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진소령은 천마가 건넨 국수 그릇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었다.
뜨거울 수 있으니 옷자락을 손에 걸쳐서 말이다.
이 장면을 다른 이들이 보았다면 대경실색을 했을 거였다.
진소령이 입고 있는 옷은 최상급 비단으로 알아주는 장인이 만든 것이었다.
손에 받아 든 국수 따위 몇백, 몇천 그릇은 살 수 있는 가치가 있었다.
천마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먹을 수 있겠느냐?”
“말 시키지 마십시오. 말하는 시간까지 아껴야 할 만큼 배가 고픕니다. 후, 후우!”
천마는 자신의 말에 되레 핀잔을 주는 진소령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천마가 그러거나 말거나 진소령은 국수를 후후 불어 입에 넣었다.
본인의 말대로 말하는 시간까지 아껴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고급스러운 비단 옷차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게걸스럽게 먹었다.
“허, 거참, 별난 녀석이구나.”
천마는 공주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진소령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쁜 처자가 복스럽게도 먹네그려.”
“너무 맛있어서요.”
“옷차림을 보니 귀하신 분 같은데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려.”
“잘 먹었습니다.”
천마가 국수를 먹는 동안 국숫집 노파와 진소령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모습 또한 천마에게는 흥미로웠다.
장님인 노파가 진소령이 입은 옷의 가치를 알 리 없을 터인데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을 하고 있었고, 진소령은 그런 노파의 말에 전혀 반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노파와 같은 이들은 진소령과 같은 이들을 본능적으로 피하는 습성이 있었다.
혹여나 입을 잘못 놀리게 되면 모진 꼴을 보게 되는 일이 허다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진소령에게만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되레 친한 이웃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 같았다.
국숫집을 나와 저잣거리를 거니는 동안 진소령을 대하는 이들의 모습은 노파와 다르지 않았다.
노리개 상인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껄껄 웃으며 노리개 가격을 선뜻 깎아 주기까지 했고, 분가루를 파는 상인은 자신의 가게에서 가장 최상품의 분가루를 사용해 보라며 건네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선의를 받은 진소령은 환한 웃음과 허리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도저히 공주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행실들이었다.
그렇게 저잣거리를 지나 달빛이 호수에 뿌려져 아름다운 절경을 보여준다는 경월호(暻月湖)에 다다랐을 때 천마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이 평소에 네 모습이더냐?”
“무슨 말씀이신지요?”
“사람들을 대할 때 보인 모습 말이다,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스스럼없는 모습. 그게 네 본 모습이냐고 묻는 것이다.”
“제 신분이 공주이기는 하나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고 배웠습니다.”
“오호~! 그래?”
“사람으로 태어나 어찌 사람을 아래로 보겠습니까. 다만 개개인의 능력과 주변 상황에 어쩔 수 없는 차별이 존재할 뿐이지요.”
“황족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구나?”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제 신분이 부끄럽다? 괴변이구나.”
“…….”
진소령은 천마의 말에 입을 다물고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잠시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고, 진소령은 단호한 표정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제가 마음에 드시지 않나 봅니다?”
“……!”
이번에는 천마가 말을 잇지 못했다.
진소령의 질문에 자신을 돌아본 거였다.
사람을 대할 때 그 누구보다 스스럼없이 평등하게 대하는 천마였다.
삼 일에 한 끼를 먹는 거지부터 살이 통통하게 오른 재상까지.
누구든 평등하게 대해주었고 그럴만한 실력이 있는 게 천마였다.
그런데 어째서 진소령에게 까칠한 모습을 보이는지 이제야 깨달은 천마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다른 사실 하나를 더 깨달았다.
두근-두근-
천마는 평소보다 크게 요동치는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요동친다는 게 이런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동안 만난 여인만 해도 수백에 달하는 천마였지만 그 누구도 마음에 품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진소령을 마음에 먼저 품어버린 자신을 발견한 천마였다.
“불혹을 넘기며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 여겼었건만….”
말끝을 흐리며 진소령을 다시금 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뇌리에 각인시켰다.
