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시후는 이왕 밖에 나온 김에 한 곳에 더 들르기로 했다.
그런데 목적지에 당도하니 어째서인지 망설여졌다.
“…돌아갈까?”
시후가 이렇게 망설이며 걸음을 멈춘 장소는 한국대학교 정문 앞이었다.
덕칠이와 헤어진 후 이곳을 생각할 때만 해도 며칠 후에 혈교를 만날 때 필요한 물품을 공수받으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막상 한국대 캠퍼스가 눈에 들어오자 머릿속에 한 얼굴이 떠올라 떠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 얼굴이 지금 시후의 발걸음을 멈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소령.”
당소영을 닮은 여자.
아니, 당소영이 닮은 여자였다.
천마 시절 유일하게 사랑의 정을 나눈 여인이었다.
짓이긴 파리 숫자보다 죽인 사람의 숫자가 더 많았기에, 언제나 혈향(血香)과 친숙했던 천마 앞에서도 언제나 당당했던 여인.
다리 밑 거지와 초목에서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여인.
하지만, 천마와는 그 본질인 신분의 격차를 넘지 못하고 결국 천마의 앞에서 피를 토하며 죽었던 여인이었다.
그때를 회상하니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대를 잊지는 못하나 보오. 아니면… 그대를 잊으라고 저 녀석을 내게 보낸 것이오?”
시후는 캠퍼스를 거닐다 자신을 발견하고 총총걸음으로 걸어오는 당소영을 보았다.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온 것을 반기는 것인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스윽-
그에 시후는 저도 모르게 손을 슬쩍 들어 흔들어 주었다.
“하?”
시후는 그제야 자신의 행동을 자각하고는 후다닥 손을 내렸다.
그녀를 닮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니 짜증이 밀려왔다.
“쯧, 짜증 나네.”
“네?! 무, 무슨! 사람을 보자마자 짜증 난다고 하세요?”
“네 얼굴이 짜증 나게 생겨서 그런다.”
“네?! 와!! 저 태어나서 그런 말 처음 들어봐요!”
사실이었다.
당소영은 태어나서 모든 사람에게 예쁘다는 말만 듣고 살아왔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초승달 같은 눈썹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아련한 마음을 갖게 했으며, 사슴 같은 눈망울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넘쳐 흘렸다.
덕분에 두 언니에게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어 남모르게 핍박을 당해 가주 쟁탈전에서도 물러났었다.
지금에야 시후로 인해 차기 가주로 잠정 인정된 상태이지만 말이다.
거기에 당소영은 시후가 던져준 일 하나를 더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련님께서 맡겨주신 그 도박장 일 때문에 제가 얼마나 골머리를 썩고 있는지 아세요?”
“충분히 할 수 있으면서 엄살은…! 그런데, ‘도련님’?”
시후가 맡긴 일은 남궁세가에서 관리하던 도박장 운영이었다.
도박장을 찾았을 때 일로 이미 당소영의 얼굴은 팔린 상태였다.
거기에 당소영의 이름을 걸고 사채까지 썼던 상황이니 그것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그녀에게 도박장 관리를 맡겼다.
분명 그날 당소영이 도박장에서 주절주절 떠들던 것을 보면 지식은 충분했으니 말이다.
괜한 투정이라 생각하던 때에 시후는 당소영이 자신을 ‘도련님’이라고 부른 것을 깨달았다.
“왜요? 마음에 안 드세요? 매번 ‘시후 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기에 ‘도련님’이라고 부른 건데요? 그리고 그분께서 그렇게 부르는 거 좋아하신다고 하셨었는데요?”
“…그분이라니?”
“진지춘 의원님께서 그러….”
“그만! 여기서 왜 돌팔이 이름이 나와?!”
당소영에게 진지춘을 소개해 준 기억이 없었는데 어떻게 그 이름이 당소영의 입에서 나오는지 의문이었다.
“저희 아버지와 제갈상민 아저씨께서 친분이 있으시니까요. 서로 으르렁대시기는 하지만.”
“그래서?”
“얼마 전에 제갈상민 아저씨께 아버지께서 도련님에 관해서 물어보셨데요.”
“그런데?”
“그때 제갈상민 아저씨께서 자신보다는 도련님의 최측근인 분이 따로 계신다며 진지춘 의원님을 소개해 주셨어요.”
