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헤라 여왕에게 받은 퀘스트에 대해 설명을 들은 시후는 빠르게 로그아웃했다.
그리고 향한 곳은 무협지 방이었다.
‘가나다’ 순으로 정렬된 어마어마한 양의 무협지들을 한참이나 뒤졌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찾을 수는 없었다.
“젠장! 없잖아?! 그리스 신화가 도대체 뭔데 그걸 알아야 이번 퀘스트를 할 수 있다는 거야?”
시후가 이렇게 급히 로그아웃하고 그리스 신화에 대해서 찾는 것은 조민의 설명 때문이었다.
이번에 받은 헤라 여왕의 퀘스트는 확실히 히든 퀘스트가 맞았다.
달성만 한다면 엄청난 경험치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퀘스트.
다행히 조민은 이 퀘스트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기에 시후에게 곧장 설명해주었다.
상당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이다.
시후는 천마 시절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들을 곱씹어 보았다.
“중세 시대가 시작하기 전에 그리스 신화가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기에 그 잔재로 남은 퀘스트라고? 어이가 없어서, 그리고 뭐? 이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전까지는 다른 퀘스트는 못 받아?!”
이 부분이 제일 짜증 났다.
Safety World 퀘스트란 자고로 한 가지를 진행하면서 같은 장소에서 진행할 수 있는 연계 퀘스트를 받는 것이 기본이었다.
이번 퀘스트 또한 그 기본에 충실하기는 했다.
너무 충실해서 탈이었지만 말이다.
헤라 여왕 퀘스트를 진행하면 오로지 그와 관련된 퀘스트만 진행할 수 있다는 거였다.
이 무슨 마당 쓰는 데 태풍 부는 소리란 말인가.
거기에 한술 더 떠 이 퀘스트를 진행하기에는 시후가 그리스 신화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무(全無)하다는 문제도 있었다.
조민이 언제나 따라다니면서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시후도 그리스 신화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은 알고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티끌만큼의 지식도 없으니 퀘스트를 시작할 수도 없었다.
“하아, 어쩐다.”
시후는 한숨을 내쉬며 방법을 찾기 위해 스마트폰을 꺼내었다.
초록 창 앱을 켜 ‘그리스 신화’라고 검색을 하니 이것저것 신화에 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간단하게는 그리스 신화의 시작부터 신들의 이름과 인간들과의 관계, 그에 따른 이야기들이 엄청 많았다.
“이 많은 것들을 모두 읽어 볼 수도 없고. 어쩐다.”
신화에 대한 정보를 찾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거기다 로그아웃 전에 들었던 조민의 말이 상당히 신경 쓰였다.
- 헤라와 아테나에 관해서만 공부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이 퀘스트는 분명 연계 퀘스트가 발생할 확률이 100%이니까 이왕 공부하실 거 제대로 하시고 오세요.
그런 말을 하며 손까지 흔드는 조민의 모습이 어쩐지 쌤통이라는 표정인 것은 시후만의 착각은 아니었을 거였다.
“쪼그만 녀석이 아주 어른을 알기를. 쯧, 두고 보자 제갈 조민!”
당하고만 못 사는 성격이었기에 반드시 돌려주겠노라고 다짐하는 시후였다.
그러다가 초록 창 앱에 쓰여 있는 것 중 특이한 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스 신화 중 여러 가지의 이야기를 실어 놓은 사이트였는데, 정보 출처가 시후도 익히 아는 곳이었다.
“잘하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도 있겠는데?”
시후는 뜻하지 않게 찾은 해결책에 기뻐하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덕칠이는 오랜만에 강남 나들이를 나왔다.
그것도 무려 ‘데이트’라는 목적으로 말이다.
근래 일어난 당가의 변화에 덕칠은 크게 기여하고 있었다.
본인의 의지보다는 시후의 도움이 컸지만, 어찌 되었든 당가 내에서 입지가 상당히 좋아졌다.
일전에는 누가 부르면 후다닥 달려가 구린 일들을 해주며 비위를 맞추는 일들이 태반이었는데 지금은 그 반대였다.
자신을 그렇게 부르던 이들이 이제는 먼저 다가와 이것저것 쓸 만한 물건들을 건네주며 아첨을 떨었다.
거기에 드디어 클럽이나 술집에서 꼬신 여자가 아닌 일반인 여자 친구까지 생겼다.
한국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저도 모르게 말을 걸었고 그녀는 당당한 덕칠의 행동에 마음을 열어 연인이 되었다.
