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시후는 얼굴이 따끔거릴 정도로 빤히 바라보는 헤라 여왕의 시선을 마주했다.
‘저 녀석이 헤라 3세란 말이지?’
헤라 왕국의 여왕 헤라 3세.
그레이스 제국 3개의 왕국 중 유일한 여성 통치자.
신성력을 토대로 전장을 누비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잔다르크 같다고 했다.
잔다르크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전 낙뢰를 막은 헤라 여왕의 실력은 진짜였다.
그렇게 시후와 헤라 여왕이 서로를 관찰하는 사이.
아킬라이와 집정관이 헤라 여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시후 일행은 시후 뒤로 자리하고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었다.
오직 시후만이 여전히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헤라 여왕을 마주하고 있었다.
“어허! 무엄하다! 누구 앞인지 아는 것이냐?”
헤라 여왕 옆에 있던 중년인이 소리를 질러왔다.
그 소리에 다들 시후와 아킬라이가 싸운 이유를 되새겼다.
아무리 게임 속이라지만 설마 여왕에게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을 줄이야.
게임 속이니 여왕에게 한 번쯤은 고개를 숙일 거라 생각했는데 모두의 예상이 빗나갔다.
“오, 오빠? 저….”
“내가 네게 머리를 조아려야 할 의무가 있나?”
조민이 무어라 말하려는 차에 시후가 이미 일을 저질렀다.
아킬라이와 집정관을 포함한 모두가 시후의 말에 눈이 토끼 눈이 되었다.
집정관이야 어찌어찌 상대한다 치지만 그래도 여왕인데, 저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반응이었다.
정말 척살령이라도 내린다면 어찌하려고 저러는지 걱정하던 차에 의외의 소리가 들렸다.
“호, 호호, 건방진 게 아주 재미있구나?”
헤라 여왕이 시후의 말에 전혀 기분이 상해 보이지 않는 거였다.
다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일단은 여왕이 화가 난 것 같지 않으니 척살령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여전히 시후가 저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기는 했다.
다들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 사이 시후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오늘 참 그래. 내가 듣기 싫어하는 말들만 골라서 듣고 있으니 말이야.”
그 말에 집정관은 제 발이 저려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조금 전 시후의 손에 죽을 뻔한 일을 떠올렸다.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아 애써 시후의 시선을 피했다.
집정관이 그러거나 말거나 시후는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네가 여왕이라는 직위를 갖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 하지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이, 이런! 방…자한… 어?”
헤라 여왕을 옆집 친구처럼 부르는 시후의 말에 대신들이 나섰다.
저 오만방자한 유저에게 헤라 왕국의 법도를 가르치려고 말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마치 몸에 자유를 빼앗긴 것처럼 눈과 입을 뺀 나머지 신체 부위를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것은 헤라 여왕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는 것.
다른 이들은 당황하는 사이 헤라는 몸 주위를 감싸오는 얇은 무언가를 봤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은 실 같은 그것의 끝에는 시후가 있었다.
그리고 시후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얇은 실 같은 것의 양이 늘어났다.
“네 스킬인가?”
“‘천마기사(天魔氣絲)’라는 것이다.”
“신기하군.”
“쓸데없이 나서는 녀석들을 묶어둘 때 자주 사용했던 것이지.”
시후의 말은 사실이었다.
천마기사는 천마 시절, 적에게 사용하기보다 천마 신교도들에게 사용한 일이 더 많았다.
원체 거칠기로 유명한 녀석들이 많았던 탓인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명령을 어기고 헛짓거리하는 녀석들이 꼭 있었다.
천마야 그런 사소한 문제쯤이야 가볍게 넘길 수 있었지만, 조직적으로 움직여 인명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지괴의 생각은 달랐다.
그래서 지괴는 천마에게 투정을 부리듯 건의를 했고, 천마는 천마기사라는 무공을 만들었다.
천마기사는 기를 얇게 흩날리듯 뿌려 상대방을 속박하는 무공이었다.
“흥미로워. 이런 보이지 않는 실로 우리 움직임을 제약하다니.”
“이것 봐라?!”
시후는 살기를 피워 저들의 움직임을 제약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때로는 공포를 느끼지 않는 상대와의 대화도 필요하니 말이다.
다만, 쓸데없는 짓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천마기사를 펼친 거였다.
그것에 당한 대신들이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의 기분을 느끼고 있지만 말이다.
한편 시후는 헤라 여왕의 능력에 흥미가 일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천마기사의 정체를 알아냈단 말이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킬라이와 같은 스킬을 사용했지만, 그 효과가 천지 차이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헤라의 능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헤라 여왕에게 머리를 조아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당당한 걸음걸이로 걸어간 시후는 어느덧 헤라 여왕 한 발 앞에까지 다다랐다.
다들 종잡을 수 없는 시후의 다음 행동을 걱정했다.
“반갑다. ‘See 후’라고 한다.”
