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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인하는 천마님-88화 (88/275)

제88화

시후는 한나미가 들려주는 그리스 신화 이야기에 집중했다.

Safety World 히든 퀘스트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한나미가 설명을 꽤 잘했다.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는데도 말에 끊김이 없었다.

어떤 주제를 누군가에게 설명한다는 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대충 설명만 늘어놓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주제에 대해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레벨이 달랐다.

그런데 한나미는 그리스 신화 자체를 처음 접하는 시후에게 이만한 집중력을 끌어내며 이해시키고 있었다.

“나미가 설명을 참으로 잘하는구나?”

“헤헤, 제가 조 발표 같은 것을 자주 하다 보니 좀 늘었어요. 그리고 그리스 신화는 제 전문 분야기도 하고요.”

“전문 분야?”

“네, 저 서양 역사 전공이거든요. 그중에서도 그리스 쪽에 관심이 많아요.”

“오호~ 그래?”

시후는 한나미가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지금 들은 설명만으로도 이번 히든 퀘스트를 하기 위해 다시 접속했을 때 조민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한나미를 바라보는 시후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그 때문에 한나미 옆에 자리하고 있는 덕칠이만 안절부절못했다.

자신의 사랑,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일반인 여자 친구 한나미가 몇 시간째 신나게 대화하고 있는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에 불안한 거였다.

앞에 앉은 이가 시후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거였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을 익히 알고 있기에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때로는 둘의 이야기에 끼어들어 적절한 추임새도 넣으면서 말이다.

‘그래. 차라리 이번 한 번으로 끝내는 게 나을지도 몰라.’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시후가 그리스 신화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 보이니 이번에 모두 듣고 나면 다시는 찾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엉덩이에 땀띠가 나도록 버티고 앉아 있었는데 시후의 눈이 반짝이는 것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사, 사숙?”

“왜?”

“그, 그게, 이, 이만하면 충분히 들으신 거 아닌가 해서…요….”

“그래 보여?”

덕칠은 남자 친구의 본능으로 시후를 이만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시후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생존 본능이 고개를 발딱 치켜드는 바람에 말끝을 흐렸다.

그런 덕칠의 모습에 시후는 무슨 상황인지 단번에 눈치챘다.

딱히 독안공을 사용하지 않아도 덕칠이 녀석이 한나미와 자신을 둘레둘레 보는 것을 보면 무슨 망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좀 놀려줘 볼까?’

평소라면 하지 않았겠지만 덕칠이는 어찌 보면 자신이 당가의 무공을 전수해준 녀석이었고, 그동안 열심히 노력한 기미도 보였으니 상을 좀 주기로 했다.

물론, 덕칠이 상으로 인식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카페도 이렇게 오래 있으니 불편하구나. 덕칠아, 네 집이 이 근처였지?”

“네? 그렇기는 한데, 그건 왜… 설마?!”

“녀석, 놀라기는. 네 집으로 가자.”

“네에?!!”

덕칠은 시후의 말에 사색이 되었다.

덕칠에게 집은 일종의 안식처였다.

당가의 무공을 배우기 위해 매진하고 또 매진하여 파김치가 되어도 집에만 돌아가면 쉴 수 있다는 희망이 피어나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당가 사람들이나 친하게 지내는 만수와 만기에게도 자신의 집 위치는 알려주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곳을 시후가 가자고 하니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시후는 한나미를 부추기고 있었다.

“나미도 덕칠의 집이 궁금하지?”

“음…. 네, 이른 감이 있어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깔끔하게 다니는 오빠의 집은 어떨지 궁금하기는 했어요.”

“거봐라, 덕칠아! 앞장서거라!”

“……!”

덕칠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몸을 일으켰다.

그것이 시후가 일으킨 무형의 기운 때문이라는 것은 웃고 있는 시후의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거부할 수는 없었다.

왠지 지금 저 말을 거부하는 순간. 여자 친구고 뭐고 자기 인생이 끝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덕칠은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덕칠의 집은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다른 이동 수단을 탈 것도 없이 한 블록 정도 걸어가자 주택가가 보였다.

언덕길을 좀 올라가자 덕칠은 빌라 한 채를 가리켰다.

“여기더냐?”

“네.”

“나이에 맞지 않게 꽤 큰 건물에서 지내고 있구나?”

“네?”

“이 빌라 한 채가 너희 집이라는 거 아니었느냐?”

“무, 무슨 말씀이세요? 제집은 저기 제일 꼭대기 층에 있는 옥탑방이에요!”

시후는 덕칠이 가리킨 빌라 한 채 모두가 그의 것이라 착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천마 시절 시후가 기억하는 당가는 부자였다.

당가에서 만든 약재들은 언제나 비싼 값에 거래가 되었기에 당가는 사천에서 알아주는 부자였다.

그랬기에 이곳에서의 당가도 마찬가지라 생각을 한 거였다.

거기에 덕칠은 시후가 알려준 호접무로 당가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지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고작 옥탑방에서 살고 있다는 말에 시후는 어이가 없었다.