그동안 여자 친구는 시험 기간이었고 덕칠이는 호접무를 연성하기 위해 시간이 맞출 수 없었는데, 드디어 시간을 내어 데이트를 잡은 거였다.
“스읍! 하아~!”
덕칠은 손바닥을 입으로 가져가 입 냄새가 나는지 확인하며 여자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웅-우웅-
그때 울리는 진동음에 덕칠은 빠르게 스마트폰을 꺼내었다.
잔뜩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 자기야, 어디야?!”
- …나는 네 자기가 아니다만? 그러는 너는 어디냐?
수화기 너머로 뜬금없이 남자 목소리가 들려오자 덕칠은 당황스러웠다.
웬 미친놈이 전화를 잘못 걸었나 싶어 스마트폰 화면에 표시된 발신자를 확인하는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그때 그놈’이라고 나타나 있었다.
- 뭐야? 끊은 거야?
멍하니 있던 덕칠은 살짝 신경질적인 통화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다가 대었다.
“아, 아닙니다! 끊지 않았습니다!”
- 그런데 왜 대답이 없어?
“그, 그게 너무 오, 오랜만에 여, 연락을 주신 거라, 당황해서.”
덕칠은 저도 모르게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그놈’은 시후였다.
자신에게 호접무를 알려주며 당가의 은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
하지만 성격이 괴팍하여 괜히 수틀리는 날에는 본인 목숨 하나로는 끝나지 않을 거라는 윗분들의 경고가 있던 인물이었다.
덕칠은 괜히 말 한 마디 잘못해서 자신의 입지가 나락으로 떨어질까 두려웠다.
- 쫄기는. 그보다 네게 물어볼 게 있어서 연락했다.
“네,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아는 건 무엇이든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통화하는 덕칠이었다.
그때 덕칠의 옆으로 누군가가 슬쩍 다가왔다.
여자 친구 한나미였다.
“오빠?”
한나미는 언제나 당당한 모습만 보여주던 덕칠이 저리 굽실대는 모습에 놀랐다.
혹여나 무슨 큰일인가 싶어 걱정하는 마음에 안절부절못하며 옷깃만 잡고 있었다.
하지만 덕칠은 그런 한나미의 모습에 더욱 곤욕스러웠다.
한나미에게 ‘어서 와’라며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그 바람에 통화가 중단되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목숨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것은 통화 상대인 시후와의 통화를 빠르게 끝마치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시후도 용건을 바로 꺼내왔다.
- 너 그리스 신화랑 아라크네에 대해서 알아?
“네? 아라크네요? 그리스 신화요?”
덕칠은 뜻밖의 소리에 당황스러웠다.
당가에 대한 것도 아니고 무림에 대한 것도 아니고 갑자기 웬 신화 타령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인지 덕칠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
- 어이? 야! 끊었냐?
“아, 아닙니다, 제, 제가 그리스 신화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좀 전보다 잔뜩 성이 난 시후의 목소리에 덕칠은 또다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황스러워하는 덕칠에게 의외의 소리가 들려왔다.
“아라크네요? 아테나 여신과 베틀 짜기에서 이긴 그 아라크네요?”
“응?”
- 응? 누구냐?
덕칠은 자신의 통화 내용을 듣고 반응한 한나미의 말에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다.
분명 한나미의 말은 시후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그렇다고 냅다 한나미를 시후에게 소개해 준다?
그건 악의 구렁텅이에 손잡고 뛰어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덕칠의 이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 너, 한 번만 더 내 말에 대답 안 하면 죽는다.
“히익!”
시후의 입에서 ‘죽음’을 예견하는 말이 나오자 덕칠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제 여자 친구입니다. 그런데 질문하시는 것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 오호~ 그래?
덕칠은 사실 그대로를 말했고, 이런 상황에 한나미는 덕칠이 누군가에게 자신을 당당하게 여자 친구라고 말하는 모습에 수줍어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도 저런 수줍어하는 한나미의 모습에 덕칠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이 전화를 끊은 후 한나미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가고만 싶은 본능이 들끓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시후의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 잘됐네, 너 어디냐?
“강남 근처에 있는 삼성 딜라이트 앞입니다.”
어디냐고 묻는 시후의 말에 반사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말한 덕칠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30분 후부터 덕칠은 오늘을 평생 잊지 못할 하루였다고 지인들에게 말하고 다녔다.
* * *
시후는 집에서부터 경공술을 펼쳐 건물 위를 쏘아져 갔다.