진소령이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천마는 손을 들어 올려 진소령에게 내밀었다.
진소령은 천마가 들어 올린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게 무슨 의미냐는 뜻이었다.
“네가 마음에 드는구나. 내 여인이 되겠느냐?”
앞도 뒤도 없는 고백이었다.
자신은 천마였기에 고백함에서도 당당했다.
그런 당당한 고백을 받은 진소령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약주를 하셨습니까?”
* * *
시후는 진소령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지금의 말로 한다면 직진 고백을 날렸다가 대차게 차인 흑역사였다.
반면 시후가 그렇게 잠시 추억에 물들어 있는 동안 당소영은 입이 삐쭉 나왔다.
“말해줄 것처럼 폼 잡으시더니 왜 말이 없으십니까?”
자신의 질문에 대답해줄 것만 같던 시후가 돌연 입을 꾸욱 다물고 있다 피식 웃으니 하는 말이었다.
한껏 토라져 있는 당소영의 모습을 오늘따라 좀 더 보고 싶은 시후였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그 질문에 대답하면 이번에는 진짜 들려주시는 거죠?”
“그래, 너희는 나를 무어라 생각하는 것이냐?”
“…네?”
뜬금없는 질문에 당소영은 대답할 말을 잃었다.
“너는 이미 내가 고등학생이라는 것을 알 터인데, 그녀에 관해서 묻는 것이 의문스러워서 그런다.”
“아! 그 말씀이시군요? 저희는 반로환동하신 고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소영의 말대로 시후의 정체를 아는 이들에게는 시후가 반로환동(返老還童)한 무림 고수로 알려져 있었다.
평범한 삶을 살기를 원하기에 일반인의 자식으로 연기를 하고 세간의 관심을 끄는 것을 꺼린다고 말이다.
당소영의 이야기를 들은 시후는 그동안 품었던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어쩐지 언제부터인가 제갈세가와 당가에서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달라진 것을 느꼈었다.
그때도 이런 의문이 들었지만, 내공 회복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기에 대충 흘렸었다.
시후는 자신에 대해 오해하는 녀석들을 생각하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누군가에게 오해받고 있다는 생각이 찝찝했다.
그렇다고 오해를 풀어주자니 그것도 복잡했다.
유약하기만 했던 고등학생 강시후의 몸에 천마의 영혼이 들어갔다.
그 사실을 어찌 설명해야 할지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이쯤 생각하니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시후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당소영의 시선을 느꼈다.
무언가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간절한 표정이었다.
“뭐, 좋을 대로 생각해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은근슬쩍 넘어가는 시후였다.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앞서 걸어가는 시후의 뒤를 졸졸 쫓는 당소영이었다.
멈칫-
시후가 걸음을 멈추자 당소영도 걸음을 멈추었다.
이 이상 당소영을 질질 끌고 다녔다가는 귀찮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가서 네 아비나 보살피거라. 추후에 연락하마.”
단호하게 따라오지 말라고 말하는 시후였다.
그 말에 당소영은 잔뜩 풀이 죽은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조심히 가십시오.”
“쉬거라.”
시후는 그런 당소영을 무형의 기운으로 슬쩍 일으키고는 몸을 날렸다.
이미 시후가 사라진 자리에는 아련한 당소영의 시선만이 남아 있었다.
그 길로 곧장 집으로 돌아온 시후는 ‘무협지 방’에 들어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사라지지 않던 의문을 풀기 위함이었다.
일전에 보았던 ‘천마’를 주제로 모아 놓은 책장을 향했다.
“확실히 이상했어, 너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단 말이야.”
무협지에 나와 있는 무공들의 묘사가 너무 비슷했다.
처음에야 상상력이 풍부한 녀석들이 썼구나, 라고 생각했었지만, 오늘 당소영의 말을 들으니 생각이 달라졌다.
“녀석들은 나를 반로환동한 고인(古人)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예가 있었다는 소리렷다.”
시후의 생각은 이랬다.
반로환동을 이곳 무림인이 알고 있다는 것은 그런 녀석이 실제로 존재하거나 존재했었다는 거였다.