“으흠, 이런 경우는 두 가지 중에 하나인데. 윗놈이 뒷주머니를 챙겼거나….”

“네?”

“네가 호구이거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자신이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덕칠의 표정을 보고 후자가 답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전자든 후자든 윗놈이 챙겨주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왕 도와주는 김에 파격적으로 도와주기로 했다.

“덕칠아.”

“네?!”

시후가 갑자기 낮은 어조로 부르자 덕칠은 깜짝 놀랐다.

왠지 모를 스산한 기운에 등골이 오싹했다.

예전이라면 시후가 기운을 일으키는 것을 몰랐을 터인데 지금은 실력이 향상된 덕분에 알아차린 거였다.

“하나만 묻자. 잘 생각해보고 결정해야 한다.”

“무엇을요?”

“라인이라는 말을 들어봤을 거다. 어디, 이 사숙의 라인을 타보겠느냐?”

“네에?!!”

라인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 당가 첫째 여식의 라인을 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랬기에 시후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덕칠은 단번에 알아챘다.

그리고 솔직히 솔깃했다.

당가 가주인 당성치를 비롯하여 아는 무인 누구를 떠올려도 시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만약, 시후의 도움을 받는다면 호접무를 극성까지 익힐 수 있을 테고 당가에서 꽤 높은 지위도 노려볼 만할 터였다.

덕칠은 자신을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시후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말씀은 감사하나 저는 당가인입니다.”

당가에 입문한 이후로 당가의 더러운 일을 하기도 했었지만 그래도 덕칠은 죽을 때까지 당가를 배신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솔깃한 시후의 제안에도 이리 당당하게 거절하는 거였다.

그에 시후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합격.”

“…네?!”

“남들은 당가가 독이나 사용하여 당가의 위상을 높였다 생각하겠지만, 그보다 당가의 위상을 높이 세운 것은 다른 거였다.”

“다른 거라 하시면….”

“당가의 자존심.”

덕칠은 시후의 말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뜻이 어떤 것인지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덕칠의 표정을 보면서 시후는 말을 이었다.

“네가 만약 눈앞에 이익이나 내 위엄에 기가 눌려 그릇된 선택을 했다면 굳이 이 선물은 주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다.”

스윽-

시후는 품속에서 작은 옥병 하나를 꺼내어 덕칠에게 내밀었다.

일전에 제갈신길에게 주었던 옥별과 비슷한 형태였는데 그것과는 다르게 무언가 쓰여 있었다.

소명단(少明團).

진지춘이 만든 신명단의 보급편인 소명단이었다.

신명단에 비하면 그 약효가 10분지 1에 달하겠지만, 그것만 해도 큰 효력이 있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신명단이 주화입마에 빠져 다 죽어가던 제갈신길에게 기력을 불어넣어 줬다면 소명단은 내력이 딸려 기절한 이를 깨워줄 수 있는 정도의 효능을 갖고 있었다.

평소에 주기적으로 복용을 하고 꾸준히 운기를 한다면 내공 증진에 큰 효과가 있을 거였다.

아직 시판되지 않은 소명단은 제갈세가와 태산과 인호에게만 주었다.

조만간 부모님께도 드릴 것이지만 그보다 우선 덕칠에게 주는 거였다.

덕칠은 시후가 내민 소명단 옥병을 받아 들고는 마개를 열었다.

뽕-

“흐읍~! 이건?!!”

“으흠! 당가는 당가구나.”

시후는 마개를 열어 옅게 흘러나오는 향만으로 그 효능을 짐작하는 덕칠을 보며 역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덕칠 또한 독에 관한 많은 공부를 했으며, 독에 대한 내성을 갖기 위해 꽤 많은 독을 섭취했을 터였다.

독과 약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기에 소명단에 대해서 단번에 알아차린 거였다.

“아침저녁으로 그것을 복용하고 운기를 하여라.”

“가, 감사합니다!”

“대신 조만간 너를 긴히 쓸데가 있을 테니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게 힘쓰거라.”

“당가에 해가 되는 일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돕겠습니다.”

“당가에 해라…. 득(得)이 되면 되었지 해(害)가 될 일은 없을 게다.”

짐짓 말에 가시가 있는 말투였지만 덕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한나미는 조심스럽게 덕칠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오빠, 무슨 말씀을 나누시는 거예요?”

당가니, 운기니. 처음 듣는 단어들에 둘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나미였다.

덕칠은 그런 궁금해 미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한나미의 머리를 슬쩍 쓰다듬어 주었다.

“조만간 말해줄게.”

한나미와 진지한 교제를 생각하는 덕칠이었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알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은 시기상조였고 무엇보다 시후가 옆에 있으니 말이다.

셋이 그러는 사이 덕칠의 집인 옥탑방에 도착했다.

빌라 옥상에 자리한 옥탑방은 그 크기가 크지는 않았다.

대신.