목적지는 덕칠이와 만나기로 한 서초구 삼성 딜라이트였다.
처음 듣는 장소였지만 스마트폰에는 아주 좋은 내비게이션 앱이 있었다.
목적지를 설정하니 거기까지 가는 빠른 길을 찾아주었다.
물론, 시후가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대로가 아닌 직선거리로 날아가는 바람에 연신 알림 메시지가 울리고 있지만 말이다.
띠링-
[경로를 이탈하여 재탐색합니다.]
띠링-
[경로를 이탈하여 재탐색합니다.]
띠링-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나름 이곳 생활에 큰 발전을 이루었다는 생각에 자화자찬하며 시후는 딜라이트 근처 골목에 내려섰다.
갑자기 시가지 한복판에 사람이 떨어져 내리면 난리가 날 것 같았기에 이러는 거였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덕칠의 기가 느껴졌다.
“이 자식 봐라?”
시후는 덕칠의 기를 느끼며 생각보다 그간 많은 진전이 있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무래도 자신이 가르쳐 준 호접무를 상당히 연습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덕칠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이 정도로 강해질 일이 없었다.
본래 통화를 하면서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한다는 말에 쓴소리를 한번 해주려고 했었는데 이 정도 기운이라면 상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여자 친구라는 사람에게서 시후가 알고 싶어 하는 정보를 얻은 후에 말이다.
골목 모퉁이를 돌자 쉽게 덕칠이를 찾을 수 있었다.
뭐가 그리도 불안한지 연신 다리를 떨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옆에는 긴 생머리에 크고 동그란 안경을 쓴 수수한 외모의 여성이 서 있었다.
아무래도 저 여성이 덕칠의 여자 친구인 것 같았다.
시후는 골목에 내려서면서 이미 천투변용술을 이용해 당가를 찾을 때 변용했던 중년인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여~ 덕칠아!”
시후는 한쪽 손을 높이 치켜들며 덕칠이를 불렀다.
그러자 덕칠이는 고개를 홱 돌려 시후를 발견하고는 여자 친구의 손을 잡은 채 힘껏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 얼마 되지 않은 거리였지만 달려왔다는 성의를 보이기에는 충분했다.
“바, 반갑습니다, 사숙.”
“그래, 오랜만이다.”
시후는 덕칠에게 자신을 ‘사숙’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통화 내내 존대를 받던 상대가 고등학생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가는 한나미의 의심을 살 수 있었기에 미리 언질을 준 거였다.
이에 한나미는 철석같이 시후를 진짜 사숙이라고 믿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시후의 말투가 한창 연배 높은 어른의 말투였기 때문이었다.
천마 시절부터 살아온 시후였기에 그런 것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근래에 17세 고등학생으로 살아오던 자신의 말투보다 지금이 더 편했다.
“그래, 그리스 신화가 그렇게 시작된 것은 알겠구나.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아라크네에 대해서 들어볼까?”
“네, 사숙님.”
셋은 삼성 딜라이트 근처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시후는 한나미가 한국대 서양사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나미는 그리스 신화를 고등학교 때 영어 공부를 위해 봤던 책에서 알게 되었다는 것부터 시작했다.
딱히, 그 시발점부터 들을 필요는 없었지만, 현재로서는 한나미가 가장 빠른 루트였기에 인내심을 갖고 들었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신화 이야기가 대단했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가진 특별한 능력에 대해서 들을 때마다 천마의 무공과 견주어보기도 했다.
“제우스의 번개는 천마뇌전공(天魔雷電功)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겠군.”
“네?”
“아니다, 이야기를 계속해 보아라.”
누군가가 이 말을 들었다면 헛소리라며 비웃었겠지만 시후의 평가는 객관적이었다.
천마뇌전공은 현재로서는 시후가 펼칠 수 없는 무공이었다.
그 무공을 사용하려면 천마 시절 무공의 5할은 회복해야 했다.
그렇게 된다면 산 하나를 번개로 날려버리는 것쯤은 문제도 아닐 거였다.
어서 내공을 증진해야 할 텐데 지금으로서는 Safety World의 레벨업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헤라, 아테나, 아라크네에 대해서 듣는 게 먼저였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헤라 여신과 아테나 여신이 앙숙이라는 거예요.”
“둘이?”
“네, 아테나 여신이 워낙 이쁘고 다재다능했기에 그랬는데요. 그중에서도 베틀 짜기가 대단했다고 했어요.”
드디어 이번 퀘스트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튀어나왔다.
“좋구나,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계속해 보아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