한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공포.
자신의 생명쯤은 언제든 거둘 수 있는 포식자에게 사로잡힌 피식자의 본능이었다.
그만큼 시후의 눈빛은 살벌했다.
“너, 한 번만 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죽일 거다.”
“네, 네!”
지젤은 지금과 같은 공포를 경험했던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했다.
시후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고 자신의 목숨 따위는 시후에게 그렇게 가치 있지 않았다.
“좋아, 그럼 처음으로 돌아가서. 선물을 받았으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후, 후 님의 말씀에 절대복종하며 따, 따라야 합니다.”
“좋아. 만약 내가 없을 때는?”
“후, 후 님이 없으셔도 지시한 일을 시행해야 합니다.”
“아주 좋아! 잘 이해했네?!”
지젤은 이제 완전히 시후의 종이 되었다.
NPC, 그것도 사제 NPC가 공포에 지배당한 모습을 지켜본 D.M 일행은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들이 걸어갈 길이 어떤 것인지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좋아, 그럼 대충 마무리된 것 같으니 나는 로그아웃한다.”
“이렇게 갑자기요?”
“어, 중요한 약속이 있거든.”
중요한 약속이라는 말에 아무도 시후를 잡지 않았다.
하다못해 타란까지 말이다.
타란은 잔뜩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시무룩한 모습으로 몸을 움츠렸다.
시후는 일행들을 둘러보다가 그런 모습의 타란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 가장 고생한 것은 타란이었다.
타란이 거미줄 속박을 사용하여 수백 마리의 좀비들을 묶어 놓지 않았다면 이리 쉽게 신전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없었을 거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상해 주어야 했는데 사제에게 이마 키스를 하게 했으니.
앞으로 지시할 일까지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래서 타란에게도 약간의 보상을 해주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들은 내일 저녁에 접속하고 그때까지 타란과 지젤은 활성화된 신전들 잘 지키고 있어.”
“……!”
“네!!”
시후의 지시에 타란을 뺀 나머지들은 즉각 대답했다.
역시나 타란에게 이곳에서 지젤과 함께 지낼 원동력을 불어 넣어줄 필요가 있었다.
탓-
“어머? 주, 주인님?!”
타란은 갑자기 날아올라 자신의 앞다리에 내려앉은 시후를 보며 깜짝 놀랐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시후의 얼굴에 타란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시후의 얼굴이 한 뼘 남짓한 거리까지 다가오자 타란은 본능적으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수많은 유저들을 매혹하던 타란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타란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자신에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고 얼마나 기다리고 고대하던 일인지 말이다.
그리고 그 일이 벌어지는 것의 BGM은 나머지 일행들의 감탄사였다.
“어? 어? 어어어??!!!!”
D.M 일행들은 타란에게 가까워지는 시후를 보며 육성으로 놀랐다.
시후는 떨리는 타란의 어깨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품에 안긴 타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타란은 이 순간 시후의 가슴이 그 어떤 대륙보다 넓게 느껴졌다.
그리고 시후의 가슴에 닿아 귀에서 들리는 심장 고동 소리는 황홀한 선율로 들렸다.
시후는 타란의 어깨에서 느껴지던 떨림이 멈추자 천천히 품에서 놓아주었다.
“타란, 잘 지내고 있어, 금방 돌아올 테니까.”
“네…!”
타란은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제 타란은 시후가 돌아올 때까지 별다른 말썽을 부리지 않을 터였다.
아마도 당분간은 지금의 감정에 빠져 행복의 늪에 빠져 있을 터였다.
“그럼, 잘 쉬고 이따가 보자.”
시후는 그렇게 패닉에 빠진 일행들을 남기고 로그아웃을 했다.
그 후 D.M 일행이 로그아웃할 때까지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 * *
잘그락-잘그락-
크리스탈 술잔을 흔들거리며 안에 담긴 얼음의 마찰음을 즐기는 이가 있었다.
칵테일 바 테이블에 앉은 그는 잔에 담긴 술 내음을 맡으며 흡족해했다.
“크~ 역시 한국이 좋아. 바텐더들의 스킬이 중화에 비해 꽤 높은 수준이란 말이야?”
“췐. 이런 속국과 대국을 비교하다니, 취한 것이냐?”
“야, 펭! 여기까지 와서 그런 인민공화국적인 대사를 읊어야겠냐?”
“췐, 죽고 싶은 것이냐?”
“…….”