“우와~! 오빠, 옥상 너무 넓은 거 아니에요?!”

“그치? 그래서 이곳을 택했지.”

놀라는 한나미의 말대로 주거 공간인 옥탑방보다 옥상의 여유 공간이 세 배는 더 넓었다.

덕칠은 그곳에 운동기구와 화단으로 꾸며 놓았다.

물론, 얼핏 봐서 화단이지 그것들이 모두 당가에서 사용하는 약초들인 것을 한나미가 알 리는 없지만 말이다.

한나미가 화단을 둘러보던 때에 시후의 눈에는 다른 게 들어왔다.

“덕칠아, 너 Safety World 하냐?”

“네? 아, 네.”

그리 넓지 않은 방이었건만 한쪽에 있는 캡슐에 시후가 물은 거였다.

덕칠이가 Safety World를 한다면 한 번쯤은 만나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 오빠도 Safety World 하세요?”

“오. 빠. 도?”

저 말은 한나미도 Safety World를 한다는 말처럼 들렸다.

“나미야, 너도 하느냐?”

“네, 1학년 때 교양 과목으로 ‘가상 현실 세계의 탐구’라는 과목이 있어서 해봤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꾸준히 하고 있어요. 물론 고렙은 아니지만요~! 헤헤.”

“오호~ 그래?”

시후는 한나미를 이번 퀘스트에 합류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퀘스트에는 딱히 레벨 제한이 없으니 데리고 다니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나미야, 너는 몇 렙이더냐?”

“음… 며칠 전에 들어갔을 때 겨우 Lv. 298이 되었어요.”

“그래, 298… 뭐? 298? 고렙 아니라며?”

“아니죠, Lv. 300은 넘어야 고렙인데 아직 거기는 아니니까요.”

“하, 하하….”

낮은 렙이라면 레벨업을 미끼로 포섭하겠지만 저 정도 레벨이면 그것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말장난으로 꾀어야겠다 싶었다.

진실 속에 거짓을 감추는 일이야 천마 시절에도 종종 써왔던 일이기에 쉽게 떠올랐다.

“나미야, 내가 네게 그리스 신화에 관해서 물은 것은 이번에 Safety World에서 벌어지는 어떤 히든 퀘스트 때문이다.”

“히든 퀘스트요? 사숙님께서 하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내가 게임이나 할 시간이 있어 보이느냐?”

“하긴. 그리 보이지는 않으세요.”

말투나 풍기는 분위기로 보아 한나미는 시후를 도인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내가 아는 지인이 그 퀘스트를 하는데 정보가 부족하다길래 내가 좀 알아보는 거였다. 그래서 그런데.”

“그럼, 제가 도와드릴까요?”

“그래 주겠니?”

시후는 한나미의 반응에 옳다구나 했다.

Safety World를 Lv. 298까지 키웠다는 것은 그만큼 열정을 보였다는 거였고 거기에 평소 관심이 있는 그리스 신화를 미끼로 툭 던졌으니 무는 게 당연했다.

진정한 사기는 진실 속에 거짓을 넣어 거짓도 진실로 만드는 것이라 했던가.

이로써 이번 퀘스트 클리어에 필요한 어느 정도의 조건을 갖추었다는 생각에 시후는 덕칠의 집을 나섰다.

덕칠과 한나미가 뒤따라 나오자 시후는 손을 휘저으며 둘을 말렸다.

“너희는 좀 더 같이 있거라.”

“네?”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둘의 반응에 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멍석까지 깔아 주었는데 그 위에서 장단을 맞출 줄 모르는 둘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왕 도와주는 거 확실히 밥까지 떠먹여 줘야겠다는 생각에 시후는 손가락을 튕기며 지풍을 쏘아내었다.

푹-푹-

“어? 어?!”

덕칠과 한나미는 오른쪽 가슴 아랫부분에 무언가 찌르는 느낌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덕칠이었다.

“사, 사숙님? 이, 이건?”

시후가 지풍을 날려 자신과 한나미의 혈을 찍은 것을 깨달은 거였다.

그것이 무슨 혈인지는 모르겠지만 급격히 심장 고동이 빨라지며 열이 확 오르는 게 느껴졌다.

“예전에 아는 녀석이 즐겨 쓰던 혈 자리다. 호감이 있는 둘을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게 도와주는 혈 자리라 했다.”

그 예전에 아는 녀석이 천마 시절 자신의 옆을 졸졸 쫓아다니던 요화선녀인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 혈 자리는 딱, 그 효능만 있었다.

심장 박동이 분당 130회로 빨라지는 거였다.

이는 요화선녀가 수많은 실험을 통해 알아낸 이성에게 가장 큰 호감을 느끼는 심장 박동수였다.

덕분에 둘은 점점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그리고 둘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손을 맞잡아갔다.

이 이후는 굳이 시후가 나설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오늘 별일이 없다면 저 둘은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테니 말이다.

시후는 소명단 외에 덕칠에게 주려는 특별한 선물을 주고는 옥상을 내려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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