“그래서 나에 관한 이야기를 그 돌팔이, 아니, 그 빌어먹을 멍청이에게 들었다 이 말이지?”
“네, 왜요?”
“…그런데 그 자식이 나를 ‘도련님’이라고 부르라고 했고?”
“네.”
“……! 이 자식이!”
시후는 품속에 있는 스마트폰을 꺼내어 진지춘에게 전화를 걸었다.
- 아이고~! 도련님! 어쩐 일이십니까요?
통화 연결음이 한 번 울렸을 뿐인데 진지춘이 전화를 받아 시후를 반겼다.
뭘 하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한껏 들뜬 진지춘의 목소리를 듣자니 화가 배로 치솟아 올랐다.
“돌팔이, 당가 녀석들에게 나에 대해서 주절주절 떠들어 댔더구나?”
- 도련님, 당가이십니까? 하이고 참나, 그 녀석들이 도련님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아 제가 따끔하게 몇 마디 해주었습죠.
진지춘의 말에 시후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왜 당가를 찾을 때마다 역용을 했는지 이 자식은 모르는 거였다.
시후는 되도록 당가 녀석들 중 자신에 대해 아는 이가 소수이기를 바랐다.
그건 당가의 특성 때문이었다.
당가 녀석들의 조기 교육이 대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 녀석들은 높게는 가주부터 낮게는 시종에 이르기까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녀석들이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독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고, 독을 사용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이미 자신이야 만독불사지체를 이루어 전혀 해가 되지 않겠지만 주변인들은 달랐다.
하다못해 환골탈태를 이룬 태산과 인호에게도 당가는 충분히 해가 될 수 있는 존재였다.
그 둘도 그럴진대 아버지와 어머니는 혹여나 하는 우려에 큰일을 치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당가와는 거리를 두려고 했던 것인데, 이 멍청한 녀석이 그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반면, 진지춘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시후의 목소리에 살기가 실려있는 것을 느꼈다.
만약 시후가 옆에 있었다면 공기의 고마움을 느끼게 해주었을 그런 살기였다.
- 도, 도련님? 도련님?
“돌팔이. 어디냐?”
- 저, 저는 제갈세가에 잠시 왔습니다만….
“30분 준다. 한국대 총장실로 튀어와. 1초라도 늦으면 네 입을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꿰매버릴 테니까, 늦지 말고.”
- 히익! 도, 도련….
띠릭-
시후는 자신을 애타게 찾는 진지춘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
실제로 시후는 진지춘에게 말한 ‘1초라도 늦으면….’ 그 부분은 진심이었다.
그동안 쓸모가 있겠다 싶어 나불대는 입을 가만히 두었었는데 이런 사고를 치는 입이라면 평생 못 쓰게 해줘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진지춘으로 인해 시후가 화를 잔뜩 올리자 곤욕은 당소영이 치르고 있었다.
은연중에 시후의 몸에서 살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고는 이미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안전하지 못했다.
마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의 무게가 천근이라도 되는 것마냥 느껴졌다.
다른 이였다면 벌써 입에서 신음을 흘렸을 터인데 당소영은 신음 대신 붉은색 피를 흘렸다.
시후는 그런 당소영을 곁눈질로 보고는 혀를 찼다.
“쳇.”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런 모습이, 자신의 처지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거대한 힘에 굴하지 않는 모습이 말이다.
“그 미련함이 제 명줄을 끊는 것인 줄도 모르고 말이야.”
“제 명줄이요?”
“아니야. 그보다 성치는 어디 있냐?”
더는 당소영과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시후는 당성치를 찾았다.
당소영 또한 시후의 의도를 알았기에 입가에 흐르는 피를 스윽 닦고는 앞장서 걸어갔다.
그렇게 당소영의 뒤를 따라간 곳은 체육관이었다.
[사용 금지, 공사 중]
체육관 앞에는 현재 출입을 할 수 없다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당소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체육관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당소영 뒤를 따라 들어가니 농구 코트가 눈에 들어왔다.
코트 가운데는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당성치가 있었다.
시후는 당성치의 느릿느릿한 움직임을 보는 순간 저것이 ‘호접무’임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덕칠이에게 직접 가르쳐준 그 호접무였다.
마치 나비가 나풀나풀 날갯짓하듯 당성치의 두 팔이 허공을 휘저었다.