만약, 태산과 인호가 반로환동을 거론했다면 웃어넘겼겠지만, 무려 제갈세가와 당가였다.
무림 오대세가 녀석들.
그들은 언제나 가문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녀석들이었다.
녀석들은 자신의 비밀을 다른 이들이 아는 것을 꺼렸다.
비밀은 자칫 약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녀석들이 반로환동과 같은 정보를 공유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녀석들이 손을 쓸 수 없는 곳에서 나온 정보라는 소리였다.
“세가 녀석들이 손을 쓸 수 없는 곳이라면 역시, 소림이지.”
시후의 손에는 <소림사가는 천마님>라는 무협지가 들려 있었다.
책을 펼쳐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5분 정도가 지나자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확실하군. 어떤 녀석인지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무림에 대해서 아는 것이 틀림없어. 그리고 그 무림은 내가 아는 무림과 같고.”
이 책에서 시후가 찾은 것은 장소였다.
무공이야 상상력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장소만큼은 달랐다.
그런데 이 책에는 그 장소가 정확히 적혀 있었다.
“숭산에 자리한 소림, 호북성 균현에 자리한 무당파, 사천성 서부 아미파. 그 외에도 점창파, 곤륜파, 화산파 녀석들까지 모두 내가 아는 장소와 일치하는군.”
장소가 일치하는 것에 시후는 생각하기도 싫은 가설 하나가 떠올랐다.
아니, 그동안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하던 가설이었다.
그리고 이 가설을 증명할 수단은 이미 알고 있었다.
바로 밑의 층에 주절주절 떠들기 좋아하는 녀석이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후는 스마트폰을 들어 진지춘에게 전화를 걸었다.
첫 신호음이 끝나기도 전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 아이고~ 도련님! 어인 일이십니까요?
“잠깐 집으로 좀 올라와라.”
- 아이고~ 도련님께서 부르시니 당장 달려가지요! 그러잖아도 저도 도련님께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요.
한국대학교로 똥개 훈련을 시켰던 것에 아직도 삐져 있는 진지춘이었다.
평소였다면 한 소리 했겠지만, 지금은 다른 일이 먼저였으니 참았다.
진지춘은 한걸음에 올라왔다.
아직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퇴근 전이라 집에는 시후와 진지춘 둘뿐이었다.
“돌팔이, 너 약선방에서 한가락 하는 의원이라 했었지?”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제가 도련님 앞에서야 고양이 앞의 생쥐지만 약선방에서는 알아주는….”
“됐고, 지금 약선방 방주는 몇 대째냐?”
사설이 길어지는 진지춘의 말을 자르고 본론을 꺼내는 시후였다.
그런 시후의 말에 빈정이 상할 만도 하건만 진지춘은 익숙해진 것인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되레 시후의 말을 반기기까지 했다.
“이런 우연이 있나요? 그러잖아도 제가 도련님께 말씀드리려 했던 게 그 부분이었습니다.”
“무슨 소리야?”
“이번에 저희 약선방의 20대 방주님의 생신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에 약선방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20대? 으흠….”
시후는 진지춘의 말에 침음성을 내었다.
한 놈이 방주 직을 50년씩 해 먹었다고 하면 약선방의 시작은 1천 년 전이라는 말이었다.
아주 재수 없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물을 것은 물어야 할 것 같았다.
“너희 약선방의 시조에 대해서 아냐?”
“저희 시조님이요? 알다마다요. 얼마나 유명하신 분이신데요. 무공이면 무공, 의술이면 의술….”
“됐고, 이름이 뭐냐?”
“약선방 시조님의 존함은 마청우입니다.”
“젠장!!”
약선방 시조의 이름을 들은 시후가 돌연 욕설을 내뱉었다.
시후는 저도 모르게 기파(氣波)를 뿜어냈다.
그 기파에 진지춘은 속이 울렁거렸다.
어째서 약선방 시조의 이름을 들은 시후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했지만,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만큼 지금 시후의 표정은 악귀와도 같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