역시나 우려대로 시후는 오른쪽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일개 유저가 왕국의 여왕에게 악수를 청하는 장면에 다들 입이 쩌억 벌어졌다.
그러면서도 저리 당당한 시후의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기에 한편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라 여왕은 자신을 향해 내민 시후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여왕이 된 이후로 누군가가 악수를 청해온 기억이 전혀 없었다.
Safety World 오픈 당시부터 이미 여왕이었던 헤라였기에 사실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헤라 여왕은 불쾌감보다는 흥미로움이 가득했다.
“오호호, 참으로 재미난 유저구나? 그래! 나도 반갑다. 헤라 3세라 한다.”
호탕하게 웃으며 헤라 여왕은 시후의 손을 맞잡았다.
시후 역시 자신이 생각했던 ‘여왕’의 이미지와는 다른 헤라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악수의 정확한 유래를 아나?”
“유래?”
뜬금없이 악수의 유래를 논하는 시후의 말에 헤라 여왕은 또 한 번 호기심이 일었다.
“상대방에게 손바닥을 보이는 것으로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그 말은, 나와 우호적인 관계를 갖겠다는 말인가?”
“뭐, 여왕과 친하게 지내서 나쁜 것은 없어 보이니까.”
“뭐라? 참으로 솔직한 유저구나? 호호!”
시후의 말에 격하게 반응하는 헤라 여왕이었다.
이제는 이런 헤라 여왕의 반응이 되레 대신들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품위에 맞지 않게 저리 웃으실 정도 저 유저가 마음에 드시는 건가?’
이미 헤라 여왕은 시후를 손님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자 대신들은 조금 전 시후에게 오만하다느니 방자하다느니 하면서 삿대질을 했던 일이 떠올랐다.
슬슬 자신들의 처우가 걱정되었다.
특히, 집정관이 말이다.
다른 대신들이야 헤라 여왕과 동행하느라 나중에 나타났지만, 자신은 처음부터 지랄했었다.
그 때문에 아킬라이와의 전투도 벌어졌었다.
거기에 쑥대밭이 된 연병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살길을 찾기 위해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집정관의 곁으로 누군가 슬쩍 다가왔다.
“참으로 난감하시지요?”
“다주힐 님?”
“그 마음 충분히 공감합니다.”
금발에 잘생긴 외모의 다주힐은 세상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다주힐을 보자 집정관은 문득 다주힐이 저 유저와 동행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덥석-
“다주힐 님,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진지춘은 간절한 마음으로 손을 잡아 오는 집정관의 모습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도련님께서 참으로 손속에 정이 없으시긴 합니다.”
“아… 그럼, 저는….”
집정관의 안색이 사색이 되는 것을 본 진지춘은 살짝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하지만 도련님을 지척에서. 그것도!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제 말씀을 매몰차게 내치시는 분은 아니시기에….”
“다주힐 님,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뭐….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발….”
“그래도 도련님의 기분을 맞추려면 그만한 무언가가 있어야 하기에….”
집정관은 점점 하하 호호 하며 분위기가 좋아지는 시후와 헤라 여왕의 모습에 애가 타들어 갔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헤라 여왕이 자신의 방패막이가 되어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정말 시후가 마음만 먹으면 자기 목을 치는 일은 이제 일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 진지춘이라는 한 줄기의 희망이 보이자 매달리기 시작했다.
“도, 도와만 주신다면! 야누스의 방패라도 빌려 드리겠습니다.”
“어이구~ 뭘 그런 국보까지.”
집정관의 말에 진지춘은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야누스의 방패’는 헤라 왕국의 국보 중 하나였다.
그에 대한 수많은 썰들이 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떨어지는 유성을 야누스의 방패로 막았다는 일화가 있었다.
그에 대한 영상은 없었지만 그만큼 대단한 아이템이라는 거였다.
하지만 진지춘이 필요한 것은 그런 방패 따위가 아니었다.
“국보는 왕국을 위해 두시고, 이번 퀘스트를 할 때 집정관님의 사병들을 빌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제 사병이요?”
“네, 그 정도면… 도련님의 토라진 심기를 어르고 달래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사병 3백 명을 빌려 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띠링-
[집정관과의 사병 3백 명의 지휘권을 양도받았습니다.]
[해당 지휘권은 1회의 퀘스트에 한합니다.]
진지춘은 눈앞에 나타나는 메시지를 읽으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집정관이 눈치채지 못하게 등 뒤로 손을 돌려 OK 사인을 보냈다.
“헐… 저게 먹혔다고?”
“대박. 그 말도 안 되는 사기극이 먹힌 거야?”
“와… 시후 장난 아니다.”
일행들은 진지춘의 사인을 보며 저마다 놀랐다.
사실, 진지춘이 집정관과 거래한 것 모두가 시후의 지시로 이루어진 거였다.
그 사실을 일행들도 알고 있었다.