그러자 멀리 떨어진 농구 골대 그물망이 흔들흔들했다.
확실히 덕칠이와는 다르게 내공이 뒷받침되어 주니 손쉽게 호접무의 오의를 엿본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지.”
멈칫-
속삭이는 듯한 시후의 목소리였지만 당성치는 즉시 움직임을 멈췄다.
옷매무시를 가다듬고는 몸을 돌려 시후를 바라보았다.
처음 마주쳤을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을 좇는 그런 눈빛이 아니었다.
“기다렸습니다.”
“…….”
당성치의 기다렸다는 말에도 시후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걸어가 당성치의 5보 앞에 섰다.
당성치는 두 손을 포개고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해왔다.
이는 시후를 전적으로 믿으며, 그 어떤 말에도 가타부타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당성치로서는 답답한 거였다.
덕칠이가 배워온 호접무를 자신이 직접 배울 때만 해도 자신감이 넘쳤다.
그동안 이루지 못한 당가의 독문 무공의 끝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까지 벅차올랐다.
덕칠이와는 다르게 삼 갑자에 달하는 내공을 가진 자신이었기에 호접무의 오의만 터득한다면 만천화우(萬天花雨)를 펼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무소음으로 말이다.
그런데 수련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점점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되레 심마(心魔)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던 사이에 당소영으로 하여금 시후가 찾아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래서 급히 체육관을 비웠고 현시점의 기량을 보여준 거였다.
이미 시후가 당소영을 각별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분명 자신을 도와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시후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은 전혀 다른 거였다.
“너 피독주(避毒珠) 몇 개 가지고 있냐?”
“…네?!”
“벌써 가는 귀가 먹을 나이인 게냐?”
“아, 아닙니다, 혹시 피독주라 하심이 제가 아는 그 피독주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쯧! 그럼 내가 포도주를 잘못 발음했겠느냐?”
당성치는 시후의 말에 실로 어이가 없었다.
독에 관해서는 천하제일이라 불려도 시원찮을 당가에서 무슨 독이든 중화시켜 주는 효능의 피독주를 거론하고 있는 저 당당함에 말이다.
그리고 저 말투는 분명 그 피독주를 달라는 말투였다.
하지만 피독주는 당가의 3대 보물 중 하나였다.
이미 다른 보물인 만년한철과 대환단은 시후의 손에 넘어간 지 오래였다.
그런데 마지막 피독주를 달라는 저 당당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눈깔 굴리지 말고 대답해라. 몇 개나 있느냐?”
“피독주가 만년한철과 대환단과 더불어 당가의 3대 보물인 것은 아시고 계십니까?!”
“3대 뭐?”
시후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물론, 만년한철과 대환단이 귀한 것은 맞았다.
하지만 피독주는 아니었다.
천마 시절 당가 늙은이와 피독주를 물고 만독사(萬毒蛇) 담금주를 마셨었기에 익히 알고 있었다.
당가에서 피독주를 대량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천마 시절 당가와 이곳 당가는 차이가 있었지만 알아본 바로는 독에 대한 지식은 비견될 만했다.
그런데 피독주를 아까워한다?
헛소리였다.
“그깟 피독주가 언제부터 당가의 보물이었느냐?”
“그게 무슨….”
“너희 당가는 피독주를 만들 수 있지 않으냐?”
“……!”
시후의 말에 당성치는 눈을 부릅떴다.
저 사실은 당가의 가주에게만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비밀이었다.
모든 독을 중화시켜 주는 피독주를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진다면, 그 여파는 당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랬기에 비밀 중의 비밀이었는데 지금 시후가 아무렇지도 않게 거론하자 대경실색하는 거였다.
반면 시후는 그런 당성치의 반응에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반응은 있는 것을 내주는 것이 아쉬운 표정이 아니었다.
마치 자신의 치부가 들춰진 듯한 부끄러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바로 들을 수 있었다.
“피독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꼭 은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설마?”
“맞습니다, 예상하신 대로 피독주 제련과 호접무의 오의는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놈의 늙은이가!!”
시후는 당성치의 말에 천마 시절 당가 늙은이가 한 말이 떠올랐다.
- 이 술에 대한 보답은 언젠가 호접무로 돌려주시게나, 허, 허허.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