췐이라 불린 삐쩍 마른 남자는 외모에 어울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거대한 덩치의 펭을 노려봤다.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점점 살기를 피워냈다.
“그어어, 커, 커헉!”
둘의 신경전에 애꿎은 바텐더만이 숨이 막혀 고통스러워했다.
그때 당장이라도 서로의 목을 물어뜯을 것 같은 둘 사이로 무언가 번쩍였다.
푹-
“컥!”
번쩍인 것은 아주 작은 단도였다.
단도는 숨이 막혀 고통스러워하던 바텐더의 이마에 정확히 꽂혔다.
털썩-
눈을 뒤집어 까며 바텐더가 쓰러지자 신경전을 벌이던 췐과 펭은 단도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린, 장난이 심하다?”
“장난은 너희들이 심하지. 술 한 잔 마시겠다고 바(Bar) 하나를 이따위로 만들어?”
린이라 불린 여자는 손에 들고 있는 단도로 주위를 가리켰다.
단도의 끝에는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져 있는 시체들이 즐비했다.
아마도 이곳에서 이들보다 먼저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이들이었을 터였다.
린은 단도를 품속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혈향은 이 정도 맡았으면 됐잖아? 그만 가자고.”
“그 말도 일리가 있군.”
“하긴, 더 늦으면 소교주님께 혼날 수도 있으니까? 키킥.”
린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펭은 앞장서서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남은 술잔을 목구멍에 털어 넣던 췐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마무리는 확실하게 하고 나와라.”
“명령하지 마라. 나에게 명령할 수 있는 이는 우리 소교주님뿐이니까.”
“그 소교주님에게 목이 뜯겨 나가고 싶지 않으려면 잘하라는 충고다.”
“키킥, 알았으니 먼저들 나가. 정리하고 나갈 테니까.”
그렇게 췐을 남기고 둘은 나갔다.
췐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한 번 스윽 훑어보고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샤아아아-
그러자 췐의 손에서 붉은색 기운이 넘실거리며 뻗어져 나갔다.
그 기운은 널브러져 있는 시체에 닿더니 곧 전신을 뒤덮었다.
꽈득-꽈드득-푸어억-
뼈가 으스러지고 살점이 터지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졌다.
췐은 그 소리를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는 것처럼 두 눈을 감고 즐겼다.
어느덧 바 전체를 울리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리고 소리와 함께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시체들 또한 사라졌다.
실오라기, 머리카락 한 올도 없이 전부.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는 췐 혼자만이 존재했던 것처럼 말이다.
췐은 자신이 만들어낸 장면을 스윽 훑어보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품속에서 폰을 꺼내어 들었다.
그리고 익숙하게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2시간 후, 뚝섬.”
- 알겠습니다.
“알고 있겠지만, 저희 주군께서는 시간 엄수를 무척이나 중요시하십니다.”
- 늦을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남궁세가 둘째 자제분의 실력을 믿어 보겠습니다, 그럼.”
띠릭-
췐은 그렇게 통화를 종료했다.
통화를 한 상대는 남궁진성이었다.
췐은 통화가 종료되었음에도 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흥, 우리 소교주님께서 직접 행차하셨는데 가주라는 작자가 폐관 수련에 들어가? 이번 만남은 제법 짜릿할 것이야, 남궁세가.”
콰득-빠득-
췐의 손에 들려 있던 폰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시체들과 마찬가지로 형체도 없이 바스러지며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바에는 췐의 모습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시후는 남궁진성으로부터 전화를 받고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중국에서 온 녀석들이 갑자기 일정을 앞당겼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이 자식들이 아주 첫 만남부터 사람 속을 박박 긁네?”
본래의 약속 시각은 늦은 저녁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차 한 잔을 마시는 휴식 타임을 갖고 녀석들을 맞이할 생각이었다.
녀석들을 위해서 말이다.
혈교라는 이름 아래 있는 녀석들을 만나면서 마음의 여유를 갖지 않고 만났다가는 무슨 짓을 저질러 버릴지 알 수 없었다.
‘이번에 오는 녀석들은 아무래도 선발대일 테니까.’
여기서 녀석들에게 위협을 가했다가는 도마뱀처럼 꼬리를 자를 수도 있었다.
과거에 있었던 악연과 함께 알아낼 게 많았기에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약속 시각을 변경해? 제 무덤을 파는 삽질을 잘도 하는구나!”
콰아아-
뚝섬을 향해 날아가는 시후의 발걸음에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