언제?
시후가 헤라 여왕에게 걸어갈 때였다.
시후는 ‘효과적인 잔꾀’라며 일행들에게 계획을 메시지로 알렸다.
사실, 시후는 헤라 여왕이 연병장에 등장하는 순간 퀘스트 알람이 뜰 거라 예상했다.
그리고 그때 집정관이 일행들 뒤에서 부들부들 떨며 잔뜩 움츠려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순간 어떤 계획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헤라 왕국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정관.
그는 까보지 않은 보물 상자일 게 뻔했다.
집정관으로 인해 기분이 상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덕분에 벌어진 아킬라이와의 대련은 즐거웠다.
하지만 집정관이 저리 벌벌 떨고 있으니 그것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진지춘에게 지시한 것이 사병을 얻어내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번 퀘스트에 쓸 만한 무언가를 뜯어내라는 거였지.
사병을 뜯어낸 것은 오로지 진지춘의 잔머리 덕분이었다.
‘그 의도가 그저 제 몸 한번 편해 보자는 생각에서 나온 거겠지만 말이야.’
뭐가 되었든 결과적으로 300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받았으니 시후 또한 만족스러웠다.
시후가 일행들의 일에 정신이 팔려 있자 헤라 여왕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제 그대가 원하는 것을 이룬 것 같은데 우리를 좀 풀어주는 게 어떤가?”
“기다려 줬다는 말투네?”
“생각하기 나름이지 않겠나.”
“재미있군.”
자신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뻔히 알면서도 방관해 주다니.
헤라 여왕의 능력도 그렇고, 심기(心氣) 또한 남다르다는 것을 인정한 시후는 천마기사를 거두었다.
덕분에 몸에 자유를 되찾은 대신들은 슬금슬금 물러나 헤라 여왕 뒤로 몸을 피했다.
“흠, 꽤 피곤한 삶을 사는구나?”
“그것이 여왕의 업보이니까.”
저런 것들의 목숨까지 지켜줘야 한다는 투로 말한 거였는데 헤라 여왕은 오히려 자신의 역할이라며 되받아쳤다.
시후는 헤라 여왕과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재미를 느꼈다.
헤라 여왕을 보고 있자니 천마 시절, 자신의 말에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맞받아치던 그녀가 떠올랐다.
‘왕족은 원래 그런 것인가?’
현실에서는 당소영, Safety World에서는 헤라 여왕을 통해 그녀를 떠올리는 시후였다.
“좋아, 상황이 이렇고 장소도 요 모양 요 꼴이지만 본래 목적으로 돌아가 볼까?”
“좋은 생각이다. 그대들을 왕국으로 부른 것에 대해 그만한 대접을 해줘야겠다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내 부탁을 먼저 들어주길 바란다.”
“굿. 이야기는 그 부탁을 들어준 후에 나누기로 하지.”
“호, 호호. 호탕한 그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구나. 부디 이른 시일 안에 그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길 바란다.”
띠링-
[히든 퀘스트 발생.]
[‘헤라 여왕의 간절한 부탁’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오.]
[해당 퀘스트의 내용은 퀘스트 수락을 한 후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후는 히든 퀘스트라는 메시지에 미소를 띠었다.
히든 퀘스트는 다른 퀘스트보다 보상이 훨씬 컸기에 레벨업을 빨리 이룰 수 있었다.
“좋아, 무슨 퀘스트인지 볼까?”
시후는 무슨 퀘스트 간에 재빨리 클리어할 생각에 ‘네’를 눌렀다.
띠링-
[히든 퀘스트 수락.]
[헤라 여왕의 간절한 부탁.]
[헤라 여왕은 아테나와의 베틀 짜기에서 이긴 아라크네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고 합니다.]
[아라크네를 찾아 헤라 여왕에게 데리고 오십시오.]
[보상 : 경험치, 국보 사용권, 유니크 아이템.]
시후는 히든 퀘스트 내용을 읽으며 두 눈을 껌뻑였다.
다시 한번 읽어봐도 도무지 퀘스트 내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테나는 누구이고, 그와 베틀 짜기를 겨뤄 이긴 아라크네는 또 누구인지. 그 아라크네라는 녀석을 왜 데리고 오라는 건지.
고작 누군가를 데리고 오는 게 히든 퀘스트인가 하는 생각에 일단은 일행들에게 퀘스트 내용을 공유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조민을 바라봤다.
어서 클리어할 방법을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명석한 두뇌를 가진 조민이라면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시켜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에서였다.
그리고 역시나 조민은 퀘스트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반응했다.
“그렇지. 단번에 알아채는구나? 그래, 빠르게 클리어할 방법은?”
고작 누군가를 데리고 오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기 싫은 시후였기에 바로 공략법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런 시후에게 돌아오는 조민의 말은 너무나도 의외였다.
“오빠… 똥 밟았네요?”
(다음 편에서 계속)